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룰 브레이커 =========================
#89-1
“미래 전자의 반도체 개발 역량은 충분했습니다. 다만 보유한 기술을 실적으로 만들어줄 투자가 부족해서 이 위치에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저희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로 미래 전자의 부족했던 설비를 보충함으로써 미래 전자의 잠재력이 폭발할 것이고, 그것이 저와 같은 투자자들의 이익도 극대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조인식 서명을 한 다음, 유재원은 취재진을 앞에 두고 미래 전자에 대한 투자 경위 설명을 시작했다.
식순을 정할 때, 전명헌 회장은 굳이 번거로운 걸 해야 하느냐고 투덜거렸다. 기자 역시 그가 생각하는 머슴의 범주 안에 든 인사들이었으니, 어련히 알아서 기사를 잘 써줄 거라는 생각이 딱 박혀 있었던 탓이다.
‘저놈들 술값이며 떡값으로 한 달에 수억씩 나가고 있단다. 지면광고는 또 어떻고. 엄한 소리 하면 딱 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면 알아서 기게 되어 있어.’라는 자신의 확고한 언론관을 드러냈다.
21세기의 선진 의식을 가진 유재원도 전명헌 회장의 말에는 부인할 수 없었다.
한국 기자들의 수준은 극소수의 예외를 뺀다면 지금이나 21세기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와 접대를 잘 해주면 좋은 기사가 나오고, 그러지 않으면 망하라고 굿을 치르는 기사를 토해내는 건 수도 없이 봐왔다.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빼앗기는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받은 갖은 중상모략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떨릴 지경이다.
그놈들 이름은 뼈에 새겨 놓았으니, 이번에도 같은 행태를 보인다면 철퇴를 내려줄 거다.
하지만 소위 기레기라는 놈들 때문에 언론 전체를 매도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전명헌 회장의 언론관에 완벽히 동의하지도 않는다.
신문이나 방송의 논조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건 전명헌 회장이나 최현희 회장을 위시한 한국 재벌들이 열심히 관리한 측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이 자리에는 외신들도 많이 참석한 상태였다.
유재원의 이름값인지, 아니면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큼 거대한 투자 규모 때문인지 몰라도, 미국이나 유럽의 권위 있는 신문과 방송에서도 기자들이 나왔다.
이들까지 싸잡아 매도하는 건, 저널리즘이 있는 제대로 된 기자들을 무시하는 짓이었다.
“90년 반도체 시장은 -20% 성장을 보인 분야입니다. 91년이 아직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올해 역시 경기가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증산은 무모해 보이는데요?”
뉴욕 타임스의 기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받아 적기에만 바쁜 국내 기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더구나 기자의 말은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한 말이기도 했다.
1990년 반도체 시장의 성장률은 -20%에 다다른다.
89년 DRAM 시장의 크기는 87억 달러나 되었는데, 다음 해인 1990년에는 69억 달러로 심하게 감소한 것이다.
고성능 PC의 수요가 많이 늘어나면서 4메가의 고용량 메모리를 갖추는 컴퓨터도 많아졌는데, 무슨 소리냐 싶었지만 수치가 말해주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성이나 미래, 마이크론 등 메모리칩 제조사들이 가격의 하락에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대량 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칩당 단가가 급격히 떨어져서 출하량은 많아졌는데, 전체 시장 규모는 줄어드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기업에는 나쁜 흐름이었다. 반면 가격 경쟁 덕에 컴퓨터를 맞추는 비용이 많이 낮아졌고, 고용량 메모리 사용자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재원은 마이크를 들기 전에 전명헌 회장을 바라봤다.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에게 손짓했다. 애초에 질의응답 시간은 내키지도 않았던 순서이니, 유재원보고 알아서 하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반도체 시장에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사이클이 있습니다. 이는 PC의 교체 주기와 연관이 있는데, 90년은 MSX나 XT급 컴퓨터 사용자들이 386급 컴퓨터로 교체한 주기의 끝자락입니다. 메인프레임 등의 대형 컴퓨터도 같았지요. 마찬가지로 새로운 호황기도 곧 올 겁니다. 응용프로그램이 고도화되어 386 사용자들이 업그레이드 욕구를 느낄 때. 현재 기업이 운영 중인 메인프레임으로 고객들의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다시 한 번 커다란 교체 주기가 올 것입니다. 한 번만 이러느냐? 아니죠.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호황기와 불황기가 반복되는 거죠.”
