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뉴 프런티어 =========================
#84-1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저 자동차를 운전하는 녀석은 자기가 미하엘 슈마허이고, 자기가 모는 자동차는 F1 머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의 도로 사정은 레이싱을 하기에 조금도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오늘이 12월 1일이다. 창밖에는 찬바람이 쌩쌩 분다. 게다가 어젯밤에 비가 온 상태에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기에 도로에는 살얼음이 끼었다. 지금이 21세기였다면 아침 교통방송에서 블랙 아이스를 조심하라는 말이 꼭 나왔을 거다.
“속도를 줄여요.”
추격자들이 붙으니 김대석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올리고 따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방통행이나 다름이 없는 고속도로에선 이들을 따돌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앙갚음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그냥 사진 실컷 찍으라고 하는 게 자동차 안전에 훨씬 좋을 거다.
“예, 사장님!”
김대석은 유재원의 말을 참 잘 들었다.
속도를 막 올리려던 그는 안전 속도인 시속 80Km로 줄였다. 그러자 먼저 따라붙었던 파파라치 하나가 쾌재를 부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뒤에서 급히 가속해 따라온 차도 마찬가지였다.
유재원은 찍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수첩을 보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언론 플레이를 어떻게 할지, 앞으로의 투자 방향이나 곧 발표할 신작 소프트웨어의 일정을 조율해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 순서를 따져보는 거다.
빵빵!
집중하려는데, 옆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에 산통이 확 깨졌다. 고속도로에서 웬 경적이란 말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이유가 딱 보인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파파라치 녀석은 사진을 실컷 찍었음에도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뒤에서 다가오던 차가 더욱 속도를 내서 바싹 붙었다.
유재원이 사고 날 것 같아서 속도를 줄이니 이제는 기자들끼리 경쟁이 붙은 거다.
“에휴, 이게 뭔 꼴인지……. 속도를 더 줄여 봐요.”
“예!”
70 중반으로 달리던 차가 60대로 떨어졌다. 고속도로에서 저속 주행은 큰 민폐였다. 그나마 교통량이 많지 않았고, 도로 환경도 좋지 않아서 서행 중이었기에 괜찮았다.
기자 놈들만 빼고 말이다.
유재원의 차가 더 속도를 줄이자, 나란히 달리던 기자의 차는 그냥 앞으로 나가는 게 맞다. 그런데 이놈들은 사진 독점에 대한 욕망이 가히 악마적이었던 모양이다. 속도를 줄이자 이놈들도 속도를 줄였다. 뒤에서 쫓던 차는 속도를 내고, 앞에선 속도를 줄이니 차간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마치 마주 보고 달리면서 치킨 게임을 벌이는 두 자동차 같았다. 어느 쪽이 먼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그러면 진 거다. 유재원이라면 멍청한 승자 보다는 똑똑한 패자가 되는 걸 선택했을 거다. 목숨은 하나니 말이다. 하지만 유재원 취재에 열을 올리던 기자 놈들은 다 바보였다.
쿵!
둘 다 속도를 줄이지 않으니, 결과는 충돌 사고였다.
“어어?”
급박한 상황에선 말이 나오지 않는다.
2차선인 고속도로인데 바깥쪽 정속 주행 차선에 유재원의 그랜저가 달리고 있고, 안쪽 추월 차선에는 고성능 줌렌즈를 꺼내 든 취재기자의 차들이 있다가 충돌했다.
시속 70km에 이르는 고속이었고, 도로도 군데군데 얼어 있었기에 컨트롤은 쉽게 흐트러졌다. 앞에 가던 차가 받치면서 휙 돌았다. 고속도로 중심에 있는 가드레일 쪽으로 흘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기적은 없었다.
유재원의 그랜저 쪽으로 확 치고 들어왔다. 운전을 맡은 김대석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급히 잡으려 했다.
“가속!”
그러나 유재원이 비명처럼 외친 목소리에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피해야 할 차는 옆에서 미끄러져 오는 것 한 대뿐만이 아니다, 뒤에서 앞차를 받고 휘청거리고 있는 차도 있었다. 게다가 한참 서행 중이라서 그 뒤쪽으로도 차들 좀 밀려 있었다. 대신 앞에는 차가 하나도 없다.
앞쪽으로 나아가는 게 살길이라는 본능적인 판단이 딱 들어온 것이다.
그랜저 3.0 V6 엔진이 큰 소리를 토해내며 가속이 시작되었다. 국산 자동차 중에선 이보다 좋은 출력은 없었으니 빠르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차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기자의 자동차가 그랜저의 왼쪽 트렁크를 들이받았다.
유재원의 그랜저가 휘청거렸다.
그랜저는 육중한 중형이었고, 기자의 차는 엑셀이라는 소형 승용차였지만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들어오니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피쉬테일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며 그랜저가 요동을 쳤다.
