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룰 브레이커 =========================
#92-2
440억도 워낙 큰돈이지만, 수수료와 위약금으로 낸 49억 원도 서민은 절대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돈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소득세도 또 내야 하잖아요.”
“아아, 소득세는 안 내도 될 거야. 이걸 소득으로 확정할 게 아니라 투자를 할 거거든.”
한국의 소득세는 촘촘했다. 연간 8,800만 원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28%에 이르는 세율을 물리고 있다. 유리 지갑인 고소득 직장인이라면 과세를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기업이라면 다르다.
“투자요?”
소득으로 확정하지 않고 재투자하면 소득세 부과를 유예할 수 있다.
“응! 전액 주식 투자에 할 거니까 세금 부과는 피할 수 있어.”
미스 김의 표정이 말도 아니었다.
베팅을 참 좋아하는 박상권이었다. 그런 그가 주식에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실제 박상권은 주식 투자도 열심이었는데, 성적은 처참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미스 김이었다.
“에휴, 지분도 없는 말단 직원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투자 실패에 대한 흑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미스 김이 넌더리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녀의 말처럼 현미유 공장의 지분도 없었고, 박상권과도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에이, 이번엔 달라. 재원이도 들어보고 좋다고 했다고.”
그렇지만 박상권은 미스 김을 단순한 경리팀장이 아닌 동료라고 생각해서인지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해주었다. 그것도 유재원까지 언급하면서 말이다.
“진짜요?”
미스 김도 유재원이라는 소리에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
그만큼 유재원에 대한 인지도는 최고였고, 신용도도 높았다. 게다가 440억이라는 숫자가 찍힌 통장도 직접 보았다. ID 인베스트먼트라는 입금자 이름이 선명했다.
“그럼, 저도 투자할래요!”
“응? 미스 김이 무슨 돈이 있어서?”
“시집가려고 모아놓은 돈 있거든요! 이태까지 짝도 안 나타났고, 이대로 계속 모아봤자 푼돈에서 머물 거 같은데 저도 끼워주세요. 사장님 덕에 팔자 한번 펴 봅시다.”
“망하면 어쩌려고?”
“혹시나 망하면 사장님이 책임지셔야죠.”
“미스 김, 설마 나한테 사심 있는 건가?”
“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눈은 있거든요!”
“알았어! 그렇게 흘겨 보니 무섭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나랑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일반적인 고용주와 직원 사이라며 절대 나눌 수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 10년이 넘는 친분이 있었기에, 이 정도 이야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직원들에게 공고해서 나랑 같이 투자할 사람 있으면 데려와.”
유재원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혼자만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행운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걸 보고 배웠기에, 참여의 폭을 훨씬 더 넓혀주는 박상권이다.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미스 김처럼 여유 자금으로 참여할 사람만 받아서 실행할 생각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박상권의 제안에 호응을 보인 현미유 공장 직원은 미스 김 딱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윳돈이 있는 직원도 드물었고, 있더라도 박상권을 믿고 선뜻 돈을 맡기겠다는 이는 미스 김 딱 한 사람뿐이었던 탓이다.
같은 시각.
유재원도 회사 일에 집중 중이었다.
열심히 안드로이드 1.0 완성을 위해 중요한 코드를 만드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빈센트 그린힐의 쪽지가 날아왔다. 거기엔 뜬금 없었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예에? 뭐라고요?”
-넥스트 Inc에 대한 투자가 취소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투자 요청에 대해 유재원은 확인하자마자 승인했다.
ID 인베스트먼트 분석팀은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 사업계획서였지만, 유재원이 승인하니 투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잘 진행 되던 투자 이야기가 갑자기 끝난 것이다. 중간에 멈춘 것도 아니고, 아예 투자가 취소되었다.
-아무래도 스티브 잡스의 변덕이 그냥 발동된 것 같기도 합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행정적으로나 절차적으로 잘못된 것을 한 건 아니다. 넥스트 Inc로부터 공문 한 장이 딸랑 날아와서 투자 요청을 철회하겠다고 한 것이다. 유재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1천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통보했을 땐 그쪽에서도 엄청나게 좋아했다.
-저희도 자세한 경위는 파악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있는 레밍턴 사장이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레밍턴 사장에게 부탁하는 게 빠르겠네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유재원은 곧바로 레밍턴 사장과 연결했고, 넥스트 Inc의 투자 취소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예! 바로 정보팀을 가동하겠습니다.
