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41화 (141/1,007)

[141] 뉴 프런티어 =========================

#84-2

자동차 사고로 인해서 대통령과의 미팅은 내일로 미뤘음에도 전명헌 회장과의 만남은 예정대로 치른 건, 전명헌 회장이 좋은 제안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명헌 회장은 실없는 소리를 할 분이 아니었기에, 그게 너무도 궁금한 유재원이다.

“그 사고를 당하고도 사업 이야기냐? 너도 이제 사업가 다 되었구나.”

전명헌 회장은 테이블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유재원에게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든 유재원은 앞장을 보더니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곤 바로 본문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받아라. 내기 판돈이었던 도곡동 땅이다. 헐값에 넘기기로 했으니 단돈 10억만 받으마.”

10억?

헐값은 그냥 해본 말이었다. 그냥 팔아주기만 해도 좋았는데, 진짜로 헐값에 넘겨 주시는 전명헌 회장이었다.

진짜 헐값도 이런 헐값이 없다.

유재원이 전명헌 회장님께 샀던 로데오 거리 건물과 땅도 60억 원이 넘었다. 도곡동 땅은 아파트 한 동을 올려도 될 만큼 넓었다. 입지도 무척이나 좋아서 도로도 가까웠고, 지하철도 근처에 있다. 게다가 땅 뒤편으로는 도곡 공원이란 녹지도 있었다.

ID 테크놀로지의 본사를 지어도 좋고, 비즈니스 빌딩을 올려서 임대사업을 해도 절대 손해는 안 볼 자리다.

“진짜 이렇게 싸게 주셔도 돼요?”

“그럼. 네 덕에 미래 건설에서 살린 돈이 얼만데? 그냥 주고 싶지만, 그건 네가 싫어할 거 아니냐? 내가 10년 전쯤에 10억 주고 샀으니 그 가격 그대로 넘겨주는 거다.”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유재원의 대답에 손자에게 선물 하나 주는 것처럼 흐뭇한 표정의 전명헌 회장이다.

실제로 전명헌 회장은 이 한 줌의 땅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미래 건설의 이라크 악성 채권을 빨리 처리한 덕에 살린 돈이 수천억 원이다. 게다가 머슴으로 일을 맡긴 녀석이 빼돌린 회사 재산도 상당한 금액이었는데, 유재원 덕분에 다 찾아내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제안은 미래전자에 대한 공동 투자다.”

뜬금없이 미래전자가 나왔다.

미래전자는 83년 설립된 종합 전자제품 회사였다.

텔레비전부터 비디오재생기, 카세트플레이어 등등, 다양한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중이었는데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국내의 전자제품 시장은 일성, 금성, 대호의 3강 체제가 굳혀진 상태였기에 후발주자인 미래전자가 파고들 여지가 없다.

3등도 못한 신세이니 미래 그룹의 애물단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1985년부터 메모리 양산 체제에 들어갔고, 1986년에는 반도체 연구소도 자체적으로 운영하면서 메모리 반도체에는 많은 투자를 진행 중이었다.

“네 덕에 최근 정보통신이라는 분야에 좀 공부를 해봤다. 내가 지원은 적당한 수준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모자란 게 많더구나. 그래서 이번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보련다.”

“대규모 투자요? 어떤 분야에요? 정보통신에도 분야가 다양하잖아요.”

“메모리 반도체다.”

전명헌 회장의 말에 유재원은 오 하는 표정이 되었다.

현재 반도체 시장에서 국산 업체가 파고들 여지가 있다면, 메모리 반도체였다. CPU나 ASIC(주문형 반도체)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는 설계 능력도 부족했다. 반면 구조가 비교적 간단한 메모리 반도체는 막대한 설비투자비용만 감당할 수 있으면 뛰어 볼 만하다.

“요즘 컴퓨터의 기술 동향을 보니 고화질, 대용량의 데이터를 많이 처리한다고 하더라. 개인용 컴퓨터도 예전엔 1메가면 많다고 했는데, 지금은 2메가, 4메가는 쓴다지. 그 게임 때문에 말이다.”

놀랍게도 나이가 지긋한 전명헌 회장은 컴퓨터 시장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고화질, 대용량 게임은 키보드 워리어의 신호탄으로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에는 컴퓨터가 고해상도, 고화질의 이미지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탓에 그래픽적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글라이드 X가 나오고, 뒤이어 486과 VGA, SVGA가 나오면서 EGA 이하 그래픽을 사용하는 게임은 전멸했다.

요즘은 기본이 256컬러의 VGA였고, 대규모 개발 비용을 쓴 AAA급 게임이라면 SVGA도 기본으로 지원했다.

당연히 이러한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는 메모리도 많아야 했다. 너도나도 메모리 증설에 나섰다. 여기에 WWW로 대표되는 인터넷이 정식으로 태동하면서 WWW의 서비스를 시작할 서버 증설에 나서는 기업들도 하나둘 늘고 있다.

서버용 컴퓨터의 특징은 바로 거대한 저장 장치였다. 하드디스크의 용량도 크고, 메모리 용량도 크다.

