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룰 브레이커 =========================
#91-2
“다음은 실리콘밸리 투자 보고서.”
ID 인베스트먼트는 실리콘밸리에서 ‘엔젤’로 불렸다.
무려 5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줄을 가진 투자회사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인수에 12억5천만 달러를 사용했고, 여러 기술을 사들이거나 투자면서 소모된 돈도 좀 된다. 그래도 아직 35억 달러 이상은 남아 있는 회사였다.
유재원이 그 많은 돈을 IT 기술에 투자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지켜지고 있었으니 실리콘밸리에서 제2의 HP나 DELL, 애플을 꿈꾸며 기술 개발에 매진하던 스타트업 들이 환호했다. 그러면서 갖가지 신기술을 가지고 ID 인베스트먼트의 문을 두드렸다.
뉴욕 맨해튼 본사까지 올 필요도 없다. 실리콘밸리에도 최근 ID 인베스트먼트의 영업지점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은행보다 높은 수익률을 바라는 투자가나, 투자를 받고 싶어하는 창업자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어서 오픈했을 때부터 성업 중이었다.
지점은 자금 지원을 원하는 창업자들이 방문할 때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기술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서 맨해튼 본사로 보내는 일이었다. 맨해튼 본사에서는 그렇게 추려진 보고서를 다시 정리해서 오늘처럼 유재원에게 보내준다.
이 과정에서 빠지는 건 없다. 대신 맨해튼 본사에서 이건 괜찮다 싶은 기술이 있으면 더욱 자세히 알아보라는 지시를 한다. 또한, 10만 달러까지는 실리콘밸리 지사에서, 50만 달러는 맨해튼 본사에서 집행할 수 있고, 그 이상의 규모는 유재원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100개가 넘네?”
실리콘밸리 투자 동향에 대한 보고를 받는 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었다. 온라인 업무 체계가 다 이뤄진 상태였으니, 매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주당 2회로 한정한 것은 유재원 본인이 워낙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 번 보고를 받을 때마다 살펴봐야 할 항목이 좀 많았다. 이번 빈센트 그린힐의 이메일 중에서도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게 실리콘밸리 투자 동향 보고서였다.
“흐음.”
유재원은 빠르게 목록을 살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회사들은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그렇기에 나름 고르고 골랐다더라도 유재원이 보기엔 그다지 매력은 없었다.
“어?”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회사 하나가 있었다.
“넥스트 Inc?”
한국과 미국에서 한창 성업 중인 넥스트컴과 매우 유사한 이름의 회사였다. 그냥 이름만 보면 넥스트컴이 잘 나가니, 그걸 따라 해서 지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창립일 기준으로 보면 넥스트컴은 1990년이고, 넥스트 Inc는 1985년부터 시작했다.
자체적인 컴퓨터 본체는 물론이고 운영체제까지 만드는 종합 컴퓨터 회사였는데, 여기서 나온 제품이 넥스트스텝이라는 운영체제와 넥스트스테이션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이다.
무엇보다 넥스트 Inc란 회사를 돋보이게 하는 건, 바로 창업자다.
스티브 잡스.
실리콘밸리의 1세대 창업자였고, 시대의 아이콘이자, 스마트폰의 아버지인 사람이었다. 그런 존재는 지금 본인이 만들었던 애플에서 축출되었고, 1985년 넥스트 회사를 창업한다.
본격적인 제품의 출시는 1988년인데 모토로라의 68시리즈에 메모리 용량이 8메가나 되는 고성능 제품이었다. 하지만 한 세트당 6,500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에 대중화되진 못했다. 아니 참패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작년에는 넥스트 스테이션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출시했다. 역시나 고성능에 높은 가격을 자랑했다.