레밍턴 사장은 여전히 호탕하게 장담했다. 언제나 믿음직한 양반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10분이 넘게 생각해봐도 스티브 잡스가 변덕을 부린 원인을 도통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나쁜 소식입니다.
오늘은 무슨 날인 모양이다.
그냥 숫자로만 보면 4월 4일. 내일 식목일을 앞둔 평범한 목요일이었는데, 유재원에게 나쁜 소식이 연달아 날아왔다.
이번엔 일렉트로닉아츠의 호킨스 사장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지스 쉴드가 깨진 모양입니다. 둠의 불법 복제판을 발견해서 회수 중입니다.
이지스 쉴드는 유재원이 만든 복제 방지 기법이었다.
일렉트로닉아츠를 비롯한 여러 소프트웨어 회사들에 라이센스를 주었고, 막강한 성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메가 히트작들의 판매량도 한 차원 더 높아졌다. 연간 100만 장 판매 게임이 하나도 없었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 들어서는 벌써 4개나 나왔다. 그중에 ID 그룹의 제품이 2개나 되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띵!
호킨스 사장이 시장에서 수집한 불법 복제판을 즉석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스캔한 다음 ID 톡으로 전송해주었다.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선명한 그림 파일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흐음.”
유재원이 상상하던 불법 복제판과는 많이 달랐다.
용산 전자상가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공 디스켓에 허접한 라벨을 붙여 놓고 파는 불법 복제물과 달랐다. 정품과 똑같은 패키지에 디스켓에 라벨도 컬러로 출력한 것을 붙였다. 정품과 비교할 때 조금 허접하긴 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정품이라고 착각할 만큼 유사했다.
-이놈들이 가격까지 정품과 똑같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이걸 유통했던 소매상들은 정품인 줄 알고 매입했고요.
불법 복제의 유통은 두 가지 방식이었다.
대놓고 불법인 방식이다. 돈을 주면 공 디스켓에 복사해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품 유저를 노리는 것이다. 유저는 정품인 줄 알고 샀는데, 알고 봤더니 불법 복제판이다. 전자는 엄청나게 헐값으로 팔아치우고, 후자의 경우엔 정품과 거의 같은 가격을 받고 판다.
둘 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겐 최악이다.
“불법 복제판이 잘 돌아가긴 하나요?”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호킨스 사장이 직접 불법 복제판을 가지고 둠을 설치하고 실행해보기도 했다. 그냥 막무가내로 복사했다면 정품을 넣으라는 메시지가 떴을 텐데, 정품과 흡사하게 만든 불법 복제판은 그런 메시지 없이 바로 타이틀 화면이 나왔단다.
아무래도 디스크 전체를 읽어서 복사하는 장비를 사용한 거 같았다. 이지스 쉴드의 핵심 원리는 도스의 입출력 시스템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에 특수한 인증키를 넣어서 원본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일반 복사로는 복사되지 않고, 크랙을 만들었다더라도 매번 여러 단계에서 인증키를 확인하기에 정상적인 진행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예 무식하게 디스켓의 자기장 상태를 통째로 읽어서 통째로 복사하는 장비가 있다면 특수한 영역도 복사되니 원본처럼 취급을 받게 된다.
“멀티 플레이도요?”
-그건 아닙니다. 같은 키가 사용된다는 경고와 함께 접속이 끊기네요.
역시 멀티 플레이는 쉽게 뚫을 수가 없다. 게다가 둠은 싱글 플레이보다 멀티 플레이에 초점이 맞춰진 게임이었다.
싱글 플레이용 미션의 길이는 논스톱으로 플레이했을 때 8시간 정도에서 끝난다. 대신 유저들이 인터넷이나 인트라넷에서 방을 만들고 무한정 놀 방법을 만들었다.
멀티플레이 전용 맵과 유즈맵이다.
멀티플레이에서만 고를 수 있는 전투용 맵이 8개나 되고, 이게 질리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놀 수 있게, 유즈맵도 지원했다. 리소스는 싱글플레이에 사용된 것들만 재활용할 수 있고, 맵의 크기도 한정되었지만, 플레이 규칙과 각종 무기의 수치, 드랍 위치 등등을 조절해서 원하는 지형을 만들 수 있다.
레벨 디자인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ID 소프트웨어에서 만든 멀티 플레이 맵보다 더 재미있는 걸 제작할 수 있고, 실제로 큰 인기를 끄는 맵이 나오기 시작했다.
