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뉴 프런티어 =========================
#83-1
○ 뉴 프런티어
따르릉!
유재원이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 본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바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이스 타이밍!”
마치 유재원이 여주 사무실 안에 들어가는 걸 밖에서 지켜보다가 전화를 건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이다.
보통은 함께 사무실로 올라온 수행비서인 김대석이 먼저 전화를 받는데, 타이밍이 특별한 전화였기에 이번엔 유재원이 먼저 나서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유재원입니다.”
-사장님, 최강욱입니다!
역시나 타이밍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출근 시간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최강욱이니 바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대신 이렇게 일찍 전화를 넣은 걸 보면 무슨 큰일이 난 모양이다.
ID 테크놀로지가 출시한 제품 중에 치명적인 오류라도 나온 건가?
“네, 무슨 일인가요?”
-조금 전, 수출입은행에서 괴자금이 입금되었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엄청난 자금이 찍혀 있어서 사장님께 확인차 문의드리는 겁니다.
최강욱의 말에 유재원은 바로 감을 잡았다.
“아, 입금자가 ID 인베스트먼트고 88억 맞죠? 그거 정산금이에요.”
한가한 목소리로 88억이라고 말하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보통의 예금과는 단위가 다르다. 바로 미국 달러로 88억이라는 거다.
-예? 정산금? 설마요. 얼마 전까진 16억 아니었습니까?
“그 후에 제가 하락에 배팅하겠다고 했잖아요. 과도한 상승이라고요.”
투자 방향이 정해진 후에 최강욱에겐 자세한 이야기를 하진 못했다. 최근 하락장에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하긴 했는데, 그 액수도 자세히는 몰랐다. 그러다가 오늘 입금이 끝난 걸 보고는 무지막지한 액수에 좀 놀란 것 같다.
-세상에!
이번에도 최강욱의 감탄사는 ‘세상에’였다.
“하지만 이 돈이 다 우리 돈은 아니에요. 세금을 내야 하거든요. 오늘 그 점에 대해 논의를 해봤으면 좋겠네요. ID톡으로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많은 나라가 선택한 과세의 방침은 간단했다.
수익에는 무조건 세금이 붙는다는 거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88억에 이르는 막대한 투자 이익을 거둔 ID 인베스트먼트도 당연히 과세 대상이다. 대신 유재원에게도 선택권은 있었다.
에그 PC의 전원을 켜자 곧 부팅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운영체제였기에 하드 디스크를 몇 번 읽자 곧장 바탕화면이 나왔다. 그런데 바탕화면에는 예전엔 없던 것이 나타났다. 바로 로그인 화면이다.
사용자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라는 평범한 확인 절차가 새로 생겼다. 바로 안드로이드 알파의 파이널 패치를 통해 배포된 신기능이다. 사용자가 로그인 화면을 켜고 끌지 선택할 수 있는데, 활성화를 하면 암호를 넣지 않고는 회피할 수 없다.
참고로 파이널 패치라는 이름이 붙은 건 앞으로 안드로이드 알파의 지원은 마감되기 때문이다. 알파는 이것으로 완성이고, 조만간 유닉스 형태의 커널을 채용한 안드로이드 1.0 버전이 출시된다.
유닉스 커널이지만, 리본인터페이스를 채용했으니 외형적으로는 알파와 완벽히 같았다. 패치를 통해 올라간 수많은 기능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드 X도 마찬가지다. 대신 내적으로 커널 전체가 바뀌면서, 도스 기반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는 없다.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안드로이드 1.0 용 컴파일을 통해 변환을 시켜줘야 한다. 표준 C 언어로 짠 소스코드라면 약간의 수정만으로 컴파일할 수 있고, 도스에서만 가능한 변칙을 사용한 소스코드라면 그 부분은 다시 짜야 한다.
이미 개발자나 대형 소프트웨어 업체에는 안드로이드 1.0을 위한 프로그래밍 가이드와 컴파일러가 배포된 상태였다. 게다가 안드로이드 1.0에는 음악 재생기, 인터넷 접속기, 계산기, 스케줄러, 그림판과 같은 응용 프로그램을 잔뜩 내장할 예정이고 몇 가지 게임도 넣어줄 작정이라서 응용 프로그램이 부족할 일을 최대한 줄였다.
유재원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었다. 그러자 잠금화면이 사라지고 익숙한 바탕화면이 나타나면서 ‘웰컴백, 커맨더’하는 짧은 환영의 멘트가 울렸다.
곧바로 ID 톡을 실행하니 이미 만들어진 비밀 채팅방이 있었다. 최강욱은 물론이고 아직도 퇴근 전이었던 ID 인베스트먼트 빈센트 그린힐도 들어와 있었다.
ID 테크놀로지의 회의 수칙 중 하나가 한국 직원끼리만 있으면 한국어로 말하는 건 기본이지만, 미국 직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무조건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어로 말하기 싫어서 일부러 미국 직원을 빼고 회의를 하면 경고가 부여된다.
경고 하나 받는 것으로 회사 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명절, 연말 보너스도 작아지고, 승진에도 차질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영어 공부를 해야 할 직원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ID 테크놀로지의 사업 영역은 전 세계이니 어쩔 수 없다.
덕분에 미국 조직과 협력 작업이 필요한 직군이나, 미국에서 파견 온 직원이 있는 부서에는 영어 광풍이 부는 중이었다. 대신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하면 학습 지원비는 두둑이 챙겨주고 있다.
-최 비서실장님에게 먼저 설명을 들었습니다. 사장님의 방침을 듣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영어 전선에 뛰어들었던 최강욱은 이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명문대에 들어가서 한 방에 사법고시를 뚫은 공부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음, 세금에서 제 원칙은 명확합니다. 탈세는 안 한다. 절세 역시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수준으로 하는 거죠.”
