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사막의 폭풍 ==============================
#78-2
에그 PC는 마물이다. 만져보기만 하면 그 매력적인 모습과 성능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을 사람이 없다.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라는 이름에 맞게 최고의 스펙을 가진 에그 PC를 대량으로 주문했고, 그중 한 대가 팀 버너스리에게 포상으로 주어졌다.
연구소 조직과 시스템을 정비해서 기존의 방식보다 몇 배는 나아진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준 공을 인정해준 것이다.
넥스트 스테이션과 에그 PC는 태생부터 달랐고, 성능도 천지 차이였다.
넥스트 스테이션은 일단 GUI화면이긴 해도 흑백이라서 그래픽 표현에 한계가 있었고, CPU 역시 모토로라의 68시리즈라서 범용적이진 못했다.
에그 PC는 반대였다. 인텔 486으로 응용프로그램도 많았고, 성능도 쾌적했다. 게다가 일반 VGA도 아니고 한 단계 더 높은 SVGA 카드 덕에 고해상도에서 수만 가지의 색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건 안드로이드 알파였다.
안정성은 넥스트 스테이션의 넥스트스텝보다는 좀 떨어진다. 하지만 성능과 유려함은 안드로이드 알파의 완벽한 우위였다. 게다가 두 번의 패치로 능력이 한층 강해지면서 뭔가 부족했던 것도 사라졌다.
에그 PC를 사용해본 건 불과 2달 정도였지만, 팀 버너스리의 마음을 쏙 빼놓을 만했다. 당연히 넥스트 스테이션으로 개발 중이었던 WWW는 안드로이드 알파로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성능 차이도 차이지만, 넥스트 스테이션의 가격은 어마무시한 가격이었던 탓이다. 한 세트가 5천 달러였으니, 일반인은 엄두를 낼 수 없는 가격이다. 물론 에그 PC도 조금 비싸긴 한데, 안드로이드 알파는 IBM 호환 PC에서 구동되는 운영체제였기에, 훨씬 저렴하게 맞춘 컴퓨터에서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ID 테크놀로지는 영리기업이고, 지금 보여주신 프로그램도 영리 활동을 위해 만드신 거겠죠? 그런데 제 생각은 인터넷과 WWW는 많은 사람이 사용할 때 더 큰 효용이 발생할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WWW 관련 기술이나 접속 프로그램을 무료로 풀 생각이었거든요.
역시 팀 버너스리답다.
-아! ID 테크놀로지에 드리고 싶었던 제안은 WWW의 공동개발이었습니다. 무료 공개한다는 건 변함은 없지만, 몇 가지 구석에서 제가 받은 기술지원만큼, ID 테크놀로지에 이익이 될 것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며칠 전에 발표하신 정보고속도로라는 칼럼도 무척이나 감명 깊게 읽었고요. 그전엔 시큐리티 챌린지도 감동이었죠. 그런데 미스터 유가 벌써 상업용으로 쓸만한 프로그램을 완성할 줄은…….
아니, 이 양반 성질이 좀 급한 모양이다.
유재원은 아직 가부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절할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미스터 버너스리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도 잘 찾아보면 분명 만족할…, 어? 동의하신다고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글을 썼던 팀 버너스리는 동의한다는 유재원의 말에, 먼저 쓴 글을 지우지도 못하고 급하게 되물었다.
“네! WWW를 계획하신 목표가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함이잖아요. 그 취지에 저도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WWW나 HTML 같은 기술은 무료로 공개하는 게 제일 좋겠지요.”
-어? 어어!!!
짧고 단순한 문장이었다. 그렇지만 느낌표 3개를 통해서 모니터 저편에서 팀 버너스리가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뜩 ID 톡 다음 버전에서는 애니메이션 GIF 파일을 통해 움직이는 이모티콘 같은 걸 주고받게 하면 감정 표현에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 메신저에는 기본으로 포함된 기능인데, 아직 여력이 없어서 ID 톡에는 넣지 못했다.
그림 솜씨 좋은 삽화전문가도 고용하고, 디즈니나 마블, DC처럼 유명한 캐릭터를 가진 회사와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물론 ID 톡 전용 캐릭터를 만들고 이들을 활용한 이모티콘도 꼭 출시하고 말이다.
-진심입니까?
“그럼요 제가 만든 브라우저 소스와 HTML에 대한 기술 정보를 담은 문서를 보내드릴 테니, 마음껏 사용하세요. 제가 만들었다는 출처만 확실히 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자금은 부족하지 않으신지? WWW 개발에 자금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글자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지금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고 있는 지 모를 겁니다!
