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사막의 폭풍 ==============================
#79-1
“호오, 역시 사장님의 테이블 세팅은 뭔가 좀 다르네요? 일련번호 항목은 하나만 있어도 되는 건데? 3개씩이나 쓰시네요.”
“내부에서 사용하는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외부에서도 자유롭게 접속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익명으로 접속한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되는 것과 특정 권한이 있는 내부 사람만 열람할 수 있게 하려면 처음부터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겠죠.”
“아아, 익명 네트워크라서 그런 거군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일단은 그냥 보이는 거로 추측하는 거죠.”
“세계 최고의 인터넷 전문가이시면서 잘 모르신다니요. 팀이 모르면 세상 사람 다 모르는 거죠.”
“세계 최고라니, 그런 부담스러운 수식어는 사절입니다. 미스터 유에게나 어울리는 거죠.”
사이 좋게 나란히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은 팀 버너스리와 머레이 캠벨이었다.
메인프레임 세팅이 하루 만에 끝나는 작업은 아니었기에, 머레이 캠벨은 한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커다란 캐비닛 3개 분량의 메인프레임 설치는 하루면 되는데, 소프트웨어 세팅이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IBM은 하드웨어 회사이기도 하지만, IT 컨설팅 부문도 상당히 크게 운영하는 회사였다. 단적으로 시중 은행의 전산망 운영 역시 IBM의 메인프레임이었는데, 거기에서 돌아가는 금융 소프트웨어도 IBM이 만들어준 것이다.
유재원이 계약한 두 대의 메인프레임 역시 마찬가지다. 하드웨어의 구매뿐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세팅도 계약되었다.
PC 통신 서버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세팅도 IBM에서 해주기로 했고, 그것이 머레이 캠벨에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26일이 되어 팀 버너스리가 한국에 입성하면서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초면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라는 공통점 덕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게다가 둘 다 컴퓨터 분야에 상당한 전문가라서 죽이 잘 맞았다.
“저기, 잠깐만 조용히 해주실래요. 궁금한 건 세팅이 끝난 뒤에 설명해드릴게요.”
S390 메인프레임과 이더넷으로 연결된 에그 PC 앞에서, 메인프레임에 설치된 DB2라는 데이터베이스를 세팅 중이던 유재원이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잡담에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
“옙!”
둘의 입이 단번에 닫혔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유재원은 다시 단말기 화면에 집중하며 타이핑을 다시 시작했다.
IBM의 컴퓨터들은 비싸도 그 성능은 확실히 만족스러웠다. 특히 번들로 제공되는 기계식 키보드의 고급진 느낌은 전문 키보드 업체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었다. 지루한 서버 관리자에게 그나마 타이핑으로 즐거움이라도 얻으라고 이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유재원이 지금 하는 작업은 PC 통신용 서버 프로그램과 이에 연동되는 데이터베이스의 세팅이다.
케텔은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미국서 사온 PC 통신 프로그램의 저장 형식에 따라 저장했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들이 올린 글의 활용이나 가공이 무척이나 힘들어진다.
유재원은 처음부터 PC 통신의 게시판, 동호회 등의 서비스가 웹으로의 변화할 것을 상정하고 데이터베이스를 세팅 중이었다.
복잡한 건 아니다. 21세기 초 많이 사용했던 오픈 보드라는 게시판 프로그램이다.
PHP라는 스크립트 언어로 작성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스크립트 언어라는 개념조차 없는 시대라서 C로 만들고 메인프레임 운영체제인 MVS용 컴파일로 빌드를 완료해서 올린 상태다.
원래 이 작업은 IBM의 엔지니어인 머레이 캠벨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인터넷에 대한 개념이 약해서 유재원이 원하는 수준을 맞춰주진 못했다. 전화선이나 ISDN으로 연결되는 PC 통신 서버 세팅 정도는 가능한데, 이보다 더 확장된 인터넷에 대응하는 서버라는 건 머레이 캠벨에게 낯선 과제였다.
그렇지만 머레이 캠벨의 특기는 병렬연산이다.
CPU 하나로는 도저히 체스 챔피언을 이길 수 있는 연산량이 나오지 않으니, CPU를 여러 개 연결해서 종합 성능을 끌어올리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 개념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 덕에 지금 유재원이 만지고 있는 S390 메인프레임의 성능도 크게 향상되었다. CPU가 6개나 들어있고, 여러 가지 작업에 CPU의 성능을 분산해 사용하면서 과부하가 걸리는 상황을 최소화했다.