유재원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던 팀 버너스리가 WWW의 기초를 잡았을 때 사용했던 시스템이기도 했다. 팀 버너스리가 도중에 에그 PC로 바꿀 만큼 대중성은 극도로 낮은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나마 개인용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는 약간의 수요가 있어서 회사를 근근이 운영할 수는 있었다. 이런 넥스트 사의 사정이 급격히 나빠진 건 ID 테크놀로지와 삼보 컴퓨터가 손을 잡고 만든 에그 PC의 등장부터였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넥스트 스테이션에서 할 수 있는 기능을 거의 다 사용할 수 있었고, 모양도 에그 PC가 훨씬 나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량이었던 넥스트 스테이션의 판매량이 바닥을 쳤다. 회사의 사정이 크게 어려워진 스티브 잡스는 ID 인베스트먼트의 실리콘밸리 지점의 문을 두드리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세상에.”
스티브 잡스는 지금도 명성이 쟁쟁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작성한 제안서와 이를 분석한 보고서는 제법 분량이 나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맨해튼 본사의 투자 적격성 보고서의 최종 평가는 C다. B등급도 그다지 좋은 점수는 아니었으니 C는 낙제점이나 다름이 없다.
스티브 잡스가 ID 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 유치를 하고 싶은 금액은 무려 1천만 달러다. 그렇지만 투자금을 유치해서 하겠다는 사업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는 분석 결과를 내린 탓이다. 스티브 잡스가 가지고 온 사업 계획서는 넥스트 Inc 산하의 픽사라는 컴퓨터 그래픽스 전문 시스템에 소프트웨어와 이미지 처리에 힘을 실어서 새로운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ID 인베스트먼트 맨해튼 본사가 C를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픽사라는 회사는 스티브 잡스가 1천만 달러에 인수한 회사인데, 아직 변변한 작품 하나를 낸 적이 없었다. 컴퓨터 그래픽 전문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다지만, 그 실적도 별로다.
컴퓨터 그래픽 쪽으로는 실리콘 그래픽스라는 절대 강자가 존재했고, 이들의 시장 지배력은 ID 테크놀로지보다 더 강했다. 픽사가 실리콘 그래픽스를 뚫고 유의미한 성적을 내기엔 매우 어렵다는 판단이 나온다.
게다가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수익사업도 없는 상황에서 또 막대한 자금을 유치해 컴퓨터 그래픽에 투입하겠다는 건, 사업이 아니라 개인적 취미 생활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최종 평가 역시 C등급으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사업계획서를 스티브 잡스가 아닌, 다른 벤처사업가가 제시했다면 유재원이 보는 이 보고서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스티브 잡스라서 이렇게 전송이 되었다.
“역시, 대단해.”
유재원의 감상은 맨해튼 본사의 분석과는 반대였다.
비록 본인 취향이라지만, 미래의 먹거리를 벌써 준비하고 있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다.
“이런 건 바로 승인이지!”
넥스트 Inc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 대한 투자였다. 설사 넥스트 Inc가 망하더라도 ID 그룹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얼마든지 챙겨 나올 수 있다. 특히 넥스트스텝이란 전용 운영체제는 유닉스 기반의 운영체제였고, 마우스 조작을 통한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탑재하고 있었다.
특히 개발자에게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하는데, 객체지향개발 방법을 구체적으로 구현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효율성이 무척이나 좋아서 비싼 가격에도 넥스트 스테이션의 명맥이 10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안드로이드 1.0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이었기에, 이 기술을 그대로 사 와서 적용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통해 스티브 잡스와의 인맥이 만들어진다는 게 중요했다.
만약 원래의 역사대로 넥스트 Inc가 95년쯤 문을 닫을 때,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ID 테크놀로지로 온다면?
“흐흐. 애플의 미래는 없는 거지.”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먹어치웠다. 그런 상태에서 애플도 없다면? 21세기 초 스마트 디바이스의 태동기를 ID 그룹이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조인식은 같이 하자고 하자!”