-고맙습니다! 진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이네요. 업계에서 미스터 유에 대해 칭송이 자자했던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글이 연달아 올라왔다.
WWW나 HTML이 최신 기술이긴 하지만, 독점하면 효용성은 떨어지는 특이한 성질도 있다. 팀 버너스리의 생각처럼 사람들이 널리 사용해야만 존재감이 강해지는 기술이었다.
인터넷을 이용해 얼마든지 영업활동을 할 자신이 있는 유재원은 이제까지 완성한 작업물을 팀 버너스리와 완전히 공유했다.
“아, 그래도 일단 기업과 조직의 사이의 약속이니 계약서는 확실히 작성해야 합니다. 물론 브라우저 소스코드는 지금 보내드릴게요.”
유재원은 파일관리자를 열어서 브라우저의 소스 코드를 전송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제가 조만간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어? 제네바에서 오신다는 거예요? 거기서 한국까지 오려면 비행시간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그냥 팩스로 주고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WWW를 두고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분은 또 없었습니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아! 큰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이니 스케줄에 여유가 없으시겠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방학이라서요."
이런저런 미팅과 행정 처리 등에 관해서는 레밍턴과 최강욱만 바쁘지, 정작 유재원 본인은 3월 1일까진, 완벽한 자유시간이다.
-더 좋군요! 그러면 제가 2월 26일 한국에 입국하는 걸로 하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봐요.”
행동력이 자신보다 더 높은 분은 처음이다. 더구나 전설과 만나 친분을 쌓는 건, 유재원의 버킷리스트에 담긴 일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온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은 일은 연달아 찾아왔다.
드디어 IBM에서 주문한 메인프레임이 서울에 입성했다. 초고속 배달을 위해서 화물용 비행기로 미국 IBM 공장에서 실어서 그대로 서울로 날아왔다는 소식이었다. 통관절차도 금세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에 유재원은 김대석과 부랴부랴 상경했다.
“대박이네!”
로데오 사무실 2층에 만들어진 데이터센터에 들어가자마자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큼지막한 캐비닛 같은 게 보였다.
IBM System 390.
IBM이 메인프레임용으로 특수 설계한 32비트 CPU가 무려 6개나 들어가 있다.
이름은 ES/9000이라는 신형인데, 이전 모델보다 처리 능력이 4배 이상 향상된 물건이다.
인텔이나 AMD의 CPU를 생각하면 안 된다. 메인프레임용이라고 크기도 엄청났다. A4용지보다 큰 메인보드에 손바닥만한 빅칩이 3개가 꽂혀 있고, 초고속 S램이 캐시 메모리로 탑재되어 있는 형태가 하나다.
CPU 하나가 초당 1천5백만 개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프로세서가 6개가 들어 있으니, 단순 계산으로 초당 9천만 개의 연산량이다. 그만큼 발열도 엄청나서 수냉 시스템을 선택했다. 그런 프로세서가 6개나 들어간 최상급이다.
메모리 용량은 1GB. 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용량은 2GB인데, PC 통신 서버로 쓰기엔 과도할 만큼 큰 용량이라서, CPU 숫자를 늘리는 대신, 메모리를 줄이는 것으로 타협했다.
하드디스크 용량도 128GB라는 엄청난 용량이었다. 텍스트 위주인 PC 통신용 서버로 쓰기엔 너무도 광활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테이프 백업장치도 연결되어 있었기에 매일 생성된 데이터를 압축해 저장할 수 있다.
운영체제도 MVS라는 독자적인 것을 사용하는데, 넓게 보면 유닉스와 같은 뿌리였다. 그러니 유닉스를 잘 다루는 사람의 경우 메인프레임만의 독특한 기능을 익히면 곧 익숙해질 수 있다.
“이거, 진짜 우리가 쓰는 겁니까?”
이찬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덤이다. S390을 보고 잔뜩 흥분했다는 게 딱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 대형 컴퓨터를 만져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찬수였다. 크레이-2S 슈퍼컴퓨터가 한국과학기술정보원에 도입되었을 때, 차라리 카이스트에 갔으면 구경이라도 했을 텐데 하며 후회했을 정도다.
비록 슈퍼컴퓨터는 아니지만, 그에 비견할 만큼 강력한 메인 프레임은 커다란 컴퓨터를 좋아하는 이찬수의 감성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그럼요. 신줏단지처럼 모셔두려고 사온 게 아니라, 사용하려고 사온 겁니다. 본전 이상의 부가가치를 뽑아내려면 열심히 운영해야죠.”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찬수다.