미래 전자는 일성 전자와 가격 경쟁 중이라서, 애써 만든 메모리 칩을 팔아도 본전이나 찾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메모리칩 가격이 상승하면서 지금은 제법 수익을 내는 중이었다.

“단순 계산이지만, 그러면 메모리 칩의 수요도 2배 4배 늘어나는 거 아니냐. 지금은 우리나 일성이나 다 같은 512K칩을 생산하니 이 수요를 반반으로 나눠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만약 미래전자가 1메가짜리, 2메가짜리 칩을 내놓으면 추가 수요를 싹 가져올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냐?”

반도체의 특성 중 하나가 집적도가 올라가면 속도도 빨라지고, 처리 능력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전명헌 회장의 말대로 1메가짜리를 먼저 내놓으면 시장을 순식간에 선점할 수 있다.

"게다가 컴퓨터라는 건 신제품이 나오면 부품을 거의 다 새로 바꿔야 한다지? 그야말로 노다지 같은 시장이다. 그러니 메모리칩 생산설비를 배로 정도 늘릴 작정이다. 네가 이 투자에 동참한다면, 그만큼 미래 그룹의 지분을 주마."

“헉! 미래전자가 아니라 미래 그룹이요?”

헉 소리가 났다.

미래전자에 투자한다면, 당연히 미래전자의 채권이나 지분을 받는 게 맞다. 그런데 전명헌 회장은 분명히 미래 그룹이라고 했다.

재벌 지배지분은 돈으로도 살 수 없었다. 한국의 재벌들은 자본력이 약해서 매우 정교하게 짜인 순환출자 고리를 통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전명헌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성보다는 사정이 낫긴 한데, 순화출자를 통해 미래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왜요?”

유재원은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명헌 회장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미래 그룹 지배 지분까지 나눠줄 정도라는 건 상상 밖의 범위였다.

“왜? 싫으냐?”

“아, 아뇨. 싫다기보다는…….”

미래 그룹의 미래는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다.

왕회장님이 작고하신 후, 가신 집단과 왕자들이 큰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외환위기 때에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 상황을 이용하면 지금 지분을 받을 필요도 없이 얼마든지 미래 그룹의 지배권에 도전해볼 수 있었다.

“네 안목을 믿기 때문이다.”

갑자기 웬 안목?

“지금 미래 그룹의 후계자로 재구가 낙점된 것처럼 알려졌지. 솔직히 말하자면 내 성에 차는 아이는 아니다. 먼저 간 첫째 이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 재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야망만 크지 능력은 몹쓸 수준이다.”

제 자식들 이야기를 남처럼 이야기하는 전명헌 회장이다.

“그나마 재구가 차남이니 제일 명분은 좋았다. 그래서 미래 건설 회장에 임명한 거다. 하지만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지. 그래서 네 안목을 믿어 보련다. 너는 미다스처럼 손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고 있잖느냐?”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거지 하는 유재원이다.

“나중에 내 못난 자식들이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미래 그룹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네가 가진 지분의 가치도 떨어질 거 아니겠냐. 너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대신 네가 가진 지분으로 무얼 해도 좋으니 미래 그룹이 조각나는 건 막아 줬으면 한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시는 거 아니에요?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 법입니다.”

“허허, 내 자식놈들 능력은 내가 잘 안다. 오랫동안 고민한 것이니 이번 만큼은 따라 주거라.”

생각보다 훨씬 큰 임무를 안겨 주었다.

유재원은 왕회장님이 자신을 어떻게 믿고 이렇게 큰일을 맡겨주는지 모르겠다.

냉정한 시각에서 보자면, 전명헌 회장은 이번 일을 제 자식들에게도 말해놓을 수도 있다.

제 자식들이 유재원에 대항하기 위해 똘똘 뭉치는 걸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잘 될까? 보통 이런 구도가 배신자가 나오기 딱 좋은 상태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미래전자 투자 건은 확실히 참여하겠습니다. 다만 그룹과 전자를 두고서는 좀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그래. 하지만 늙은이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라.”

“예!”

전명헌 회장과의 미팅은 이번에도 유익했다.

자동차도 받았고, 서울의 좋은 땅도 헐값에 샀다. 반대급부로 미래 전자에 좀 투자를 해야겠지만, 투자를 위한 자금은 두둑하니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음날.

유재원은 은밀히 청와대에 다녀왔다. 언론 보도만 본 사람들은 유재원이 아직도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줄 안다.

이번에도 비싼 밥을 얻어먹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나중에 사고의 여파가 좀 잠잠해지면 보도자료로 풀 사진과 영상도 잔뜩 찍었다. 여기에 ID 테크놀로지, ID 인베스트먼트의 90년 법인세로 22억 달러 정도를 신고한 서류도 한 부 있다.

90년의 한국 국가 예산이 28조 원이었다. 추경으로 편성된 2조 원가량을 추가하면 30조 조금 넘는 돈이다.

이런 상태에서 22억 달러는 현재 환율 720원으로 계산할 때, 1조5천억 원 정도의 금액이다. 한국의 국가 예산 중 1/20을 유재원 혼자서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91년도 예산 편성이 코 앞이다.

