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룰 브레이커 =========================
#88-1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 지향적인 경영을 통해 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일성 그룹 회장 최현희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부친의 작고로 일성 그룹 경영권을 승계받아서 친정을 시작한 지 3년 차. 의욕적으로 일선 경영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뭔가 바뀐 걸 찾아보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성의 모습은 지금이나 3년 전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최현희 회장이 열심히 나서고 있지만, 그가 내리는 지시는 작고한 선대의 회장이 내렸던 방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 했던 그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니, 결과도 예전의 수준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 최현희 회장이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에 일성 그룹의 사장단과 임원들, 그리고 해외의 지사장 이상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전 세계 13만을 자랑하는 고용인 숫자를 자랑하는 일성 그룹인 만큼,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임원들의 숫자만 해도 2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관성에 젖은 기존의 방식과 행동을 타파하고 글로벌 환경에 맞는 새로운 경영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일성 그룹 신경영 선언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래는 93년 6월에 있을 이벤트였는데, 2년 3개월이나 빠른 91년 3월 15일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는 겁니다!”
국내 재벌총수 어록 중에 역대 2위에 해당하는 발언도 빠지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의 핵심은 혁신인데, 최현희 회장의 방식은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이었다.
이어서 일성 그룹의 새로운 로고도 발표되었다. 기존의 일성은 빨간색 사각형 안에 십자 별이 들어 있는 형태인데, 이번에 발표된 건 비스듬하고 납작하게 누운 파란색 타원에 일성이라는 영문이 하얀색 고딕체로 들어간 형태였다.
새로운 로고의 발표에 박수를 치던 사장단과 임원 중 상당수의 낯빛이 바뀌었다. 열성적으로 호응하고 있지만, 최현희 회장의 이번 선언이 누구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예전의 관행이나 관습을 들먹이면서 최현희 회장의 지시를 반대했던 사장들과 임원들이다. 사장단 중에 선대 회장이 임명한 이들은 아직도 반 이상이었는데, 보통 이런 자들이 변화에 무감각하고, 변화를 반대하기도 했다.
“확실한 예제가 있습니다. 세계로 나가는 ID 그룹을 보세요. 여러분들 중에는 ID 그룹의 회장 나이만 보고 무시하는 분이 계시는데, 유재원 회장이 불과 3년 만에 이뤄낸 성과를 객관적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는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혁신적인 제품으로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에서 최강자로 우뚝 선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수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최현희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럴수록 표적이 된 사장단과 임원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다.
2월 28일.
걸프전 종전의 이슈가 아직 남아 있을 때.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는 충격적인 뉴스 속보가 떴다. 신생 ID 그룹이 12억5천만 달러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모든 자산을 인수한다는 충격적인 합병 소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운영체제 시장의 절대 강자였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그 굳건했던 지위가 흔들렸고, ID 그룹에 매각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의 경제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순위는 10~15위 권이었다. 쟁쟁한 석유 기업들이 상위에 있었고, 전통의 자동차 기업들 바로 다음이 IT 공룡들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IT 계열 1위를 다투던 그런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ID 그룹에 편입되었다.
최현희 회장의 경각심이 불이 켜진 것도 그때였다.
인수 계약서 교환을 마치고 환하게 웃는 ID 그룹 회장 유재원이 침울한 표정의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게이츠와의 악수는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기존의 방식은 다 바꾸세요! 그러나 이 신경영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최현희 회장은 자신도 까딱하다간 게이츠 회장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직감적인 경고를 받았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갑작스레 선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경영의 혁신을 통해 탐스러운 과실을 수확할 때, 일성의 임직원들은 물론 협력사까지도 고루 나눠 가질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분배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동기 부여에 최선을 다하는 최현희 회장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빠르게 끝났다.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 계산기 두드려 보면서 심사숙고했던 게이츠 회장은 2월 27일 유재원에게 전화해 항복 선언을 했다. 다만 인수 가격에 있어 약간의 프리미엄만 더 챙겨 주길 간곡히 부탁했다.
유재원은 게이츠 회장에게 말했던 8억 달러보다 50% 상승한 12억5천만 달러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를 마쳤다.
그렇다고 바가지를 쓴 건 아니다. 게이츠 회장의 지분은 물론이고 스티브 부회장, 이사회의 지분까지 한 방에 일괄적으로 매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투자은행들이 보유했던 지분은 진작 매수했으니, 이제 남은 건 거래소에 풀린 일반투자자가 가진 물량이었다.
-우회 상장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거래소 상장 폐지!
이들의 물량은 3월 말까지만 매수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거래소에서 나올 예정이다.
거래소에 등록되지 않은 비상장 기업의 주식 거래는 너무도 힘들기에, 개인들의 매도 물량이 쏟아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수해서 ID 테크놀로지가 우회 상장되는 건 아닐까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재원의 선언으로 인해서 낭패를 보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 발표가 있던 날 주당 60센트까지 올랐던 주가가 지금은 20센트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주식 회수가 끝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로지 유재원이 100%의 지분을 소유한 상태가 된다.
-ID 그룹, 인수 작업이 완료되면 마이크로소프트 사명 변경 추진한다!
