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룰 브레이커 =========================
#87-2
“뭔가요?”
“2바이트 언어 입력기입니다!”
이찬수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ID 오피스 2.0의 총괄이다. 이와 함께 ID 워드프로세서는 본인이 리드 프로그래머로 참여해 제작을 지휘하고 있다.
오피스 2.0의 핵심은 도형 그리기와 애니메이션, 사전, 맞춤법 검사, 매크로로 요약할 수 있다.
도형 그리기와 애니메이션은 프레젠테이션의 기능이고, 사전과 맞춤법 검사기는 워드프로세서에서 주로 사용될 거다. 매크로는 스프레드시트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은 ID 오피스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형태다.
유재원이 ID 오피스 1.0에서 만들어 놨던 동적 오브젝트 매니저라는 기능을 통해 쉽게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기능들을 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맞춤법 검사기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문자를 죄다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당장은 사람 손으로 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국립국어원 같은 기구가 존재하지도 않는 시점인지라, 표준국어대사전 같은 것도 없었다.
ID 그룹은 국어사전의 레퍼런스로 선정한 것이 새 우리말큰사전이라는 1975년 판 국어대사전이었다. 등록된 단어 수는 무려 30만 개였다. 지금은 컴퓨터용 판권을 사서 한창 전산 작업 중이었다. 한영사전은 민중서림에서 나온 엣센스 한영사전이다.
작업 물량은 엄청나게 많지만, 단순한 입력 작업이고, 업무를 나눠주기도 편한 작업이라서 아르바이트의 대량 고용을 쉽게 진행 중이다.
여기에 별개의 독립적인 기능도 하나 있었는데, 언어 입력기 프로젝트였다.
한글이라는 축복 받은 문자가 있는 한국은 영어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컴퓨터를 다룰 수 있었다. 자판의 형태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한글의 원리 그대로 입력하면 컴퓨터용 문서는 쉽게 작성된다.
그런데 표어문자로 넘어가면 작업이 복잡해진다. 한자 사용을 하는 아시아국가들, 특히 중국과 일본이 문제다. 당연히 유재원은 그 해법을 알고 있었다.
이찬수에게 ID 오피스를 맡기면서 중국어이나 일본어를 쉽게 입력한 언어 입력기 아이디어를 언급하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보여줄 만한 수준으로 완성한 것 같다.
“얼른 설치해서 보여주세요!”
유재원이 바로 자신의 자리를 비켜줬다.
직접 디스켓을 받아서 설치할 수도 있지만, 이찬수가 보람을 느낄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자기 자리까지 비켜주는 것이었다.
“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중국어는 좀 무리지만 일본어는 확실히 입력할 수 있습니다!”
이찬수는 유재원의 에그 PC에 디스켓을 넣고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설치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디스켓의 전송 속도가 느려서 몇 분은 기다려야 했다.
일본어 폰트와 중국어 폰트, 사전 데이터와 코어 프로그램 등등. 압축해서 1.4메가나 되는 용량이었으니 상당히 큰 프로그램이다.
다행히 베드섹터가 나오는 것 없이 안전하게 설치는 마무리 되었다. 그렇지만 바탕화면에 무슨 변화가 있다거나 하진 않았다.
ID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보던 인터페이스에서 뭔가 추가된 것은 없었다.
“일단 입력기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환경설정에 들어가서 보니 맨 아래에 2바이트 언어 입력기라는 항목이 추가된 것이 보였다. 문뜩 유재원은 2바이트 언어 입력기라고 하면, 컴퓨터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다국어 입력기라고 바꿔야겠다.
“기본 한글입력인데, 여기서 일본어 입력기로 변경합니다. 일단 오른쪽 시프트키와 스페이스 바를 동시에 누르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렇게 설정을 마친 이찬수는 영어로 ‘konnichiwa’라고 입력했다. 그러자 히라가나인 ‘こんにちは’로 바뀌었다. 가타카나로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영어로 입력할 때 대문자로만 치면 가타카나로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와, 그럼 이제 ‘어제 하루카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를 입력해보세요.”
“음. 그러면 일본어 발음으로 키노우, 하루카와쇼쿠도데메시오다베타군요.”
이찬수의 말에 유재원은 조금 놀랐다.
말해준 문장을 일본어로 바꾸는 게 아주 거침이 없었다.
일본어라는 게 배울수록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순발력을 보면 어려운 일본어도 쉽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일본에도 진출할 작정인데, 가까운데 일본어를 잘하는 인재가 있었구나!
“주요 단어는 한자로 써주시고요.”
"헉! 알겠습니다."
난이도가 더 높아졌다.
하지만 일본어 워드프로세서가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이렇게 3개나 되기 때문이다.
