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44화 (144/1,007)

[144] 룰 브레이커 =========================

#86-1

○ 룰 브레이커

ID 그룹의 출범식은 화제였다.

정부나 기업의 기념행사는 재미가 없다. 애써 권위를 세운답시고 무척이나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ID 그룹은 달랐다.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그랜드 오픈 행사처럼, 무척이나 경쾌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게다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했던 프로그래머는 물론 행정직 직원이나 플래그쉽 스토어 직원까지 다 데려왔으니 한국식 권위주의 같은 게 잡힐 리가 없다.

숫자로 보면 미국의 임직원들이 120명이었고 한국의 임직원들이 60여 명으로 소수이니 미국 분위기에 순식간에 물들었다. 게다가 행사장에는 선택된 소수의 매스컴도 나와 있었는데, 대부분은 외신 기자들이었다.

행사의 진행은 실용적이었고, 빨랐다.

유재원의 회장 취임사 역시, 91년은 인터넷의 해이다라고 밝히면서 ID 그룹이 인터넷 발전을 주도할 것이라고 짧게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ID 그룹의 사업 방향을 확실히 말했으니, 언론에는 그 장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취임사를 마치고‘ID’라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커다란 회사 깃발을 힘차게 흔드는 장면도 빠지진 않았다.

이후엔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호텔에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고 초청된 가수들이 무대로 올라와서 화끈한 열창을 선보였다. 마음 같아선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를 부르고 싶었는데, 월드투어 행사를 마치고 휴식 중이라서 무리였다. 그래서 차선책을 찾았다.

무서운 신인 머라이어 캐리다.

다른 대형 가수들은 연말이라고 다들 바빴는데, 아직 신인인 머라이어 캐리의 스케줄과는 맞아 떨어져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서울에서 한바탕 축제를 즐긴 임직원들과 유재원 하루 쉰 후에 2박 3일 일정으로 멤버십 트레이닝, 일명 MT를 하기 위해 제주도로 떠난다.

한국의 매스컴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는 이러한 ID 그룹의 동정(動靜)을 무척이나 중대하게 보도했다. 톱뉴스로 나오지 않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ID 테크놀로지, ID 인베스트먼트. ID 그룹의 양대 사업체가 가진 현금만 90억 달러가 넘는 대규모 기업 집단의 정식 출범이었다. 게다가 ID 그룹의 오너는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에 진학할 나이였으니 특종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공식적인 출범행사가 끝나고, 직원들은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유재원과 임원들만의 행사는 아직 남았다.

잠깐 휴식 시간을 갖은 후 작은 미팅룸에서 다시 모였다.

“ID 그룹은 IT 부문의 테크놀로지와 금융과 투자 부분의 인베스트먼트를 주축으로 삼아 구축될 것입니다.”

미팅룸에 모인 임원과 유재원을 대상으로 최강욱 비서실장이 프로젝터로 띄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레이저 포인트로 화면을 가리키며 능숙한 발표를 이어 가는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이다.

매우 능숙한 모습이었다.

1년 동안 열심히 영어 회화 공부를 한 것이 헛수고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수행비서인 김대석은 그런 최강욱을 부러운 듯 보았다. 본인과 비슷한 실력이었던 최강욱과 함께 똑같은 과외 선생님을 두고 같은 교재로 영어 공부를 했는데, 최강욱은 벌써 말하기와 듣기가 가능했다. 반면 본인은 아직도 말을 하는 게 힘들었고,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다. 쓰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최강욱과 같이 확실하게 제 몫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집중했다.

최강욱 비서실장의 발표가 계속되었다.

“ID 테크놀로지는 IT 관련 원천 기술 개발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IT 기술과 관련된 작은 기업들을 자회사로 두게 됩니다. 지금은 넥스트컴, ID 소프트웨어 둘이지만 회장님의 투자에 따라 숫자는 늘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영어로 말한 최강욱은 김대석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줬다. 그러자 김대석은 ID 프레젠테이션 띄워진 컴퓨터를 조작해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레밍턴 부사장의 얼굴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ID 테크놀로지의 사장으로 레밍턴 부사장을 승진 임명합니다.”

공무원이라면 임명장을 주겠지만, ID 그룹에는 그런 게 없다. 호명을 받은 레밍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식으로 꾸뻑 인사를 하자 다 함께 박수를 쳐 주는 것으로 임명식은 끝이다. 사전에 공지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적합한 인사였기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레밍턴 본인도 마찬가지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사장은 없습니다. 투자에 관해선 회장님이 직접 총괄하실 것입니다. 대신 회장님의 업무를 돕고 실질적인 행정활동을 보조할 부사장으로 빈센트 그린힐 투자매니저를 승진 임명합니다.”

투자의 핵심은 종목 선정이다.

