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59화 (159/1,007)
  • [159] 룰 브레이커 =========================

    #93-2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낙동강 페놀 오염이에요.”

    유재원의 말에 노 대통령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세금 문제라거나, 규제에 대한 하소연이 나올 줄 알았다. 유재원을 만나기 전에 봤던 재벌 회장들이 보통 하는 말들이 그런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말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노 대통령이다.

    “제가 환경 문제에 대해 큰 우려가 생긴 건, 환경 문제 때문에 직접 피해를 봤던 당사자라서 그래요.”

    폴리카보네이트 때문에 생긴 오해였고, 유재원과 삼보의 시기적절한 대처로 부드럽게 넘겼던 사건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실제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터진 사건인 탓에 그 여파가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큼 컸다.

    “아아. 그렇구나.”

    노 대통령도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몇 번이고 우려먹어도 탈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직접 환경오염을 저지르지 않아도,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오래가더라고요. 만약 한국산 제품에 환경오염 제품이란 딱지가 붙으면 수출에 차질이 있을 건 당연하죠. 게다가 금융 투자의 경우 이미지로 먹고사는 사업인데, 이런 식이면 선진국으로부터 투자금 유치도 힘들어 질 거예요.”

    유재원의 말에 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꼬리만 자르고 어물쩍 덮고 넘어가는 거 같아요. 이번 일로 실제 이득을 챙긴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제일 약한 일선 작업자들만 처벌이 이뤄지고 있잖아요. 그러면 오너들에겐 이런 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꼴이에요. 이대로 마무리되면 또 환경 사고는 터질 수 있어요.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윗선까지 확실하게 잡아야 이런 짓을 또 벌이지 못할 거예요.”

    긴말을 마친 유재원은 노 대통령의 안색을 확인했다. 보통 정치인은 아닌지라 얼굴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흐음. 맞는 말이다.”

    다행히도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지시해놓으마. 대신 이걸로 내게 빚 하나 생긴 거다.”

    잉?

    빚이라니.

    전생의 기억 때문에 빚이라고 하면 넌더리가 나는 유재원이었다. 게다가 환경 사고를 터트린 작자들 때려잡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죄지은 사람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해달라고 한 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데, 빚이라니!

    아!

    생각해 보니 이번 일로 인해서 부산 그룹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는 로비가 오는 건 당연했다. 당으로부터 왔을 수도 있고, 청와대에 직접 전해졌을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부산 그룹과 오너를 살려달라는 쪽과 법대로 처리해달라는 유재원을 두고 선택을 해야 했다.

    유재원의 상식이라면 옳은 걸 선택해야 맞겠지만,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되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유재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나, 부산 그룹 구명이나 비슷한 것이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부산 그룹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러니 관행을 뒤집는 일이란 대통령에게 있어 선심을 크게 쓰는 사안이었다.

    “으, 알겠어요.”

    나중에 무슨 요구를 해올지 모르겠지만, 시원스럽게 말하는 유재원이었다.

    어차피 노 대통령의 권세는 몇 년 남지 않았다. 나중에 감옥에 들어가고 전직 대통령의 지위도 박탈당해 끈 떨어진 신세가 된다.

    지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큰일을 하는 유재원이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건 아니다.

    혹시나 나중에 들어주기 난감한 소원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해적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만국 공통의 기조와 궤를 같이하는 거다.

    해적이란 신의 없는 자들의 상징이다. 거짓말을 일삼고,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는 작자들이니 이들과 약속을 하더라도 지켜질 일은 없다. 이런 사람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면 지킨 쪽만 손해를 본다.

    “그나저나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하면 대학에 진학할 자격이 생기는데, 어디로 갈지는 정했느냐? 내가 알아봤는데, 미국에 간다고? 서울대로는 좀 부족한가?”

    노 대통령의 말에 유재원은 개인적인 관심을 표하는 것인지, 아니면 압박을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네. 제가 IT에 몸을 담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IT 분야의 최첨단 기술이 있는 곳은 미국이라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그건 그렇지. 으음, 그러면 미국의 어느 대학교인가? 하버드? 예일?”

    역시 어른들에게 미국 명문대를 말해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하버드가 나올 거다.

    “아뇨. 저는 스탠퍼드 대학교를 생각 중입니다. 컴퓨터공학 쪽은 하버드보다 스탠퍼드가 더 나으니까요. 게다가 제 미국 사업장도 샌프란시스코에 있고요.”

    “그렇구나. 건투를 빌어주마.”