그렇기에 병렬연산은 곧 분산연산이라는 말과도 동치 된다.
이제까지는 하나의 시스템 안에 여러 개의 CPU를 설치하는 형태였다면, 나중에는 독립된 여러 대의 컴퓨터를 하나로 묶어서 컴퓨터의 전체적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클라우드 컴퓨팅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인터넷은 빠질 수 없었으니, 머레이 캠벨도 금세 인터넷에 적응할 거로 생각하는 유재원이다.
그렇게 되면 팀 버너스리와 머레이 캠벨의 시너지 효과도 크게 발생할 것이다.
다들 유재원의 뒷모습과 단말기의 화면에만 집중한 지, 3시간쯤 지났을 때.
“끝났습니다!”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유재원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기다렸다는 듯 유재원 뒤로 몰려들었다. 팀 버너스리와 머레이 캠벨뿐만이 아니다. 로데오 개발팀 소속의 프로그래머들까지 다 몰려왔다. 팀장인 이찬수는 물론 최근 영입된 이들이 10명이 넘었다.
유재원은 메인프레임과 바로 연결된 이더넷 선을 뽑은 다음, ISDN과 연결했다. 물리적으로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자, 그럼 접속해볼까요?”
곧이어 마우스를 움직여서 PC에 띄워진 안드로이드 알파의 바탕화면에서 ‘ID Web’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거미줄 아이콘을 클릭했다.
2월에 유재원이 열심히 만들었던 브라우저의 이름은 없었다. 그냥 브라우저였다. 그러다가 한국에 방문한 팀 버너스리가 적당한 이름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에, 유재원은 얼렁뚱땅 ID Web으로 결정했다.
이름만 봐도 ID 테크놀로지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이름을 결정할 때, 일각에서는 너무 ‘ID’ 일변도가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ID 테크놀로지의 브랜드 가치는 하늘을 치솟는 중이었고, 대단히 긍정적이었기에 ID라는 이름으로 통일성을 지어주는 게 좋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낯선 분야인 인터넷과 WWW의 보급을 위해서는 시장 선도적인 ID 테크놀로지의 이름을 빌리는 게 훨씬 좋았다.
ID Web 프로그램은 무척이나 가벼워서 286에서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 프로그램을 486에서 실행했으니, 더블 클릭을 하자마자 띄워졌다.
브라우저는 예전에 유재원이 실행했을 때보다 달라진 게 조금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라면 남색으로 설정되었던 화면이 하얀색으로 바뀌었다는 점, 프로그램 상단의 엄청나게 긴 입력 칸이 생긴 것이다.
긴 입력 칸이 최근 버전업된 ID 웹의 핵심 기능으로, URL이라는 인터넷 주소를 입력하는 칸이었다.
“http:www.next.com"
유재원은 마우스로 URL 칸을 선택한 다음 신중하게 타이핑했다.
엔터키를 딱 누르자 주소입력창 왼쪽에 모래시계 아이콘이 작게 떴고 모래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모습이 간략히 나타났다.
NEXT.COM
케텔을 인수한 유재원이 곧 시작할 서비스의 이름을 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온 이름이었다. 부를 땐 넥스트컴이다. 사전 조사에서 넥스트닷컴보다 넥스트컴을 선택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당연히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서비스가 될 것이다.
브라우저에 ID라는 브랜드를 넣었지만, PC 통신과 웹 서비스를 ID의 이름에 포함하지 않고 넥스트컴으로 분리한 이유는 나중에 독점 시비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인은 실리콘밸리 사무실에 설치된 메인프레임으로 접속되고, 한국사람들은 이곳 로데오 사무실의 메인프레임으로 접속된다. 그 밖의 세계인들이 접속할 경우 가까운 서버로 연결되게 했다.
오오!
사람들이 갑자기 감탄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하얗기만 했던 ID Web 화면에 ‘환영합니다’라는 한글과 ‘Welcome'이라는 영어가 떠오른 것이다.