이점에 있어서 유재원은 일명 사악한 구세주라는 별명을 가진 조지 소로스나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워런 버핏보다 우위에 있다. 가치 투자든, 직감적인 투자든, 최근 핫이슈로 떠오른 키워드 분석이든 유재원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대신 유재원이 찍어준 종목의 투자나 인수를 위해서 직접 움직여줄 사람이 꼭 필요한데, 빈센트 그린힐은 이미 검증이 된 사람이었다.

석유 선물 투자 중에 엄청나게 거대한 돈을 움직였으면서도 한 푼 유용한 적이 없었다. 최강욱이 쉽게 빼돌릴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잘 마련했다지만, 욕심이 생기면 빈틈을 찾기 마련인데 빈센트 그린힐은 우직하게 유재원의 지시를 따랐다.

그야말로 유재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잘 부탁합니다.”

빈센트 그린힐도 레밍턴과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했고, 박수를 받았다.

최강욱의 발표는 계속되었다.

ID 그룹의 출범과 함께 넥스트컴도 독립적인 기업으로 출범했다.

넥스트컴은 한국과 미국 합쳐 50명이 넘는 직원이 있었고, 이미 서비스의 상태는 본궤도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유료 가입자가 5만 명을 넘었고, 미국에서는 12만 명이 넘었다. 충분히 자력으로 회사를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판단에 과감한 선택을 했다.

“넥스트컴 사장으로 헨리 사무엘을 임명합니다.”

이제 막 시작한 넥스트컴은 내부승진을 하려고 해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전문가를 스카우트했다.

헨리 사무엘은 컴퓨터 기술과 전기통신 네트워크 시스템의 전문가였다. 이러한 특기를 바탕으로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움직임이 유재원과 레밍턴의 정보망에 딱 걸려서 스카우트가 되었다.

원래 헨리 사무엘이 창업을 준비하던 회사는 브로드컴이라는 이름의 통신 기업인데, 넥스트컴의 성격과도 딱 맞아 떨어졌다.

지금은 PC 통신을 주력으로 인터넷 웹 서비스를 하는 정도이지만, 넥스트컴의 진정한 주력 사업은 인터넷을 구축할 네트워크 하드웨어였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네트워크 장비 시장은 아직 뚜렷한 강자가 없다.

시스코라는 회사가 이름을 올리고는 있다지만, 압도적인 제품을 내놓은 건 아니다. 헨리 사무엘의 브로드컴은 시스코보다 늦은 후발주자였음에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런 그가 자기 사업 대신 넥스트컴의 사장직을 수락한 것은 ID 그룹의 막대한 자금력과 스톡옵션을 포함하는 화끈한 보수에도 있지만, 팀 버너스리와 함께 인터넷 시대를 개막한 유재원이 보여준 비전 때문이기도 했다.

“ID 소프트웨어는 기존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대신 효율적인 개발 환경을 위해서 TO를 크게 늘리는 한편, 존 카멕 사장을 보조할 조직을 신설할 예정입니다.”

존 카멕은 바빠서 이번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1년이 넘게 준비한 차기작 둠의 출시일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퀄리티로 출시하기 위해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은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둠은 이번에도 일렉트로닉아츠를 통해서 발매된다.

일렉트로닉아츠는 울펜슈타인의 성공을 이끈 공도 있었고, 이번에 둠의 프리뷰 버전을 보고 성공을 확신한 호킨스 사장이 엄청난 배팅을 했다.

울펜슈타인의 정산 비율은 5:5였는데, 둠은 6:4이다. 당연히 ID 테크놀로지의 몫이 6이다. 상당한 양보였는데, 그만큼 둠의 마력에 푹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ID 테크놀로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탄생한 둠의 퀄리티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래픽적으로도 크게 발전했고, 게임성도 보다 강화되었다. 특히 멀티 플레이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다.

울펜슈타인까지는 컴퓨터실처럼 인트라넷으로 연결된 컴퓨터까지 지원했다. 익명의 인터넷을 지원하긴 하는데, 상대방의 IP를 알아야 했고, P2P로 연결되는 터라 상황에 따라 극심한 랙이 발생해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힘들었다.

둠의 멀티플레이는 P2P 구조에서 탈피했다. 넥스트컴이 중앙서버 역할을 하면서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졌다. 한 게임에 무려 16명이 참여해 8 vs 8이라는 팀데스메치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멀티플레이용 서버는 ID 테크놀로지가 지원하는 것이라서, 둠을 구매하기만 하면 넥스트컴의 유료 아이디가 없더라도 멀티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이미 일렉트로닉아츠는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었고, 프리뷰버전을 플레이해봤던 게임 잡지에서도 온갖 호평을 쏟아내며 게이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둠 발매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넥스트컴을 통해 다운로드를 통해 구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 서비스의 첫 타자로 둠이 선정되었다.