줄일 수 있으면 최대한 줄이지만, 탈세에 가깝게 줄이는 건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뻔히 세액을 줄일 수 있는 데, 무식하게 다 내지도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간단히 물어볼게요. ID 인베스트먼트는 일단 글로벌 기업 형태고 미국에서도 이를 인정받을 수 있죠?”
-예, 맨해튼 지사는 미국에 사업체 등록을 하긴 했지만, 본사는 한국으로 신고되어 있습니다.
“글로벌기업의 장점은 바로 세금을 낼 곳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미국과 한국, 각각 세금이 얼마나 부과되는지 간단히 계산해주세요.”
최강욱은 한국에 소득을 신고할 때 나오는 세금을, 빈센트 그린힐은 미국의 경우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세금 계산은 간단하게 하려고 한다면 산수 문제처럼 단순해질 수 있었고, 이번처럼 이익금과 비용이 딱 떨어지는 경우엔 더욱 단순하다.
-음, 아무래도 미국이 불리하겠네요. 현재 미국의 자본소득 세율은 28%입니다. 기부를 통해서 약간의 절세는 가능하지만, 최대한 줄이더라도 24억6천만 달러 정도 세금이 나올 겁니다.
계산하기 쉬운 빈센트 그린힐이 먼저 답을 올렸다.
-한국의 경우 법으로 정한 법인세는 30%입니다만, 현재 우리 회사가 적용받고 있는 공제를 따지면 24%로 내려옵니다. 21억1천만 달러가 세금입니다.
숫자만 들어보면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단위가 워낙 크니 한국에 들여와 소득신고를 하는 게 3억5천만 달러, 한국 원화로 2천5백억 원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럼 결론은 간단하네요. 한국에 신고하세요.”
-알겠습니다.
-음, 그건…….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빈센트 그린힐이었고,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여지를 두는 이는 최강욱이었다.
아마도 최강욱 비서실장은 이번 WTI 투자수익금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것에 대해 세금 외적으로 우려하는 게 좀 있는 것 같다.
유재원도 충분히 그것들이 무엇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구설에 오를 수도 있고, 무척이나 혼탁한 정치 상황에서 자신이 여당이나 대통령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걱정도 들 것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최강욱이 우려하는 점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정치가 좀 후진적인 게 문제이긴 해도, 대통령 자체가 유재원의 우군이었다. 추석 때 청와대에서 선물도 보내주었고, 거기엔 대통령의 친필 서한도 있었다. 추석 잘 보내고, 사업도 잘되길 기원한다는 몇 줄 안 되는 짧은 내용이지만, 호의는 확실히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적당히 적은 돈이라면 빼앗기기도 쉽지만, 그것이 거대한 수준의 자본이 되면 자체적인 힘이 생겨난다.
한국에서 첫 번째 투자은행으로 인정받은 ID 인베스트먼트가 미국에서 88억 달러를 벌어서 21억 달러를 세금으로 내면, 이제까지 유재원이 받은 칭송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반응이 쏟아질 것이다.
-내일 은행 영업이 시작되면 곧 송금해드리겠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은 시원스레 대답하고는 로그아웃했다.
미국사람이었지만, 이번 투자수익에 대한 세금을 어디에 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한국의 세율이 미국보다 나으니 한국에 신고하자는 의견을 최강욱보다 강하게 주장했다.
첨단의 자본주의를 달리는 월스트리트에서 수십 년 근무한 빈센트였기에, 그의 사고방식도 민족주의보다는 자본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인 모양이다. 오히려 유재원이 한국 사람이니 한국을 더 챙기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보일 정도다.
-미국에서 좀 말이 많이 나올 겁니다.
반면 최강욱은 걱정이 많았다.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에 대해서 걱정했고, 이번엔 미국의 반응에 대해서 우려했다.
-88억 달러가 그대로 한국으로 출금되면, FBI보다 무서운 IRS(미국 연방국세청)에서 바로 경위를 파악하려고 출동할 겁니다.
“IRS! 거기 무섭죠.”
IRS는 미국의 세금 징수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유재원도 전생에 IRS의 무서움을 직접 겪어 보기도 했다. 미국에서 얼마간의 소득이 생겨서 신고해야 했는데, 몇 가지 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에 서류를 챙겨놓기도 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폼넘버 1040이라는 신고 용지를 작성하는데 A4용지로 70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영수증을 붙이는 칸이 많아서 그렇다지만, 한국의 간편한 신고에 비하면 너무했다. 결국, 혼자 해보려다가 미국 세무서에 돈을 주고 맡겼다. 공제를 받는 금액 중에 상당 부분을 세무사가 가져갔지만, 안 받는 것보단 나았다.
최강욱 비서가 말한 FBI보다 무서운 IRS의 전통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주법 시대의 무법자인 알 카포네가 몰락한 것도 FBI가 잡은 게 아니라 IRS가 탈세를 포착해서 잡은 게 결정타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미국 사업장에서 탈세한 것도 없고, 불법을 저지르지도 않았잖아요. 게다가 미국은 자본주의의 전도사라고 자부합니다. 자기들이 글로벌스텐다드라고 온갖 나라에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투자금이 국경선을 자유롭게 넘어다니는 거죠. 이런 상태에서 국부유출 운운하면 자가당착이죠. 이제껏 했던 말이 있으니 막진 못할 거예요.”
미국의 투자 자본은 이미 거대한 수준으로 형성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조지 소로스, 로버트슨과 같은 투자로 이름을 날린 이들이 결성한 헤지펀드도 한창 운영 중에 있었다. 이들의 자산은 수천억 달러 수준이라서, 88억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건 일도 아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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