김대석이 악 하는 비명과 스티어링을 열심히 돌렸지만, 막 가속이 된 상태였으니 바로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고속도로의 노면에 옅은 살얼음이 낀 상태였으니 자세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유재원의 눈에 보이는 창밖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실제로는 세상이 도는 게 아니라, 본인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빙판에 미끄러지는 모습일 것이다. 브레이크를 밟은 소리도 요란했다. 그러다가 고속도로 중앙의 시멘트 분리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미끄러지다가 가드레일 쪽으로 흐르는 모양이다.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쿵!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런데 눈을 꾹 감고 고통에 대비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쿵 하면서 크게 흔들리긴 했는데, 그게 다였다. 눈을 떠 보니 중앙 분리대에 부딪히긴 했는데, 거의 수평으로 충돌하면서 충격이 크게 분산된 것이다. 심지어 자동차의 유리창도 깨지지 않았다.
차가 데굴데굴 굴렀다면 충격이 엄청났을 텐데, 미끄러지듯 돌았던 것뿐이라서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다.
“으, 사장님! 괜찮으세요?”
김대석이 크게 물었다.
몸이 좀 놀라긴 했는데, 아픈 곳은 하나도 없었다.
“조심해요!”
유재원은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앞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직도 미끄러지는 엑셀 자동차가 그대로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는 게 보였던 탓이다. 미끄러진 그랜저가 180도로 돌면서 충격을 가한 차와 마주 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충격이 이어졌고, 운전대에서 에어백이 하얗게 터지는 것도 거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긴급 속보입니다! 청와대 행사 참석을 위해 상경 중이던 ID 테크놀로지 사장 유재원 군이 탑승한 차량이 기자의 취재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현장으로 구급대와 경찰들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차량은 반파된 상태라서 무척이나 위중한 상태일 거라고 하는데 자세한 소식을 들어오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엄마, 저는 괜찮아요. …그럼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과장이 좀 심했어요. 김 비서도 약간의 타박상만 입었어요. …네! 올라오실 필요 없어요. 그러면 더 혼란스러워져요.”
ID 테크놀로지 사장 유재원 사고!
텔레비전에서 긴급 속보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모습을 배경으로 유재원은 전화 통화 중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출발했을 때의 정장 그대로였고,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중앙분리대와 충돌한 후에, 밀려온 차에 또 충돌하긴 했는데도 신색은 괜찮았다. 안전띠를 잘 착용했고, 그랜저 자동차가 충격을 잘 흡수해준 덕이다.
가장 중요한 기억의 궁전 상태도 살펴보았는데, 손실된 기억은 없었다. 눈을 감고 궁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수많은 방이나, 각각의 방 안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은 글자나 그림이 깨지는 것 없는 정상 상태다.
대신 그랜저는 완전히 폐차 상태로 변했다.
중앙분리대와 충돌하면서 오른쪽 앞뒷문은 완전히 망가졌고, 나중에 밀려온 엑셀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엔진룸까지 박살 났다.
사고를 수습하러 온 고속도로 경찰과 도로공사 직원들이 망가진 유재원의 차를 보고 깜짝 놀랐고, 그렇게 망가진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멀쩡히 걸어 나오는 걸 보고 또 깜짝 놀랐다.
운전석에 앉았던 김대석은 유재원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에어백이 제때 터지면서 부상을 피할 수는 있었다.
다만 에어백이 터지면서 팽창한 공기주머니가 김대석의 얼굴을 강타해서 멍이 좀 들긴 했다. 스마트 에어백이면 그런 부상도 없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에어백이 터지지 않아서 운전대에 얼굴을 맞는 것보단 100배 나았다. 의사의 진단으로 며칠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했다.
반면 충돌을 유발한 기자 놈들은 골절상을 입는 등의 중상해를 입었다. 유재원의 그랜저보다 훨씬 덜 부서졌는데도, 상해의 정도는 기자들이 훨씬 심했다.
그렇다고 유재원은 이번 사고를 쉽게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파파라치 짓도 모자라서 사고까지 유발한 놈들은 물론이고 이들이 속한 신문사에 일반적인 손해배상은 물론 정신적인 피해까지 청구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ID 테크놀로지가 할 수 있는 보복은 전력을 다할 작정이다.
아쉬운 건 그랜저였다.
사연이 좀 있는 자동차였지만, 싸게 사서 잘 타고 다녔다. 그런데 그랜저의 상태는 수리해도 못 타고 다닐 만큼 부서졌다.
“그랜저가 폐차되는 건 좀 아쉽네. 첫차였는데…….”
어쩌면 전에 김대석이 말한 것처럼 중고차 시장에서 편견 없이 선택해준 주인을 살리고 자기가 먼저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폐차된 그랜저가 용광로에 들어가서 자신처럼 좋게 다시 태어나길 기원한 유재원이다.