    유재원의 설명에 노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이 방탄 리무진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다음 행사를 시작했다.

    뒤따르는 유재원의 발걸음은 조금 무거웠다. 노 대통령이 마음의 빚 운운하지만 않았더라면, 참 괜찮았을 행사였을 것이다. 괜히 마지막에 ‘빚’ 따위를 운운한 덕에 오점 하나가 생겨버렸다.

    -검찰, 부산 그룹 박상용 전 회장 참고인 조사!

    -박상용 전 회장, 피의자 전환!

    -부산 그룹 박상오 회장 사무실 압수 수색!

    -사법 처리 무마를 위한 로비 정황 포착!

    대통령과의 독대 효과는 참 좋았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의 처리에서 잔챙이들 몇만 잡고 끝내려던 검찰이 갑자기 미친개로 돌변했다.

    박상용 전 회장을 참고인으로 소환했고, 바로 다음 날 피의자로 전환되었다. 구속 영장도 신속히 청구되었다. 부산 그룹의 새로운 신임 회장이 되었던 박상오의 집무실까지 거침없이 쳐들어가서 각종 서류는 물론 컴퓨터까지 압수해서 나왔다.

    유재원이 알던 21세기의 검사들과는 다른 압박적인 모습이었다.

    그때는 대기업 본사에 압수수색 영장이 떨어졌어도, 그곳 시큐리티 직원들에게 막혀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빈손으로 나오기도 했고, 그냥 나오면 어색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자에 뭔가 담긴 것처럼 들고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점령군처럼 거침없이 들어가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인 것처럼 싹 쓸어담아 나왔다.

    검찰의 태도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이번 사건을 맡았던 부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엔 잡다한 사건을 처리하는 형사부에서 처리했는데, 지금은 특수부로 이관된 상태라는 것이다.

    정치인, 고위공직자나 재벌들 등의 대형비리사건을 전담으로 수사하는 바로 그 특수부였다.

    “이야, 일 잘하네.”

    텔레비전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렇게 잘할 수 있었으면서, 이제껏 미적대던 게 이해가 되지 않는 유재원이다. 역시 인맥과 돈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카르텔은 더욱더 강력한 상위의 권력으로 끊어 내는 게 최고의 해법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은 물론,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환경 범죄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강력한 처벌로 본보기를 보여 그 누구도 환경을 파괴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녁 9시 뉴스의 첫 꼭지는 오늘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국무회의의 발언이었다. 유례가 없을 만큼 강경한 발언이었다.

    대통령의 직언이 나온 만큼 부산의 오너 일가는 아무리 좋은 변호사를 쓰더라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재벌 전용 솜방망이 판결문은 절대 받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르릉!

    뉴스를 한참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제가 받을게요.”

    죽었던 감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전화벨 소리만 듣고 이건 내 전화구나 하는 느낌이 딱 왔다.

    -나다.

    역시 되살아난 감은 정확했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미래 그룹 왕회장 전명헌의 목소리가 딱 들려왔다. 정작 전명헌 회장이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는 짐작이 쉽게 되지 않았다. ID 그룹과 미래 그룹 사이의 협력은 기름칠한 듯 매끄럽게 이뤄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네! 유재원입니다.”

    -지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거, 필시 네가 꾸민 일일 테지?

    전명헌 회장의 물음은 의외였다. 부산 그룹과 미래 그룹 사이에 인척 관계가 형성된 건 없었다. 그렇다고 커다란 사업을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부산 그룹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것도 직접 집에다 전화까지 하면서 말이다.

    “네? 아, 부산 그룹이요?”

    일단 한 번 떠보는 유재원이다.

    -그렇다. 대통령을 부추긴 게 너라는 소문이 재계에 파다하더구나.

    “재계에 파다해요? 그러니까 대기업 회장님들은 다 알고 있다는 소리네요?”

    역시 한국은 좁은 나라다. 몇 시간 전에 대통령과 이동 중에 했던 이야기가 동네방네 다 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 업계엔 불문율이 있단다.

    전명헌 회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신중했다.

    -이번과 같은 사건이 터지더라도 웬만하면 윗선으로 올라가지 않고 마무리되는 거다. 큰 사업을 할 때 아무리 조심해도 이번과 같은 사고가 터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같은 사람까지 책임을 지면 어떻게 나라에서 큰 사업을 하겠느냐?

    아아~.

    전명헌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 딱 감이 오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런 논리로 아주 징글징글하게 당해본 당사자가 바로 유재원 본인이었다.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그런 불문율에 동의한 적이 없어서요.”