싱글 플레이도 재미있지만, 멀티 플레이는 더더욱 재미있다. 게다가 멀티 플레이에 접속하기 위해선 인터넷 접속이 필수였기에 제품 등록키를 통해 불법 복제품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오죽하면 PC 통신이나 인터넷 회선 회사들이(IPS) 둠의 멀티 플레이를 완벽히 지원한다는 걸 마케팅 포인트로 삼을 정도였다.
-이지스 쉴드의 강화판 개발은 계획이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안드로이드 1.0과 ID 오피스 2.0 작업에 바빠서 다른 걸 할 시간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라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도 총괄하고 있다. 유재원의 몸은 두 개라도 모자란 지경이라서 이지스 쉴드 2 같은 걸 만들 여력은 없다.
“불법 복제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에요. 공격을 막아야 하는 우리가 불리한 입장이죠. 그나마 가장 확실한 건 멀티 플레이입니다.”
서버에 접속하고, 승인을 받는 건 이지스 쉴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난수 발생기로 일일이 만들어낸 16자리 영어와 숫자를 조합한 키 하나만 본다. 만약 중복으로 키가 사용되는 걸 감지하면 둘 다 단절시키니 확실한 정품 인증이다.
넥스트컴에서 ESD를 통해 판매되는 둠의 경우엔 아예 실행할 때부터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내려받은 둠을 공개자료실에 누군가 올리더라도 문제없다. 넥스트컴 서버에 구매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인증키가 등록되어있지 않으면 플레이를 할 수 없다.
-정품 인증키 관리에 더욱 주의해야겠군요. 동시에 불법 복제품 유통 방지에도 신경을 더 써서 판매량이 하락하는 걸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아, 멀티 플레이 요소도 좀 더 강조하겠습니다.
유재원은 둠의 불법 복제판 출현이 올 게 왔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호킨스 사장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패키지 판매가 수익 사업의 전부인 일렉트로닉아츠였으니 불법 복제판의 등장은 끝장을 봐야 할 전투였다.
답이 나오지 않는 싸움에 용감하게 임하는 호킨스 사장에게 유재원은 파이팅을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통신을 마쳤다.
“다행히 오늘의 일진이 다 최악이진 않네.”
기분 나쁜 소식으로만 하루를 마감했더라면, 내일 아침까지 꿀꿀했을 텐데, 오후에 괜찮은 소식 하나가 올라왔다.
-부산 양조 하락 끝? 주가 폭등!
넥스트컴 주식 시황 게시판에 가보니 부산 양조의 주가가 폭등 중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것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만들고 있는 메시지였지만, 주식 투자를 하는 분들에게 호응이 좋았다.
부산 양조는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 터진 후 2주가 넘게 하락 중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보다 -60% 정도 하락한 상태였는데, 박상권 사장님이 오늘을 작전 시작일로 잡은 모양이다.
직접 증권사에 전화를 해보니 -5%를 찍고 있던 주가가 7% 상승으로 갑자기 반전되었다고 한다. 상승 반전과 함께 잔뜩 쌓여 있던 매도 물량을 다 먹어치워 버리자, 당황한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는 분위기다.
여기에 유재원을 찾는 전화도 한 통 있었다.
-93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회에서 기공식에 회장님을 초청하고자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 행사이니만큼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서울의 최강욱이 직접 전화였다.
최강욱은 참가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유재원은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3월 기초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싹쓸이를 보고 상당히 우려스러웠던 탓이다. 앞으로 세금도 조절하기로 했는데, 대통령 옆자리에 있는 것도 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더 생각해보니 이점보다는 나쁜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지금 말해줘야 하나요? 아, 그전에 기공식 행사는 언제인데요?”
-행사는 4월 18일입니다. 제법 여유가 있습니다.
4월 18일?
불과 3일 후인 21일이 고졸 검정고시를 보는 날이다. 초대를 거절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사유는 없다. 다만 대통령도 납득을 해주려나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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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상쾌하게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월요일부터 기분이 확 구겨졌네요.
우리나라 권력은 삼성에게 있다는 게 확실히 증명된 하루였습니다.
'재산 국외 도피 의사 없어, 단지 장소가 외국'이라니.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네요.
대법원에선 제발 제대로 된 판결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하여튼, 고구마 10개는 물 없이 먹은 느낌입니다.
저라도 이 글을 통해 독자님께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드리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