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뉴 프런티어 =========================
#85-1
-후아암, 여보세요?
전화벨이 8번은 울린 끝에 연결되었다. 전명헌 회장님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업무를 시작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다른 경영인들도 비슷하다는 데, 이용권 부사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유재원이에요.”
-아, 재원이?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유재원이라는 소리에 목소리의 톤이 확 달라졌다.
여보세요 할 때는 왜 귀찮게 이른 아침부터 전화냐는 투였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처럼 반기는 기색이 확 드러났다.
“에그 PC 제조 공정에서 포스겐이 어느 단계에 쓰이는 거예요?”
-응? 포스겐? 독가스 말이니?
“네, 유대인 학살했다는 독가스 말이에요?”
-음, 그게…….
막 잠에서 깬 이용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냉장고에 가서 냉수 한 잔을 마신 다음에야 정신이 좀 맑아졌고, 관련된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에그 PC의 투명한 케이스가 폴리카보네이트잖니. 폴리카보네이트를 만드는 공정 중에 비스페놀 A랑 포스겐을 반응시키는 단계도 있단다. 그러니 사용한다면 사용하는 거겠지. 그런데 왜 그러니?
“폭스 TV에서 에그 PC 제조에 홀로코스트에 쓰인 포스겐을 쓰고 있다는 폭로 기사가 나왔거든요. 앞으로 줄줄이 관련 기사가 나올 거 같아요.”
-응? 뭐라고? 홀로코스트?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이용권은 깜짝 놀랐다.
냉수를 마시고도 멍한 느낌은 좀 남아 있었는데, 홀로코스트라는 소리에 잠이 완전히 사라졌다.
-폴리카보네이트를 우리만 쓰는 게 아니잖아. 합성수지 중에서도 성질이 좋아서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이용권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절연성, 내충격성, 가공성 등등 기계적 성질이 우수해서 에그 PC 말고도 각종 기계, 전기 제품에 많이 사용되는 소재가 폴리카보네이트였다.
“뭐, 우리가 잘 나가는 게 아니꼬운 자들이 좀 있는 모양이에요.”
홀로코스트 독가스, 에그 PC를 동치 시키며 띄우는 게 의도가 딱 보였다.
-세상에. 그렇다고 이렇게 악의적인 기사를 낸단 말이냐?
“돈이 걸렸으니 무슨 일이든 하는 거죠. 일단 배후부터 찾아봐야겠어요.”
에그 PC의 돌풍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미국의 학교가 컴퓨터를 바꿀 때, 제일 먼저 고려되는 게 에그 PC였다. 교육용이란 딱지가 붙으면 대폭 할인을 해줘서, 다른 컴퓨터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가격이 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모양도 성능도 좋은 에그 PC를 선택하는 게 상식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소매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에메랄드색인 오리지널 모델 이후로 오렌지, 체리, 사파이어 등등의 다양한 색상의 후속 모델이 나왔다.
에그 PC라는 단일 모델의 근 1년간 판매량은 100만 대를 훌쩍 넘었다. 고급형 PC 시장은 에그 PC로 통일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덕분에 삼보컴퓨터는 인텔과 같은 주요 부품 제조사로부터 전에는 받지 못했던 혜택도 받는 중이다. 얼마 전 출시된 인텔의 최신 CPU인 486 DX2-66 모델도 제일 먼저 대량으로 공급받았다.
486 DX33보다 산술적으로는 2배, 실질적으로는 2.5배 정도 빨라진 최신형인데 아직 수율이 높지 않아서 생산량이 적었다. 그런데도 삼보 컴퓨터에 매달 수만 개에 달하는 486 DX2-66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중이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나온 악의적인 기사로 소비자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유재원도 예상할 수 없었다.
“흠, 근데 왜 에그 PC지?”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월 스트리트에서 88억 달러를 한국으로 가져온 건 ID 인베스트먼트였다. 그러면 ID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반응을 보여야지, 엄한 에그 PC를 잡고 있다.
무척이나 냉정한 시선으로 본다면 에그 PC는 ID 계열과 큰 연관성은 없다. 단지 유재원이 그린 디자인으로 삼보컴퓨터가 생산하고 유통도 알아서 한다. 단지 ID 플래그쉽 스토어를 통해 판매된 제품에선 유재원이 상당한 중계 수수료를 받는 것뿐이다.
그런데 넥스트컴의 게시판을 뒤져 보니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폭스 뉴스를 보고 올린 것 같은 게시물이었는데, ID 테크놀로지에 실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람은 ID 테크놀로지가 설계한 컴퓨터를 트라이젬이라는 회사에 줘서 대신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걸로 보는 것 같다.
“음,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아닐까?”
포스겐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기억의 궁전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넥스트컴에서 그 기자가 올린 기사를 검색해보니 환경 문제나 부랑자 문제 같은 사회 분야의 잡다한 기사만 올렸다.
그러면 에그 PC를 조사해 보다가 주요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에 포스겐이 사용된다는 걸 알고는 기사를 써 올린 것일 수도 있다. 제대로 알아보았다면 폴리카보네이트가 실생활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라는 걸 알았을 텐데, 너무 기사를 대충 쓴 티가 났다.