이찬수는 자신의 창작품을 통해 유재원의 그 요구에 맞춰 문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방식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어제라는 단어는 일본식으로 昨日이었고 일본식 발음은 키노우(kinou)였다. 이걸 영타로 ki라고 입력한 다음 한자 키를 누르면 키라는 발음의 한자들이 가득한 선택 칸이 뜨고, 거기에서 ‘昨’ 자를 고르는 방식이다.
“음.”
처음엔 ‘오~’하면서 감탄했던 유재원은 한자를 입력하는 대목에 와서는 무표정이 되었다. 아니 무표정보다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한자를 입력하는 것으로는 일본의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석권할 수 없다. 타자 효율이 너무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키보드 자판 2개, 많으면 3개만 입력하는 것으로 원하는 한자를 입력할 수 있어야만, 일의 효율이 올라간다.
그런데 이찬수가 만들어온 방식을 보면 원하는 한자를 넣기 위해서 자판을 예닐곱 번은 눌러줘야 한다.
덕분에 어제 하루카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라는 짧은 문장을 치는 데, 거의 1분이 넘게 걸렸다.
“음, 처음이라서 좀 느리지만, 익숙해지면 빨리 입력할 수 있을 겁니다!”
이찬수도 유재원의 표정 변화를 읽고는 얼른 부연 설명했다.
입력기를 만든 본인도 이런 식의 입력이 비효율적이라는 건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더 나은 방식을 찾진 못했다.
“음, 이러면 좋지 않을까요?”
“예?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일본어로 작일, 그러니까 키노우라고 입력을 하려면 ki를 먼저 입력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커서 아래에 ki로 시작되는 한자를 쭉 펼쳐주는 거예요. ‘昨’자 뿐만이 아니라 작일이라는 단어 자체를 보여주는 거죠.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점심 인사가 곤니찌와잖아요. 그럼 고라고만 입력해도 곤니찌와라는 단어를 커서 바로 아래에 보여주는 거죠.”
“어어, 그런 식이라면…… 작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좀 많은데요?”
“그러면 후보 글자에 숫자를 붙여요. 작일처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부터 1번이 되는 거죠. 작만 쓴다음 1을 입력하면 작일이 바로 입력되는 거예요.”
유재원의 말에 이찬수가 ‘헉’하는 소리를 냈다.
그냥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유재원의 방식이 자신이 만든 것보다 작업 속도가 훨씬 빨라 보였다.
“한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단어에도 이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 거 같네요. 게다가 일본어뿐만이 아니라 한국어도 마찬가지고요. 안녕이라고 치면 하세요는 자동으로 따라붙게 할 수 있죠.”
이찬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것도 이찬수가 열심히 머릴 굴려 만든 방식이었다. 유재원이 개발 방향을 가르쳐주긴 했는데, 영어 발음과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매칭시키는 것도 일이었고, 한자와 영어 발음을 또 매칭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은 자신이 만든 걸 쓱 보더니 바로 단점을 집어냈고, 단점을 보완할 방법까지 제시했다.
역시 여주까지 찾아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찬수였다. 그러다가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이찬수다.
“아! 사장님, 아니 회장님은 이 방식까지 미리 생각하고 계셨던 거군요? 어째서 국어사전까지 전산화를 하나 싶었는데! 전산화가 끝나면 그걸 라이브러리 삼아서 입력기 자료로도 쓸 수 있겠습니다.”
“그, 그렇죠.”
이찬수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지는 유재원이다.
유재원이 설명하는 건 21세기에는 널리 사용되는 입력기의 기능들이었다.
“그러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언어 입력기의 최종 버전은 어떤 모습입니까?”
“음, 여기에 사용자 데이터 기반을 둔 인공지능 단어 추천 들어가면 끝이죠.”
“헉! 인공지능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후보 리스트 위로 올려주는 거예요. ‘안녕하세요’처럼 사용 횟수가 높은 단어는 ‘ㅇ’과 ‘ㅏ’만 누른 후에 탭 키를 누르면 바로 입력된 거죠. 반복이 많은 단어일수록 순위를 높여주고, 최종적으로 인공지능을 도입해서 사용자가 입력하는 문장을 이해한 다음 후에 등장할 단어를 예측해 골라주는 것까지 한다는 거죠.”
자신의 주특기가 나오니 말이 길어지는 유재원이다.
전생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천국까지 올라갔다가, 나락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 바로 유재원이었다.
사용자의 누적 데이터와 문장 분석을 하는 인공지능을 결합해서 문서 작성을 돕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건 유재원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하드웨어다.
인공지능을 운영하려면 엄청난 연산량이 필요한데 지금은 TPU는커녕 GPU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일단 입력된 몇 글자만 가지고 후보 단어를 추천해주는 정도가 최선이다. 이것도 메모리 용량을 많이 먹는 기능이라서 당장 대중화를 하기엔 부족하다.
적어도 펜티엄 CPU가 나와야 기존의 구매자들에게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줄 만큼 화려한 그래픽과 지금 완성 중인 강력한 기능을 부드럽게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으아, 많이 멀었군요.”