설정된 글자 크기가 커서 ‘환영합니다’라는 다섯 글자가 화면 한 줄을 다 먹었다. Welcome도 마찬가지였다. ID 오피스를 위해 열심히 만들었던 윤곽선 글꼴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확대해도 글자가 각져 보이지 않는 특성 덕에 화면에 글자를 크게 찍어도 매끄럽게 나타났다.
하단에 있는 내용을 보려면 화면 오른쪽 끝에 있는 스크롤 바를 내리거나, 방향키 중에 ↓키를 눌러야 했다.
그 아래로는 WWW에 대한 개념과 함께 WWW와 HTML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히 작성되어 있었다. 하이퍼텍스트로 작성된 문서라서 일부 단어는 링크로 이동할 수 있다는 파란색에 밑줄까지 들어가 있다.
넥스트컴이 세계 최초의 웹 페이지로 역사에 등극한 순간이다.
이번 이벤트가 시사하는 바는 오직 유재원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에 오자마자 유재원과 함께 이 페이지를 만들고,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에서 접속할 수 있는 웹서버 프로그램 제작에도 참여했던 팀 버너스리 역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유재원은 곧바로 방명록이라는 항목을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면서 단문을 입력할 수 있는 작은 게시판이 나왔다.
-인디: 1등이군요! 첫 번째 발자국을 남기고 갑니다!
본래 유재원은 인피니티 드림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했지만, 너무 길어서 요즘은 줄임말인 인디(InD)를 사용했다.
기념비적인 첫 방명록을 인디라는 닉네임으로 작성해보는 유재원이다. 그렇게 방명록을 남기고 돌아보니,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자신들도 직접 만져보고 싶은 모양이다.
“서버는 열린 상태니까 여러분도 접속할 수 있어요. 사무실 컴퓨터들은 다 모뎀이 달려 있으니 직접 접속해보세요. 인터넷은 얼마든 접속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잖아요. 주소는 다들 아시죠? www.next.com이요.”
유재원이 인터넷은 열린 공간이라는 걸 상기시켜주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손님이라서 전용 컴퓨터가 없는 팀 버너스리와 머레이 캠벨은 그대로였다. 그들을 위해서 유재원은 에그 PC 앞자리에서 물러났다. 둘다 반색을 하며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서양에서는 연장자 우대라는 문화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에, 결국 한국에서 배운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주먹으로 이긴 팀 버너스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차지했다.
비공개 자체 테스트이긴 했지만, ID 웹과 넥스트컴은 제대로 작동했다.
메인프레임 서버는 HTML로 작성된 웹 페이지를 정상적으로 보여주었고, ID 웹을 통해 작성한 사용자의 글도 서버가 받아서 데이터베이스에 잘 저장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사를 불러다 사진을 찍었다. 배경은 메인프레임 S390으로 삼았고, 그 앞에 로데오 개발팀원들이 섰다. 앞줄엔 유재원, 팀 버너스리, 머레이 캠벨이었고, 가장 앞에 있는 건 에그 PC였고 화면에는 ID 웹으로 접속한 넥스트컴의 웰컴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이제 넥스트컴의 공개를 위해 앞으로 남은 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케텔로부터 인수한 데이터를 변환해서 넥스트컴에 올리고, 동호회나 실시간 신문 기사 게시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시스템상에 구현하는 정도다. 미국이라면 시큐리티 챌린지용 사설 BBS의 글들을 옮기는 것이다.
그 작업들이 끝나면 최초의 웹서비스이자 최신의 PC 통신으로 등극할 넥스트컴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는 거다. 하지만 ID 테크놀로지만 열심히 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여기에 보조를 맞춰야 하는 게 ISDN의 보급이다.
모뎀으로 접속하면 애써 준비한 차세대 서비스를 사용자들이 느껴볼 수 없다. 억지로 사용한다더라도 느려서 호기심이 뚝 떨어질 테니 고속 통신이 가능한 ISDN의 보급이 넥스트컴과 발을 맞춰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 PC 통신은 비교적 저렴한 내장모뎀 카드 하나면 끝난다. 하지만 인터넷 겸용인 넥스트컴은 ISDN 전용 모뎀을 써야 했다. 최신 기술이라고 모뎀 한 대의 가격이 20만 원이 넘었다. 올해 임금이 좀 많이 오르긴 했지만, 직장인에게도 20만 원은 정말 큰 부담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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