“폭스 뉴스라면 그럴 수 있지.”
황색 언론의 대표 주자가 바로 폭스였다.
미국의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거느린 대표적인 보수 방송국이다. 친 공화당 언론이었고, 이를 숨기지도 않았다. 편향성을 갖고 확실히 보도했다. 그러면서 온갖 선정적인 기사와 프로그램도 잔뜩 내보내는 중이다.
짐작이 가는 건 있다.
석유 선물과 이번 포스겐 사건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유대 자본이라는 것이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매니저인 빈센트 그린힐은 NYMEX에서 석유 선물과 옵션을 거래할 때 사용한 투자회사로 골드만삭스와 JP 모건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들만큼 석유 선물을 많이 다루는 금융회사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들 금융회사는 유대계열로 예전부터 유명한 회사였다.
에그 PC로 큰 피해를 보는 완제품 회사인 델 컴퓨터의 오너도 유대인이었고, 유재원을 얕잡아보고 덤볐다가 회사가 망하게 생긴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티브 부회장도 유대인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부에선 게이츠 회장도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게이츠 본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밝혔고, 태생도 영국계였다. 오늘 사고를 친 폭스 뉴스도 유대계열 언론사다.
유재원과 많은 마찰이 있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거다. 하지만 당장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는 모호했다.
유대인 핏줄을 타고났다고 해서 하나의 조직으로 형성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미국은 벌써 유대인의 나라가 되고도 남았다.
회귀를 준비하면서 유재원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게 유대인 배후자본설이었다.
세계 경제와 자본의 흐름을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장악하고 있다는 음모론인데, 상당히 그럴듯했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업들은 유대인이 많았고, 이미 미국에서 크게 자리를 잡은 기업들도 유대인이었다.
현재 미국은 2%밖에 안 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GDP의 20%를 점유하고 있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었는데, 그 2%의 사람 중엔 유대인들이 참 많았다. 그러니 유대인 배후자본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모여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유대인이라고 해도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 사이에서도 원수처럼 경쟁하는 일도 많았다. 유재원이 죽기 직전까지도 유대인이 지배하는 세계 정부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겠지.”
이게 시작이라면, 조만간 더 큰 공세가 들어올 거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대응하면서, 공격도 하다 보면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스겐은 폴리카보네이트 제조 공정 중 극히 일부 단계에서만 사용
-에그 PC에 사용되는 폴리카보네이트는 GE에서 생산한 반제품!
-위험 물질이 투입되는 공정은 엄격히 설계된 자동화 설비로 만들어지고, 환경 보호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
삼보컴퓨터 대응도 빨랐다. 이미 삼보컴퓨터의 모든 생산 라인은 에그 PC 조립으로 변경되었을 만큼, 에그 PC는 삼보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폭스 뉴스의 악의적 기사에 삼보 컴퓨터도 총력으로 대응했다.
규모는 엄청났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도 삼보 컴퓨터의 대응 광고로 뒤덮였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그 PC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삼보 컴퓨터는 체질이 달라졌다.
한 대에 3, 4천 달러나 하는 에그 PC를 올해만 100만 대나 팔아 치우는 초대형 컴퓨터 제조사로 급성장했다. 유재원의 ID 인베스트먼트 투자 대박에 비견될 만큼은 아니지만, 총매출액이 2조 원을 돌파했고, 순이익도 수천억 원에 이르렀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이미 대기업으로 취급해도 무방할 정도다. 다만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노동 문제, 허술한 회계 문제 등등의 성장통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이용권이라면 잘 넘길 것이다.
하여튼, 에그 PC를 통해 축적된 자본력을 이번 위기를 돌파하는 데 사용했다. 덕분에 미국의 대형 신문사에서 에그 PC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도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로 모자라서 GE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GE는 미국 산업의 상징이었다.
백색가전제품부터 화학, 전자, 금융까지, 취급하는 걸 찾는 것보다 취급하지 않는 분야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엄청난 문어발 확장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에그 PC 제조에 들어가는 폴리카보네이트가 GE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비등하던 비난 여론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폴리카보네이트 생산을 위한 플랜트 시설은 미국에 있었으니, 뭐라고 비난하기에도 그랬다. 더구나 잘 팔리고 있는 에그 PC를 뜯어보면, 거의 다 미국산 부품이었다.
CPU, VGA 카드, 하드 디스크도 메이드 인 USA였다. 메인보드가 그나마 대만산이고, 메모리칩은 한국산, 모니터는 일본산이다. 부품별 제조국이 가져가는 돈을 따지면 미국이 월등했다.
누군가 넥스트컴 게시판에 에그 PC의 원가 분석을 한 글을 올리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전문가의 탈을 쓴 유재원이 올린 지원 사격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폭스 TV의 보도 후에 주문량이 순간적으로 떨어졌는데, 삼보컴퓨터의 대대적인 반론보도 이후에 원래의 판매량을 회복했다. 게다가 원가 분석 글이 올라오면서 에그 PC를 불매하는 게 과연 미국의 이익이냐 했을 때, 마냥 그렇다고 하기가 머쓱해진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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