이찬수의 목소리에 힘이 좀 빠졌다.
완성된 2바이트 언어 입력기를 유재원에게 보여주고 칭찬도 받고 싶었다. 유재원이라면 유용한 피드백도 좀 받을 줄 알았는데, 이건 피드백 수준이 아니라 몇 년이 걸려도 완성할지 장담할 수 없는 과제를 받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정도도 잘하신 거예요. 컵케익 출시에 맞춰서 일본어 버전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찬수 팀장님의 공이 매우 큽니다.”
“아, 아닙니다.”
언어 입력기는 단순히 ID 오피스에만 탑재할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쓰임은 바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탑재해 수많은 나라를 지원하는 것에 있다. 컵케익은 안드로이드 1.0의 코드명이었고, 실리콘밸리 팀과 유재원이 전력을 다해 만드는 중이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모국어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초보자들을 위한 문턱이 크게 낮춰지는 것이다. 그러면 집집마다 안드로이드와 ID 오피스, 인터넷을 보급할 수 있다!
유재원의 욕심이라면 중국어 입력기도 완성하는 거다. 하지만 당장 급할 건 없다.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시작하는 건 좀 더 뒤의 일이고, 개방해도 저작권 의식이 바로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찬수가 만든 언어 입력기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새해가 온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시간은 빠르게 흘러 2월의 말이 되었다.
크고 작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전 지구적인 이벤트로는 2월 24일을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시작한 걸프전쟁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있었던 날이었다.
공중과 해상에서 미사일과 폭격만 공격했던 다국적군었다. 24일 부터 전격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국경에 대기 중이던 30만의 지상 병력이 이라크를 향해 전면적인 기동을 시작했다.
다국적군 지상 병력은 뻥 뚫린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했다.
쿠웨이트에는 이라크군이 자랑하던 최정예 공화국수비대 1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앞뒤로 누르는 다국적군에 막혀 삽시간에 녹아버렸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에 전략 차원에서 적용된 성공 사례였다.
압도적인 공세에 쿠웨이트시티 탈환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의 수도를 수복한 다국적군은 그대로 이라크로 진격했다.
불과 3일 후인, 2월 27일.
이라크는 종전의 사전 국제연합의 12개 결의안을 무조건 수용하는 선언이 있었다. 곧이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걸프전쟁 종전 선언을 하는 장면도 텔레비전에 온종일 나왔다.
차라리 지금 바그다드까지 쳐들어가서 후세인 대통령을 잡았으면 좋았을 거다. 그러면 나중에 또 쳐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중동이 정세도 한층 안정되었을 텐데 결의안 수용 선언만 듣고 종전을 선언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미국이나 다국적군에 참여한 나라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리라고 다들 떠들썩했다.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우와!”
모니터를 보던 ID 그룹 비서실 직원들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걸프전 종전 때문은 아니었다.
2월 25일, ID 그룹 산하 ID 소프트웨어가 1년을 넘게 준비한 최신작 둠이 미국과 캐나다에 정식 발매되었고, 만으로 하루가 지난 지금 둠에 대한 반응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당연히 호평 일색이었다. 첫날 판매량도 새로운 기록을 경신 중이었고, 온라인 판매라는 ESD 서비스도 구매자가 제법 되었다.
다들 기뻐하는데, 예외가 있다면 유재원이다.
ID 소프트웨어의 둠이 성공할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예전보다 훨씬 나은 그래픽에 한층 강화된 네트워크 플레이까지 있으니 실패할 수 없는 타이틀이었다.
오늘 날아온 성적표를 보니 맡겨놓은 금메달 찾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걸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엑스칼리버와 같이 승리가 무조건 약속된 무기를 들고 초보 지역에 뛰어든 만랩 전사 같은 꼴이니, 망하는 게 이변이다.
“그나저나, 게이츠 이 양반. 무슨 놈의 숙고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거야?”
오히려 유재원의 마음을 졸이는 건 마이크로소프트 인수 건이었다.
둠과 달리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는 전생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몰아붙이는 중인데 아직도 연락이 없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것을 상기하며 사무실로 온 전화를 김대석이 먼저 받기 전에 받아 봤다. 그렇게 한지 한달을 했는데 죄다 꽝이었다.
따르릉.
또, 전화벨이 울린다.
역시나 느낌이 없다. 이제는 그냥 두고 보는 중이다. 그러자 전화 담당인 김대석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라며 통화를 시작했는데, 금방 말을 바꾸는 김대석이다. 영어였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더니 유재원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사장님! 게이츠 회장입니다!”
아무래도 폼이 다 죽은 모양이다.
수화기를 넘겨받으면서도 게이츠 회장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결과를 알 수 없는 도전이었기에 유재원의 심장은 힘차게 뛰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