비싸게 들였으면 그 이상의 가치를 뽑아내야 하는 거다. 신줏단지처럼 놔두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던 교수들이 이상한 것이었다.
“실례합니다만, 기계만 너무 반기시는 거 아닙니까?”
새로운 목소리고, 영어였다.
고개를 돌아보니 IBM 마크가 파란색 점퍼 차림의 사람이 있었다. 돋보이는 점은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인데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머레이 캠벨입니다. 귀사의 데이터센터에 S390 설치의 총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머레이 캠벨?
좀 젊은 모습이라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 역시 팀 버너스리에 뒤지지 않을 IT 업계의 레전드였다.
인터넷도 세상을 크게 바꾸었지만, 이와 함께 세상을 또 바꾼 기술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관련해서 커다란 변곡점이 3개가 있는 데, 시간의 역순으로 꼽아 보면 이런 순서다. 완벽한 자기학습 기능을 탑재한 오메가의 탄생이 2030년에 있다. 영화 속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자의식 같은 건 없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변곡점이 오메가의 바탕이 되는 게 알파 제로라는 인공지능의 등장이다. 알파 제로는 컴퓨터가 정복하기 불가능하다는 바둑으로 세계 최고의 프로 기사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한 알파 고의 최종완성형이다.
최초의 변곡점은 당연히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딥 블루라는 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 카스파로프를 이긴 사건이었다.
딥 블루는 IBM이 개발한 대형 컴퓨터이고,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눈앞에 있는 머레이 캠벨이다.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도 엄청났지만, 컴퓨터의 처리 능력을 극대화한 병렬연산에 있어 최고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체스! 카스파로프!”
전생에 인공지능 개발과 보급 사업을 했던 유재원에게 머레이 캠벨 하면 체스가 떠오르는 건 조건반사와도 같았다. 그러자 머레이 캠벨이 헉하는 소리를 내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더니 곧 반쯤 남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부끄럽습니다. 조그만 이벤트였는데, 한국에도 벌써 소문이 났었나 보네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불과 5일 전인 2월 22일 케임브릿지 하버드 메모리얼홀에서 IBM의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에게 도전해서 완벽히 박살 난 탓이다. 깊은 생각은 체스에서 초당 80만 수를 계산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간 챔피언을 넘기는 부족했다.
경기가 시작된 지 불과 2시간 만에 카스파로프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갔다.
IBM으로 복귀한 머레이 캠벨은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유명한 유재원의 본사에 신형 메인프레임 설치를 지원할 엔지니어를 뽑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원했다.
괜히 회사에 얼쩡거렸다가 체스에서 졌다고 질책만 들을 것 같은 느낌에 꼼수를 쓴 것이다. 덤으로 미국에 명성이 자자한 천재 유재원도 직접 보고 말이다.
“그래도 ID 테크놀로지의 사장님이 제 이름을 기억해주니 기분은 좋네요! 일부러 찾아온 보람이 있습니다.”
“어? 저를 보려고 직접 지원하신 거예요?”
머레이 캠벨의 말에 유재원이 오히려 놀랐다.
“하하! 그럼요. 좋은 기회인데 어떻게 놓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서 자랑하게 사인 한 장만 부탁합니다.”
호탕한 머레이 캠벨의 말에 유재원의 뇌리에 뭔가 번뜩였다.
며칠 전 팀 버너스리도 그렇고 지금 머레이 캠벨도 그렇고, 이들에게 자신의 나이나 외모는 큰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나이를 중요하게 따지는 한국에 있다 보니 스스로 뭔가 좀 위축되었던 모양이다.
다른 것도 있다.
유명세가 꼭 귀찮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팀 버너스리와 머레이 캠벨이 스스로 ID 테크놀로지를 찾은 건 모두 유재원 자신의 유명세 덕이었다.
‘그렇다면 정규 과정을 꼭 따를 필요가 없잖아.’
정규 과정을 따르는 건 분명 이점이 있다. 배울 게 없긴 해도 너무도 튀었던 그간의 행보에 작은 쉼표 하나를 찍는 의미는 충분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유명세가 마냥 불편하고 귀찮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리빙 레전드나 숨어 있는 인재들을 끌어들일 강력한 요소가 될 수도 있음을 지금 알았다.
작은 깨달음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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