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60화 (160/1,007)

[160] 아메리칸 드림 =========================

#94-1

○ 아메리칸 드림

부산 그룹 오너 일가들이 환경법 위반으로 모두 구속되면서 한국이 떠들썩해졌다.

오죽하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제주도 정상 회담이 살짝 밀리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재벌이 무슨 죄를 저질렀든 언제나 솜방망이로 만지던 사법부가 갑자기 180도 달라졌으니, 언론이 난리였고 뉴스를 보던 사람들도 숨겨진 다른 일이 있나 싶었다.

사회의 윗줄에서 세상 돌아가는 속사정을 좀 아는 사람들은 전명헌 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유재원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집 전화기는 당분간 내려놨고, 최강욱에게도 미리 언질을 줘서 쓸데없는 전화는 다 차단했다.

그런 와중에 박상권 사장은 제 할 일을 완벽히 수행했다. 부산 그룹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부산 양조 주식들을 싹쓸이했고, 대주주에 등극했음을 공지했다.

그러면서 이번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의 책임을 물어 현 부산 양조 사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사장을 선임하는 긴급 주주총회를 요청했다. 부산 양조 경영진 측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부했다.

특히 박상권 사장이 서자라는 걸 아는 부산 그룹 오너 일가는 무조건 반대했다. 가장 큰 반대는 역시 현 부산 양조 사장인 박상석이었다. 공식적으론 3남이고, 박상권 사장 포함해서는 4남인 박상석은 위의 형들이 모조리 구속되자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좋아했다가, 박상권의 등장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검찰 특수부의 참고인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던 탓이다.

제 발 저린 게 많은 박상석에게는 박상권이 검찰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소액주주들은 모두 박상권 사장에게 자신의 주권을 위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상권 사장이 유재원의 투자를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증권사 객장에서 암암리에 퍼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부산 양조 긴급 주주총회에서 현재의 경영진은 모두 물갈이가 되었고, 새로운 신임 사장으로 박상권이 단독 응모해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선임되었다.

박상권 사장은 이제껏 관성적으로 해오던 모든 악습을 타파하고, 양조 회사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여 부산 양조에 드리워진 악명을 벗겨내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또한, 맥주 생산 공장의 설비도 유럽의 기술과 장비를 들여오는 대대적 투자를 통해 한국의 맥주 품질도 유럽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이번 사건의 배후로 꼽히는 유재원에 대한 관심도 올라갔다. 무슨 이유로 유재원이 부산 그룹의 오너 일가를 공격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일반인뿐만이 아니라 재벌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재벌들의 입이나 다름이 없는 매스컴에서 열심히 ID 그룹의 문을 두드렸다. 한 번 크게 당한 게 있어서 덕진리까지는 쳐들어오진 못하고, 서울 지사의 최강욱 비서실장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대며 열심히 이유를 물었다.

-유재원 회장이 부산 그룹 오너들에게 감정이 있다는 건 지나친 비약.

-대통령께 법과 원칙으로 처리하는 것만이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 조언을 드린 것뿐.

결국, 최강욱은 매스컴을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주었다.

매우 무미건조한 말이었고, 원칙적이었다. 일반인의 경우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재벌들 그 누구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과 대화 한 번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재원은 본인의 사무실에서 평소와 다름이 없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출근하면 미국의 사업장에서 보낸 각종 보고서를 처리했고, 곧바로 안드로이드 1.0 완성을 위한 프로그래밍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업무도 틈틈이 보는 것이다.

부산 그룹의 일이나 고졸 검정고시 등등.

유재원을 귀찮게 하는 일을 모두 다 처리한 덕에 5월에 접어들면서 유재원의 프로그래밍 능률은 키보드 워리어를 혼자 만들었을 때와도 뒤지지 않았다.

5월 7일, 아침도 그렇게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유재원이 업무를 위해 ID 톡에 접속하자마자 대화 요청이 들어왔다.

ID 소프트웨어의 존 카멕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3D FPS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며칠 전 다음 작품으로는 무얼 만들어 보고 싶으냐는 유재원의 물음에 존 카멕은 생각 중이었다고 했다.

드디어 오늘 마음을 정한 모양인데, 유재원의 예상과 좀 달랐다. 둠 2를 말할 줄 알았는데, 타이틀이 아니라 게임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제대로 된 3D FPS라니!

유재원도 두 손을 들어 환영이다.

회사와 집안, 심지어 대인 관계까지.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으니, 유재원은 행복에 겨워 살 것 같았지만, 부족한 건 여전히 있었다.

요즘 유재원에게 제일 큰 갈증을 주는 건 바로 즐길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엔 마냥 신선하게만 느껴졌던 텔레비전도 이젠 시시해졌다. 화질도 문제였고, 예능이나 코미디 등등 재미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진부했다.

게임도 문제다.

둠이 세계적인 초인기 타이틀로 등극했다.

판매량으로 치면 전 세계적으로 2백만 장은 일찌감치 넘었고, 지금은 3백만 장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정산금이 돌아왔을 때 ID 소프트웨어의 존 카멕과 핵심 개발자들에게 페라리 한 대씩, 새롭게 들어온 신규 개발자들에겐 임팔라 같은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돈이 보너스로 지급되었다. 그렇게 보따리를 풀고도 상당한 자금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대박을 올리는 중이지만, 유재원에겐 그다지 신선한 건 없었다. 싱글 플레이도 다 깬 다음, 멀티 플레이를 10여 판 플레이하자 호기심이 뚝 끊어졌다. 일명 게임 불감증이 재발한 것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선 가상현실 게임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광활한 오픈 월드가 3D로 구현된 게임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존 카멕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더 나은 진보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제대로 된 3D 게임이라니!