외신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적었다.
반도체 시장에 불황과 호황이 번갈아 찾아온다는 걸 직접 말하는 사람은 유재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히 구체적이고도 이해할 증거까지 제시했다.
“호황기가 찾아 왔을 때, 폭증한 수요에 맞게 증산도 해야겠지요? 하지만 반도체라는 건 생산량을 늘리고 싶다고 쉽게 늘릴 수는 없습니다. 미리 공장을 지어야겠죠. 저는 지금이 적기라고 보았기에 투자를 진행하는 겁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은 기자는 다음 질문을 다른 기자에게 넘겼다.
“제2 공장은 어디에 지으실지 정하셨습니까?”
단순한 질문이다. 동시에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대기업의 생산 공장은 매우 좋은 일자리였다. 전명헌 회장이 노조 탄압에 선봉장이었고,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삽질을 다 하는 중이지만,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비교해서 임금이 확실히 좋았다.
지금이야 그 차이는 10~20% 수준이지만, 21세기가 되면 엄청나게 벌어진다. 대기업의 같은 생산 공장, 같은 라인에 근무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50%까지 차이가 날 정도다.
“대전입니다.”
전명헌 회장은 수원을 꼽았다.
수원엔 일성의 반도체 생산 공장이 있는데, 근처에다가 일성 공장보다 3배는 더 큰 공장을 지어 최현희 회장의 코를 꽉 눌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대전을 권했고, 설득도 끝났다.
대전은 한국 최대의 과학기술도시였다. 한국과학기술원도 있고, 대덕연구단지도 조성되어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비롯한 국책 연구를 하는 여러 연구소가 밀집한 도시였다.
메모리 반도체 연구에 한국과학기술원과 협력할 수도 있고, 여러 연구소와 같이 융합기술도 발전시킬 수 있다. 결정적으로 수원보다 땅값도 싸다.
“대전에 지어질 미래 전자 제2 반도체 공장은 최첨단의 설비를 갖춘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할 겁니다. 또한, 친환경 공장으로 지어서 여기에서 일할 노동자의 건강은 물론, 공장 주변의 환경에 조금의 해를 끼치지 않을 예정입니다.”
친환경을 두고는 전명헌 회장과의 마찰도 조금 있었다.
7, 80년대 개발 마인드가 그대로 있는……. 아니 개발 마인드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미래 그룹의 전명헌이었다.
맨손으로 거대한 기업을 일구었다. 가로 막는 건 모조리 치워버렸다. 미래 건설이 소양강 댐을 지을 때, 자연 훼손과 같은 의견은 깡그리 무시했고, 미래 중공업이 거대한 유조선을 만들 때 빡빡한 납기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갈아 넣었다.
갈아 넣었다는 게,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인명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극악한 작업 환경에다 무리하게 작업자들이 투입되어 쉬지 않고 일을 하니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도 사망 사고가 나서 미래 중공업 노동자들이 크게 일어났는데, 공권력을 동원해 막아냈다.
이런 전명헌 회장이 제2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친환경에 돈을 써야 한다는 유재원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을 구분할 때 머슴이나 아니냐만 따지는 전명헌 회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환경 문제를 일단 경제 논리로 접근했다.
“반도체를 제조할 때는 필연적으로 위독한 화학 물질을 사용합니다. 자연적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도 노출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직접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상했습니다. 특히 반도체 공장 출입 시에 입는 방진복을 노동자 보호를 위해 입는 거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충격이었습니다.”
방진복은 노동자의 건장 보호가 아니라 먼지와 땀 등으로부터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진복은 인텔이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유재원에게 486 샘플을 보내줬던 앤디 그로브가 착안한 복장이었다.
반도체 공장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게 수율이었다. 반도체를 찍어내는 원판인 웨이퍼에서 불량율을 최대한 내리는 게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텔이 막 CPU 제조 산업에 뛰어들었을 때, 처음 만든 것이 4004라는 8비트 CPU였다. 손톱만한 작은 크기였는데, 수율이 10% 수준이었다고 한다. 수율 문제로 고민하던 앤디 그로브가 착안한 것이 전신 방진복과 클린룸이었다.
예전 반도체 공장은 방진 설비가 미미했고, 그걸 해야한다는 의식도 없었다. 먼지가 가득한 환경에서 10%의 수율이 나온 것도 사실 대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클린룸과 방진복을 도입하자 수율이 8~90%로 급상승했고, 덕분에 CPU의 단가가 매우 떨어져서 개인이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앤디 그로브의 아이디어는 탁월했다.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배려는 0점이었다.