“사고가 크게 났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직도 특보 중이고. 그래서 네가 입원했다는 병원에 가보려고 했다만.”
전명헌 회장이 눈을 크게 뜨고 유재원의 요모조모 살폈다.
그의 말대로 텔레비전에서는 아직도 유재원의 사고 뉴스가 계속 보도 중이었다. 그런 유재원이 지금 미래 그룹 본사 왕회장님의 전용 회장실에 나타났다.
유재원이 올 거라는 긴가민가하고 있던 전명헌 회장은 진짜 나타나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회장님네 자동차가 단단해서 그런지 멀쩡하네요.”
“너무 자신하지 마라. 원래 자동차 사고는 하루쯤 지난 뒤에 아프기 시작하는 법이다.”
“서울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어지럽지도 않고, 메슥거리지도 않거든요. 부은 데도 없고.”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병원은 자주 가 봐라.”
그건 유재원이 할 말이다. 전명헌 회장은 아직 정정한 모습이다. 하지만 21세기를 맞이한 다음 해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겨우 10년 남은 것이다.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라고 옆에서 부추긴다면 작별의 시간을 좀 더 뒤로 미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거는 유재원이다.
“그래도 직접 보니 안심은 되는구나. 게다가 우리 자동차가 살아 있는 국보를 지켜줬다고 하니 뿌듯하기도 하고.”
“국보라니요?”
“흐흐, 아직 못 들었나 본데, 청와대에서 널 살아 있는 국보라고 부른다는 구나. 88억 달러를 벌어 왔다지? 우리나라가 올해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본 게 그보다 조금 작았다. 그런데 네가 떡 하니 나타나 그보다 많은 달러를 들어왔으니 외환 보유고가 단번에 두 배로 늘어난 거야. 이게 국보가 아니면 뭐겠냐?”
“정산을 위해 잠깐 들어온 건데요? 세금 내고 남은 돈은 재투자가 될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50억 달러예요. ID 인베스트먼트의 법인세로 21억 달러 정도 신고될 거 같고요. 남은 돈은 17억 달러는 국내 투자나 예비비로 남겨두고, 50억 달러만 해외 투자로 돌릴 예정이라서요.”
“그게 뭐? 지금 들어온 돈은 돈이 아니냐? 게다가 네가 투자를 한다니 내가 다 기대가 되는구나. 1억 달러로 88억을 가지고 왔으니, 50억 달러로 얼마나 더 가져올까? 청와대의 그 양반은 이 소식을 알면 기대감으로 밤잠도 못 잘 거 같구나?”
"에이, 설마요."
"나중에 보면 알겠지. 하여튼 자동차 사고라서 걱정이 많았는데, 직접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아, 차는 내가 폐차된 것보다 훨씬 튼튼한 차로 마련해주마."
훨씬 튼튼한 자동차?
2세대 그랜저가 나올 시기는 아닌데, 이보다 좋은 차를 미래 자동차에서 만든단 말인가? 하여튼 유재원의 입장에선 그냥 고마웠다.
정부에 소프트웨어 납품 사업도 크게 하는 ID 테크놀로지였기에 국내에서 대놓고 외제 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었다. 국산 자동차로 선택이 한정되는데, 그랜저 3.0보다 좋은 차를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세금을 21억 달러나 신고했다고? 너무 정직하게 내는 거 아니냐?”
이야기의 주제가 세금으로 넘어오자 전명헌 회장은 얼굴의 주름이 2개는 늘어날 만큼 찌푸리셨다.
“내가 건설사 출신 아니냐? 거기에서 빼돌리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반은 남겨 먹어야 그나마 한 건 했다고 한단다. 애초에 사업 예산을 짤 때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걸 생각하고 짠단 말이지.”
세금으로 맺힌 게 많으신 모양이다. 예전에도 한 번 해주셨던 이야기를 거의 비슷한 레퍼토리로 이 자리에서 또 반복하신다.
“그래도, 일단 예산이 있어야 무슨 사업이든 시작은 하는 거잖아요.”
그렇기에 유재원도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일단 시작은 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덕진리에 신작로를 까는 사업을 두고 시장이 많이 해먹었다는 소리가 동네 어르신들한테서 나오긴 했지만, 신작로의 효용성은 확실했다. 없을 때보다는 확실히 좋다. 국가에 도둑이 많아서 빠져나가는 게 있다지만, 한국은 분명 발전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를 좀먹는 녀석들은 잘 봐놨다가 나중에 처단하면 된다.
유재원의 생각이 굳건하다는 걸 확인한 전명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더는 설득하려고 들진 않았다.
“그나저나 좋은 제안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에 맞춰 유재원도 화제를 돌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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