일렉트로닉아츠의 유통망이 북미에서는 압도적인 수준이긴 했다. 키보드 워리어, 울펜슈타인의 2연타 만루홈런 덕에 유통망의 수준은 한층 치밀해졌다. 몇 년 전에는 일렉트로닉아츠를 위협하는 라이벌로 액티비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벽히 압도한 1등이 되었다.

이런 일렉트로닉아츠였지만, 유통망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지역은 많았다. 미국이란 나라가 보통 큰 나라가 아닌 탓이다. 게다가 준비한 물량이 동나버리면, 추가로 찍어낸 패키지가 올 때까지 게이머들은 손을 빨고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이 부족한 게이머들은 불법복제라는 어둠의 루트를 타기 시작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 번 불법복제에 맛을 들이면 웬만해선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오기 쉽지 않으니, 소프트웨어 회사에는 치명적이었다.

ESD 서비스는 그런 단점을 완벽하게 막아준다.

전화선, 혹은 ISDN과 같은 고속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컴퓨터로 바로 받아 볼 수 있다. 게다가 패키지를 만들지 않으니 가격도 조금 저렴해진다.

다만 ESD는 일렉트로닉아츠의 역할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서비스라서 호킨스 사장이 열렬히 반대했다.

덕분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기로 하고 ESD 서비스에 둠을 올릴 수 있었다. 만약 ESD에 둠을 올리지 않았다면 분배 비율이 7:3이 되었을 텐데, 분배 비율을 적게 받고 ESD를 서비스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ESD에서 내려받을 때 내는 가격도 패키지 상품과 똑같은 가격으로 했다.

유재원도 동의했다.

ESD라는 인터넷의 새로운 활용법을 보여주는 건 좋지만, PC 게임 패키지 시장의 황금기가 찾아오고 있는 시점에서 찬물을 끼얹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ESD 방식의 장점은 추가 할인이었다.

패키지 게임은 물리적, 공간적 제약으로 길어야 1년 정도 장사를 한다. 이후에는 판매량이 뚝 떨어져서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 ESD는 재고 걱정이 없다. 판매량이 떨어지면 과감한 할인으로 다시 구매율을 우뚝 치솟게 할 수 있다.

참고로 넥스트컴 ESD 서비스의 결제 방식은 매달 지로용지로 보내지는 청구서에 포함하는 것과 카드의 온라인 결제가 있다.

온라인 카드 결제 시스템을 만든다고 카드사들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원클릭 구매 서비스는 아직 무리였지만, 비자나 마스터카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로 둠을 구매할 수 있다.

유재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ESD 방식으로 둠을 구매해줄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러는 사이 최강욱의 발표는 계속되었다.

회장인 유재원의 직속 기관이 2개가 추가로 생겼다. 전략기획실과 감사실이다. 원래 존재했던 비서실까지 해서 총 3개의 실장직 자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3개의 실이 회장 직속이라고 수평적인 자리는 아니었다.

조직도에서 보면 최강욱의 비서실이 유재원과 제일 가깝게 그려져 있고, 전략기획실과 감사실은 한 칸 더 밑에 있는 형태다.

최강욱은 지금의 지위 그대로 비서실장인데, 전략기획실장이나 감사실장보다 높은, ID 그룹의 명실상부한 이인자로 확정된 것이다. 그렇다고 최강욱이 전략기획실이나 감사실에 압력을 넣을 수는 없다. 누가 실장이 되었든, 유재원에게 직통으로 보고하지 최강욱을 거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ID 그룹 재단이 있습니다. 재단 이사장에는 회장님의 친부이신 유봉만 님이 선임되었습니다.”

재단, 일명 ID 파운데이션은 문화와 복지 그리고 장학사업 등을 모두 총괄하는 사회적 공헌 조직이다. 출자금으로 이미 100억이 집행되었는데, 이를 통해 재단 소속인 여주 중학교의 지원과 함께 다양한 공익 활동과 장학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ID 테크놀로지의 여주 지사에서 지원하고 있던 덕진 국민학교의 급식 사업도 ID 파운데이션으로 업무가 이전되었고, 급식실 아주머니들 역시 ID 파운데이션의 정직원이 되었다.

급식실 지원 사업은 앞으로도 계속 확장해나갈 예정인데, 여주 중학교는 내년 91년부터는 급식을 시작한다.

여주 중학교는 규모가 훨씬 큰 만큼, 지원되는 사업도 많이 있다. 급식의 경우엔 전면 무상지원이었고, 생활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경우엔 학비나 교복비의 지원도 고려 중이다.

지금은 여주의 학교들 중심이지만 ID 그룹이 성장하는 만큼 지원을 받는 학교의 숫자도 최대한 늘려갈 예정이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정승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ID 파운데이션을 통해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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