“둠 2를 완벽한 3D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입으로는 크게 환호하는 유재원이지만, 손가락으로 옮겨지는 말은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음, 둠 2인지 아니면 다른 타이틀인지는 생각해보진 못했습니다만. 뭐든 좋으니 제대로 된 걸 만들고 싶습니다!

아마도 둠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둠은 이전에 출시한 울펜슈타인에 비해 엄청난 개선이 있었던 타이틀이었다. 보다 3D다워졌고, 높이의 차이도 있었다. 그래픽도 한 차원 높아졌고, 멀티 플레이도 훨씬 체계가 잡혔다. 이러한 요소 덕분에 둠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불러왔다.

오죽하면 둠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새로 사고, PC 통신이나 인터넷에 가입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완벽한 3D냐고 했을 땐, 그건 아니다.

3D의 기본이랄 수 있는 폴리곤은 단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평면적인 그림 파일을 잘 가공해서 3D의 느낌을 내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흠, 그러면 폴리곤으로 처리를 해야 할 텐데, 요즘 컴퓨터로 그게 되겠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최신의 486 DX2-66으로 테스트를 해봤는데, 초당 1만5천 개 정도를 처리할 수 있겠더군요. 텍스처를 쓰지 않은 순수한 폴리곤 처리 능력으로 1만5천 개가 한계입니다.

1만5천 개?

이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너무도 허접한 숫자라서 말문이 턱 막히고 마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 초에 나온 3D 가속카드를 보면 초당 수억 개의 폴리곤을 처리했고, 수십억 개의 픽셀을 그려낼 수 있는 강력한 성능을 뽐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한 건 1초라는 시간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좀 부드럽게 움직인다고 보이려면 초당 30장의 프레임을 찍어줘야 한다. 그러면 초당 500개의 폴리곤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500개의 폴리곤으로 캐릭터 하나 만들어낼 수나 있나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폴리곤이나 텍스처 처리를 별도의 하드웨어에서 처리해주는 장치가 있으면 수월하게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D 가속 카드!

역시 존 카멕은 생각하는 것도 좀 다른 양반이다.

21세기 컴퓨터 업계에서도 CPU 하나로 화려한 그래픽을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래픽카드 업계에서 별도의 가속 카드를 만들었다. GPU의 탄생이다.

CPU는 범용 연산으로, GPU는 그래픽 전용 연산으로 분담해서 처리하자 3D 그래픽에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

“우리가 GPU를 만들자는 말씀이세요?”

-GPU? 그건 뭡니까?

아! 이런 실수다.

GPU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은 시절인데,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여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존이 조금 전 말한 게, 그래픽만 전문으로 처리하는 칩이잖아요. 그게 그래픽 프로세서 유닛(Graphics Processing Unit)이니 앞글자만 따면 GPU죠.”

-오! 좋네요. GPU라. 적절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CPU와 확실히 구분되면서 그래픽 전용이라는 개념도 딱 들어오는군요.

순발력 넘치는 대답으로 존 카멕의 감탄을 샀지만,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음, 우리가 개발하자는 건 아닙니다. 회사에 그래픽용 반도체를 설계할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대신 우리와 함께하는 그래픽 카드 제조사가 있지요.

“그렇네요”

존 카멕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또 끄덕였다.

원래 GPU의 개발 흐름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분리된 형태였다. 대신 그래픽 가속을 위한 라이브러리는 공통으로 사용했다. 하드웨어 제조사가 가진 각자의 개발력과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도 공통의 라이브러리가 있으니 게임 개발사는 호환성을 따질 필요 없이 편안하게 게임을 만들었다.

게이머들은 벤치마크의 성능과 색감이나 편의성 그리고 가격 등등의 요소를 고려해서 본인이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다행히 보스가 글라이드 X를 만들었기에, 차기 제품 개발에 대한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글라이드 X에 폴리곤이나 텍스처를 처리할 기능을 넣고 공개하면 그래픽 카드 제조사들도 이에 맞춰서 신제품을 만들 겁니다.

“정답이네요! 그러면 이번에 출시할 컵케익에 이것도 넣죠!”

표준화된 라이브러리만 제대로 만들어놓으면 시장은 알아서 형성된다. 여기에 신기술을 이렇게 쓰는 거라는 데모를 보여주면 금상첨화다. 존 카멕이 둠의 차기작으로 완벽한 3D FPS를 내놓는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네? 진짜로요?

유재원의 시원스런 대답에 존 카멕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차기 운영체제는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혔다고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제가 말한 기능을 넣는다고 개발이 지연되거나 그러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하하, 걱정은 존이나 제임스가 해야 할 거 같은데요? 컵케익은 모듈식으로 설계해서 확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거든요. 대신 두 분은 글라이드 X에 탑재할 3D용 라이브러리를 새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데려온 제임스는 글라이드 X를 담당했다.

마이크로코드의 최적화를 통해 성능을 더 향상하고, 새로운 기능도 열심히 추가 중이었다. 매주 받았던 보고서를 보면 이미 상당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렇지만 3D 관련해서 작업한다는 말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사실 보스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아직 보고를 올리지 않았지만, 3D용 라이브러리 제작은 몇 달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제법 성과가 있다고 판단되어 보스께 오늘 보고를 드리는 겁니다.

이런!

이렇게나 바람직한 사람들을 보았나.

========== 작품 후기 ==========

다음 편으로 가기 전 추천 한 방 부탁드립니다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