ID 인베스트먼트의 사장이 바로 자신이다. 투자 조인식을 할 때, 스티브 잡스와 나란히 서서 악수를 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유재원은 바로 스티브 잡스의 투자 계획서에 승인이라는 사인을 넣어서 ID 인베스트먼트에 회신했고, 최대한 이른 시일에 투자 조인식 행사도 잡으라고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써넣으려던 유재원은 순간 멈칫했다.
“아, 고졸 검정고시가 4월에 있지.”
정확히는 4월 21일이다.
그날은 시험을 보러 올라가야 하니 무조건 빼야 한다. 그리고 시험 전 5일 정도까지는 시험공부를 위해서 비워둬야 했다.
지금 이 상태로 봐도 충분히 합격선은 넘을 자신이 있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어떤 시험이든 잘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좋은 점수를 내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시간을 비워두려는 것이다.
“됐다.”
관련 내용을 추가로 적은 유재원은 발송을 눌렀다. 팀 버너스리에 이어 또 다른 전설을 직접 만날 생각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스티브 잡스에게 투자를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보람찬 하루였다.
26일은 지방선거라고 임시 휴일이 되었다.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라서 낯설어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임시 휴일임에도 회사에 나오라고 하는 곳이 많을 정도다.
유재원은 아쉽게도 나이로 인해 투표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대신 여주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서울 사무소 사람들까지 모두 회사에 나올 생각하지 말고, 투표한 후에 잘 쉬라고 지시했다.
넥스트컴에서도 본인의 아이디를 통해서 투표 독려 글을 올리면서 홍보했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압승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씁쓸한 마음이었다.
노 대통령과 친분도 있고 많은 배려를 받기도 했지만, 군부 독재 세력에는 아무리 마음을 써도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27일 개표 결과가 나왔다.
“이거 뭐야?”
개표방송을 본 유재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최종집계 투표율 61%, 매우 저조.
-여당의 압승! 친여(親與) 후보 82% 당선
싹쓸이가 바로 이런 것일까!
전국 4,304개의 기초의원 의석 중에 민주자유당 소속 후보들이 3,529개의 의석을 휩쓸었다. 어마어마한 광풍이었다.
유재원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생의 기록에서도 여당이 압승하긴 하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당시 여당 측 당선자는 3천 명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3,529명으로 폭증한 것이다.
“뭐지?”
유재원은 도대체 무엇이 변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처럼 선거판에서 여당에 타격이 될 악재도 터졌는데도 오히려 당선인 숫자가 더 늘어난 거다.
“설마, 나 때문이야?”
원래의 역사에서 예정된 악재와 호재는 다 나왔다. 전국적인 선거에 영향을 줄 만큼 커다란 변수는 자신뿐이었다.
노 대통령이 유재원과 ID 그룹을 정권의 마스코트처럼 쓰긴 했다. 유재원도 일부러 거리를 두진 않았다. 여기에 엄청난 금액의 세금도 냈다.
국민에게 유재원의 성공이 마치 정권의 공처럼 보였을 확률은 100%다. 게다가 풍부해진 국가 예산으로 밀렸던 지역 숙원 사업도 다 해줄 것처럼 했다.
어쩌면 청와대에서 선거 자금으로 엄청난 뭉칫돈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 넘쳐나는 예산이었고, 지금 시대에 일부를 전용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세금을 법대로 낸 것뿐인데, 이게 문제가 되네.”
대놓고 말은 못해도 야당 쪽에서 유재원을 향해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유재원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놓인, 아니 괴멸 직전까지 몰린 야당에 대한 지원책도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걸 인지했다.
민주자유당과 대통령의 힘이 너무 커지면, 다른 대기업에 그러는 것처럼 유재원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최소한 정치만큼은 균형과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진리였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것들의 말로는 초대형 사고뿐이다. 게다가 사고가 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국민이 짊어진다.
유재원의 고민이 깊어졌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인공의 존재감 덕에 큰 변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저나, 주말이네요!!
게다가 딱 6일만 지나면 올림픽 시작이고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