방진복, 클린룸 하면 사람에게 좋을 것 같지만, 이런 장비들이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반도체와 기계였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기능은 하나도 없다.
독한 약품에 그대로 노출된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건강도 빠르게 나빠졌고, 암에 쉽게 걸렸다.
유재원은 미래 그룹의 반도체 공장이라도 사람까지 생각하는 공장으로 짓고 싶었다. 게다가 기술이 부족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 외면했던 것이라서 이를 적용하는 데 지금의 기술로도 문제없었다.
“공장이 24시간 운영되어도 자연환경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노동자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수고한 대가도 확실히 받을 겁니다. 또한, 미래 전자의 수익금 중 일부는 자연환경 보호에 사용할 것입니다. 미래 전자와 파트너가 된 기업과 소비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 없이, 제품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환경 문제는 선진국에선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에그 PC 케이스로 쓰이는 폴리카보네이트가 독가스인 포스겐과 유독한 물질인 비스페놀 A가 쓰인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유의미한 판매량의 하락이 있었다. 그나마 삼보 컴퓨터와 유재원이 대응을 잘했기에, 이전의 판매량을 회복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더라면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연보호는 80년대부터 국가적으로 시작한 캠패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인식을 하는 날, 페놀 문제가 터졌다. 거국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이번 사고는 너무도 지엽적이라서 마스터플랜에선 언급도 없이 지나가는 일이었다.
전명헌 회장도 유재원의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소비자들은 같은 값이면 친환경 제품을 선택한다는 걸 유재원이 데이터로 증명한 다음이다. 특히 환경 이슈로 인한 에그 PC의 매출 하락 데이터가 결정적이었다.
수천억 원 들여서 만든 반도체 공장인데, 환경 문제로 인해 판매량이 떨어지면, 그게 더 손해라는 걸 전명헌 회장도 이해했다.
조인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뉴스를 확인했던 전명헌 회장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라니. 유재원이 미래 전자 제2 공장을 두고 친환경을 언급한 게 조금 전인데, 최악의 환경 피해 사고가 터졌다.
천운이 따르는 녀석이다!
전명헌 회장의 유재원에 대한 관념이 단단히 굳어졌다.
오늘 터진 환경 문제가 부산 그룹이 아닌 미래 그룹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
한국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나라였다. 비록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또 군부 출신이긴 했지만, 당락을 결정한 지지율의 차이는 미미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너무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이익에만 집중한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흠. 다른 문제는 어떨까?”
전명헌 회장은 문득 몇 년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에 대해 떠올렸다.
강성 노조였다. 10년 전쯤엔 취직만 시켜주면 뭐든 다 할 것처럼 굴던 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벌떼처럼 일어나서 걸핏하면 파업한다고 위협했다.
ID 그룹도 지금이야 창업자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한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조직이 커지면 문제가 날 수밖에 없을 거다.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풀어갈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시험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유재원의 능력은 ID 그룹을 일구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 단지 어떻게 풀지 같은 경영자로서 궁금했다는 것뿐이다. 만약 유재원의 방식이 자신의 방식보다 좋으면 따라해볼 용의도 충분히 있다.
“회장님,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도시바 다나카 히사시게 대표와의 저녁 식사입니다.”
전명헌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비서인 오현지가 다가와 스케줄을 알렸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감성적이라더니, 괜한 감상에 빠져서 중요한 도시바와의 저녁 식사 약속이 떠올랐다.
동시에 유재원의 얼굴도 빠지지 않았다.
도시바의 낸드 플래시 기술을 미래 전자로 이전받는 협상에 자신이 나서줄 것을 부탁했던 탓이다. IT 기술이면 본인이 더 잘 알면서 초보나 다름이 없는 자신을 내세우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전명헌이었다.
최고의 혜택을 최대한 싸게 받아 올 거라고 큰소리를 쳐놓긴 했는데, 막상 나서려니 생소한 IT분야라서 자신감이 좀 떨어진다. 여기까지 상념이 이어졌을 때, 전명헌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기술이란 다 사람이 쓰는 것이니, 이제껏 해왔던 대로 잘 구워삶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 가짐을 달리 한 전명헌 회장은 굳은 다부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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