인수가 끝나면 부실 자산은 정리하고, 비윤리적이고 방만하게 운영되던 조직도 정비할 예정이다. 그렇게 인수가 끝나면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을 떼고 다른 이름을 붙여줄 작정이다.
안드로이드.
깡통 로봇으로 PC 운영체제의 새로운 아이콘이 된 안드로이드가 유력하다. 이름 그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조직을 활용해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지속해서 개발하고 발전시킬 것이며, 전 세계 유통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안드로이드 알파 초회 판의 경우 유재원과 10여 명의 실리콘밸리 개발팀으로 만들 만큼 작은 크기였는데,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고용을 승계한 수백 명에 달하는 개발팀은 놀게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운영체제의 편의성이나 성능은 투입되는 개발자가 많을수록 좋아진다. 유재원처럼 능률이 높은 개발자라도 혼자서는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 인터페이스만 연구하는 팀, 아이콘만 개발하는 디자인팀을 별도로 두고 모듈식으로 개발하면 한결 수월해진다.
더욱이 컴퓨터의 성능은 날이 갈수록 고도화가 되고, 컴퓨터에 연결하는 주변기기도 늘어난다. 다양한 하드웨어와의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서도 많은 개발진이 필요하다. 게다가 유재원은 PC 운영체제만 다룰 생각은 없다.
코드명 컵케익인 안드로이드 1.0은 유닉스 체제를 따르는 운영체제다.
유닉스는 대형 컴퓨터에서 다수의 이용자를 한 번에 지원할 수 있게 설계된 시스템인데, 앞으로 도래할 인터넷 체계에 매우 적합한 시스템이다. 특히 인터넷 운영에는 필수인 서버 컴퓨터용 운영체제로 유닉스만한 게 없다.
문제는 AT&T의 벨연구소에서 나온 유닉스는 가격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는 점이다. 한 패키지에 25만 달러니 개인은 물론이고 웬만한 기업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이다. 이렇게 비싸니 유닉스 형태를 차용한 유닉스-라이크 운영체제들이 판을 치게 된다.
유재원은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승계한 개발진을 통해서 서버용 안드로이드나 데이터센터용 안드로이드도 만들 작정이고, 슈퍼컴퓨터용 안드로이드도 출시할 예정이다. 그러니 승계한 수백 명의 개발진도 나중에 가서는 모자랄 수 있다.
“오, 신경영 선언을 일찍 하네?”
유재원도 회장실에 놓은 텔레비전을 통해 최현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전하는 뉴스를 보았다.
뉴스 말미에는 최현희 회장이 본인을 언급하는 대목까지 나왔다.
고루한 마인드의 사장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그런 건지 몰라도, 엄청나게 띄워 주었다. 저번에 최현희 회장의 미팅 신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다음부터는, 일성으로부터 어떠한 연락은 없었다.
그렇다고 비즈니스까지 매몰차게 끊은 건 아니었다.
일성 그룹이 지금까지 ID 오피스를 구매한 누적 수량이 거의 5천 카피에 달한다.
한 방에 5천 카피를 샀으면 할인도 많이 받았을 텐데, 소량씩 조금조금 샀다. 덕분에 할인은 해줄 필요가 없었고, 그만큼 ID 그룹의 알토란 같은 이익이 되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은 좋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임팩트는 컸다.
그런데 관성이 선언 한번 하는 것으로 바뀌면 그게 관성이라는 단어도 안 붙었을 거다. 이번 최현희 회장의 선언은 선대 회장의 가신들을 쳐낼 확실한 명분이 생기는 것 정도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게다가 신경영을 한답시고 하는 정책이라는 게 ‘7-4제’라는 해괴한 조치인데, 7시까지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한다는 것이다. 서머타임 비슷한 정책이긴 한데, 실상은 아침 일찍 출근하긴 하는데, 퇴근할 때는 눈치가 보여서 잔업을 더 하는 것으로 변질하였다.
무엇보다 최현희 회장은 심심하면 ‘위기’를 언급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일성 그룹 총매출이 100조 원이 넘어도 시장의 흐름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이었고,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한다.
잘 나갈 때도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건 경영자들의 특징이었고, 일성의 성장 비결 중 하나로 꼽기도 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게다가 엄살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위기라는 이유로 신규 투자를 줄이기도 했고, 분배에 옹색하기도 했다.
다만 전생의 흐름과 똑같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무리다.
유재원 본인이 만든 흐름으로 바뀌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레드먼드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입구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던 팩맨 로고가 떨어지고 ID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로고가 붙을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유재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잘 풀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일성 그룹이라고 해서 전생보다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어쩌면 유재원에게 자극을 받은 최현희 회장이 전생보다 더 나은 수완을 보여줄 수도 있다.
“뭐, 나중에 확인해보면 되겠지. 어차피 일성과는 충돌하게 될 테니까.”
최현희 회장이 들었다면 기겁할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유재원이다. 슬슬 다음 스케줄을 처리할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시계를 보았다.
“회장님, 전환국 지사장 도착했습니다.”
역시 유재원의 생체 시계는 참 정확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으로 가기 저 추천 한 방 부탁드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