    -으응? 내,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거냐?

    삐딱스러운 유재원을 처음 느껴보시는 전명헌 회장님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껏 자신을 좋게 봐주셔서 고마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 같은 새내기가 성장하려면 선배님들의 스크럼을 뚫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회가 보이면 차고 들어가야죠! 그런데 불문율 같은 거에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고 그 소중한 기회를 날리면 저만 손해잖아요.”

    -허어, 참. 재원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구나.“

    수화기 너머로 전명헌 회장의 탄식이 넘어왔다.

    신기하게도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낸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일을 빌미로 너나 네 회사에 대한 경계가 더욱 심해질 텐데, 자신은 있는 거냐?

    뭐, 다른 기업들이 ID 그룹을 위해 무슨 성장촉진제라도 놔주길 했나?

    삼보 컴퓨터나 미래 그룹 말고는 딱히 호의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다른 기업의 경우엔 철저한 주고받기의 관계였다.

    “얼마든 공격하라고 하세요. 대신 틈을 보이면 제가 확 물어뜯을 거니까요.”

    -틈이라니?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아라.

    다른 땐 척하면 척 알아들으셨던 전명헌 회장님이 오늘은 좀 다르다.

    “뭐, 어떤 반도체 사업부를 예로 들지요. 독한 유독물질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백혈병이나 암 등에 걸리는 사고가 터지면 이번처럼 탈탈 털리게 하는 거죠. 비윤리적인 기업이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서 매출도 뚝 끊기게 하고요. 이처럼 기업의 윤리도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정이 있으니 또 시키는 대로 하는 유재원이다. 대신 그 설명이란 매우 비약적이고도 간결했다. 그래도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이 가리킨 반도체 회사가 어느 회사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인석아! 그렇게 따지면 미래 중공업도 매도하겠다는 것이야?

    무거운 쇳덩이를 다루는 중공업은 아무리 조심해도 산재 사고가 끊이지 않는 사업장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이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제 발이 저린 전명헌 회장님이었다.

    “에이, ID 그룹은 IT 기업인데 웬 중공업이에요? 거긴 회장님이 잘 돌보셔야죠. 하여튼, 우리나라 시장이 앞으로도 비개방 상태가 계속 유지될 거라고 보세요? 시장 개방이 이뤄지면 외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올 거예요. 글로벌 기업에겐 불문율 같은 건 아무 소용없어요. 게다가 OECD 가입도 할 텐데 미리 글로벌 스텐더드에 맞게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게 좋습니다!”

    정이 좀 쌓였다고, 유재원은 천금과 같은 조언까지 해주었다.

    살짝 양심에 가책도 느꼈다. 세계적 기업을 운운하면서 겁을 좀 줬지만, 현실은 달랐기 때문이다. 국내에 들어온 세계적 기업들은 세계적 기준을 국내에 적용해준 게 아니라, 한국의 기준에 자신들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화다. 나쁘게 말하면 헬적화라고 한다. 그런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제대로 잡는 게 중요하다.

    “그래. 네 생각은 잘 알겠다. 생각해 보마.”

    -네, 먼저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궁금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알았다. 쉬거라."

    전화를 끊은 전명헌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선을 좀 넘은 것 같아서 조언을 해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조언을 들었다. 절대 허투루 넘길 말들이 아니었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메모를 남긴 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종이와 만년필을 챙기는 전명헌이다.

    동시에 유재원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문제의 원인은 동질감인가?”

    비슷한 일을 하면 생기는 것, 이른바 동질감이다. 그건 재벌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래서 이번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조사하는 검찰의 칼날이 부산 그룹 오너를 찍어버리자 깜짝 놀라며 원인을 찾게 된 것이다.

    유재원이 원인이라는 건 쉽게 파악했다. 갑자기 대통령이 강경한 발언을 했고, 그 발언이 있기 전 유재원과 독대를 했으니 말이다.

    연륜이 많은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의 당돌한 행동의 근본 원인은 동질감이 없다는 것임을 바로 인지했다.

    “이 당돌한 녀석은 우리를 동류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로군.”

    녀석이 보기에 부산 그룹은 먹음직스러운 먹이었다. 그렇기에 재벌들이나 기득권들이 만들어 놓았던 관행, 불문율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던 거다.

    이런 유재원의 시야에는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도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인 전명헌이었다.

    덕분에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의 본성이 포식자이자 룰 브레이커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