국회에는 긴장감이 서서히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돈 폭탄이 떨어졌다. 재선을 위해 지역구 사업을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아귀다툼은 몇 배로 심해질 것이다. 동시에 이를 조율하고, 여러 가지로 이권을 챙길 수 있는 대통령에겐 크나큰 이득이었다.

노 대통령은 곁에 아무도 없으면, 유재원을 업고 다닐 기세였다.

3당 합당으로 인한 무리수로 인해서 온갖 부작용이 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공안 정국을 만들고 있지만, 효과는 예전만 못했다. 그런 와중에 유재원이 이목을 딱 끌어주니 국정을 운영하는 부담이 확 줄어들었다. 여기에 22억 달러라는 외화는 그야말로 갈증 끝에 먹는 꿀물과도 같았다.

덕분에 유재원의 사고를 유발한 저열한 기자들을 향해 자기 손자가 다친 것처럼 화를 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유재원이 주리를 틀어달라고 했으면, 병원에 입원한 기자들을 잡아와서 실제로 해줬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재원은 큰 벌을 주겠다고 단언하는 노 대통령을 말렸다. 복수를 남에 미루는 건 유재원의 취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노 대통령은 이번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을 위한 조치를 해줬다. 경호원의 상시 파견이었다. 유재원과 가족들을 삼부요인에 준하는 수준의 밀착 경호를 하도록 직접 경찰청장에 지시했다.

국정원도 못 믿을 마당에 경찰은 어련할까. 하지만 자체 경호팀을 구성할 때까지는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고맙게 받기로 했다.

전명헌 회장의 미팅, 청와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집으로 돌아온 유재원의 일상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에 앉아서 미국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가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 하는 중이다.

“흠. 미국은 아직 조용하네?”

미국 뉴스 게시판은 별다른 게 없었다. 경제 이야기, 이라크 전쟁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ID 인베스트먼트의 대박 이야기는 건조한 문체로 서술된 기사 몇 개 있는 정도였다.

한국 뉴스 게시판으로 넘어가니 미국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였다.

여기는 아직도 ID 인베스트먼트 열풍이다. 한국은 교육열만큼이나 돈에 대한 열망이 솔직한 나라였다. ID 인베스트먼트는 일반 투자자 모집을 공지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황재홍이 근무 중인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돈을 받으라고 난리였다.

그런 사람 중에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부자도 있었고, 소를 판 돈을 들고오신 시골의 어르신도 있었다. 당연히 돈 많은 부자들과 정치인들도 투자를 할 의향이 있다면서 은밀히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미국 NYMEX에서 석유 선물을 가지고 대박을 터트렸다는 뉴스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특급 속보였다.

유재원은 급한 게 없었다.

그렇다고 투자 열기를 엄한 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으니, 일반인들이 투자하기에 적합한 상품을 만드는 중이었다.

동시에 유재원은 이번 일을 촉발한 수출입 은행에 대한 복수도 시작했다.

주거래 은행을 옮기겠으니, 혹시 관심이 있으면 이자율을 제시하고, 특화된 서비스가 있다면 알려 달라는 내용을 담은 공문을 대형 은행에 쫙 돌린 상태다.

88억 달러라는 막대한 수신고를 놓치게 된 수출입 은행이 난리가 났다는데, 유재원이 알 바는 아니다.

한국 뉴스도 다 본 유재원은 이젠 자유게시판에 들려서 밤새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을 살펴 보았다. 딱딱한 뉴스보다는 훨씬 보기 편했다. 당연하게도 게시물 중에 상당한 분량이 본인과 ID 인베스트먼트의 이야기였다.

'유재원 이야기 지겹다'라거나 '꼬맹이 녀석에게 왜 이리 특별 대우 하느냐! 돈 많으면 다냐!'하는 볼멘 소리도 있었고, '그럼 님들이 88억 달러 벌어와 보던가'하는 옹호의 소리도 있었다.

물론 PC 통신 예절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게시판이라서 실제 글에는 욕 한 마디 없었다. 단지 유재원의 눈에 이렇게 읽혔을 뿐이다.

띵!

-보스, 나쁜 소식입니다!

유재원의 미국 걱정은 인디언의 기우제였던 모양이다. 나쁜 소식이 없어서 불안했는데, 레밍턴으로부터 나쁜 소식이 터졌다는 말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우리 ID 테크놀로지를 겨냥한 매우 악의적인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

언론이 먼저 움직이는 건가?

레밍턴의 쪽지에는 넥스트컴의 뉴스 게시판 글 번호가 링크로 걸려 있었다. 클릭 한 번으로 곧장 해당 기사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사를 읽기 시작한 유재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충격! 에그 PC 제조에 홀로코스트에 쓰인 포스겐 사용!

웬 홀로코스트란 말인가? 포스겐은 또 뭐고?

잠깐 고민에 들어간 유재원은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곧바로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삼보컴퓨터 부사장 직통의 번호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어제 엄청 추웠지요? 오늘도 어제처럼 춥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동파도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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