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사막의 폭풍 ==============================
#77-2
유재원과 부모님은 교장 선생님과도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났다.
ID 테크놀로지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교장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으니, 그 은혜는 실로 거대했다.
부모님은 오래, 건강히 사시라고 정성을 들여 달여온 홍삼정을 선물로 준비했다. 유재원은 먹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될 선물을 가져왔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주식 하나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사람 손으로 판 게 아니라, 레이저로 각인해서 진짜 주권과 똑같은 형태였다. 일단 모양이 감사패였기에 교장 선생님은 다른 선물을 부담스러워했지만, 크리스털 주권은 기쁘게 받으셨다.
물론 저 감사패 같은 주권이 진짜 효력이 있는 주권인 걸 모르셨으니, 그러셨을 거다. 하지만 주권의 발행에 있어 재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주권 장부에 발행번호와 주주의 이름 잘 등록되어 있고, 인지세를 잘 냈으면 그게 주식이다.
“재원이에게 해줄 조언은 딱 하나뿐이구나. 높이 올라가더라도 자만하지 마라는 거다.”
선물을 받으신 교장 선생님은 마지막까지도 유재원을 챙겨주셨다.
“예, 선생님.”
진부하다고 할 만큼 상식적인 조언이었고, 그만큼 인생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진리였다.
“그리고 어디를 가서라도 기죽지 말고. 네 뒤에 우리가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혹시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도와달라고 하고.”
“네, 선생님!”
당부를 시작으로 마지막까지 응원해주시는 교장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졸업식이 끝난 다음,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의 부모님과 다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ID 테크놀로지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이던 강희제라는 중국집이었다.
졸업식을 끝으로 유재원의 국민학교 생활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이어서 중학교 입학까지 짧은 휴식기라 할 수 있는 봄방학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놀 시간이 없었다.
90년도 사업을 위해 준비하는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해서 봄방학 중에 집 밖으로 나간 날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케텔과 ISDN 보급사업도 준비해야 해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오늘도 웬만하면 나가지 않고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유재원이 집중하는 건,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ID 오피스도 아닌 매우 특수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정체는 브라우저다.
물론 인터넷 브라우저는 아니다. WWW가 발표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만드는 브라우저는 인수한 케텔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서비스할 차세대 PC 통신 서비스에 적용될 물건이었다.
PC 통신은 보통 텍스트 위주의 VT모드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까지는 한글이 나오는 터미널 프로그램으로 접속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유재원은 여기서 딱 한 발만 더 나아가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이미지와 음성 등의 멀티미디어도 첨부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도입이다.
글자만 주르륵 나와서는 쉽게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본문에 이미지도 넣고, 짧은 음성이나 음악을 첨부하고, 열람과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이퍼텍스트 브라우저를 만드는 중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포맷을 만드는 건 아니고 HTML 중 태그 기능을 빌려왔다.
HTML의 강점 중 하나가 바로 몇 가지 태그만 외우면 별도의 편집기 없이 텍스트의 크기도 자유롭게 조절하고, 밑줄을 넣거나, 심지어 움직이는 글자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PC 통신의 VT모드에 적용하면 큰 무리 없이 다채로운 화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표나 그림이 첨부된 기사를 신문의 편집 형태 그대로 PC 통신 안에 옮겨올 수 있다. 케텔에도 신문기사가 올라오는 게시판이 있긴 했는데, 업데이트 속도도 느렸고, 표나 그림이 빠져서 제대로 된 기사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은 새롭게 시작할 PC 통신에서 실시간 뉴스 서비스를 도입할 예정인데, HTML을 이용해 사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줄 예정이다.
아예 PC 통신 화면의 맨 밑줄에 속보처럼 기사 제목을 자막으로 흘리고, 마음에 드는 게 지나가면 그걸 클릭해서 바로 열어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21세기 사람에겐 기본적인 형태인데, 90년도엔 최첨단 하이테크 언어처럼 다가올 것이다.
최대한 빨리 런칭하기 위해 열심히 작업 중이었는데, 지금은 잠깐 멈춰서야 했다.
“이제 시간 된 거 같은데 나가자고. 재원이도 컴퓨터 그만하고.”
아버지가 일어나자 유재원도 이제껏 했던 작업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그리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섰다.
“아이, 참. 조금만 기다려요.”
어머니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오늘은 유재원의 일가족이 다 함께 외출하는 날이다. 뭔가 가족 행사가 있는 건 아니고, 바로 중학교 예비 소집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혼자 가도 된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같은 먼 곳에 혼자 보낼 때가 많았는데, 중학교 입학 일정이라도 함께 해주고 싶은 게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해 떨어지겠어! 얼른 나와!”
자동차에 오른 지 10분이 지나도 김말숙 여사가 나올 기미가 없자, 유봉만이 크게 외쳤다. 그러고도 3분은 더 있다가 어머니가 나오셨다.
가족들은 그랜저 자동차에 올랐고, 여주 중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사람 많네.”
운동장에 유재원 또래의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올해 여주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숫자가 무려 400명이 조금 넘는단다. 그래서 학급도 예전 8개에서 하나를 늘린 9개 교실로 편성하고 한 반에 46~8명씩 밀어 넣는 과밀학급으로 편성될 것 같다. 그렇다고 교실 넓이가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정말 콩나물시루처럼 꽉 차게 지내야 하는 거다.
“재원이는 몇 반이지?”
학교 입구에는 임시로 만들어진 반 배치표가 걸려 있었다. 넓은 전지 종이에 수백 개의 이름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유재원의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 바로 보이네요. 1학년 1반, 1번이네.”
유재원은 제일 처음에 있었다. 1이 세번이라니. 좀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건 왜 일까? 주민이와 영식이는 3반으로 같은 반이었다.
운동장에는 1반부터 9반까지 팻말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 먼저 와서 반 배치를 확인한 아이들이 팻말 앞에 모여 있었다.
유재원도 거기로 가서 줄을 서려는데, 이보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재원이 부모님이세요?”
반 배치표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유봉만에게 다가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유봉만은 살짝 경계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는 1학년 1반 임시 담임을 맡게 된 권은석입니다.”
“아! 재원이 담임 선생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재원이 아비인 유봉만입니다. 이쪽은 제 내자이고요.”
담임 선생님이라는 말이었으니, 유재원의 부모님이 바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권은석도 같이 인사를 하는데, 유봉만 만큼 깊게 숙이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은 살짝 뭔가 싶으면서도 일단 인사를 올렸다.
예비소집일이었으니, 선생님과 만나서 반 배정도 받고 개학과 관련된 이런저런 지시를 듣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보통 팻말 쪽에 계시지 교문까지 나와 있는 경우는 없었다.
“재원이가 공부할 교실이 궁금하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뭐지?
오버가 좀 심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담임 선생님이라는 권은석으로부터 어째 영업 사원 느낌이 날까?
유재원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권은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전생에선 아예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던 터라, 여주 중학교에 대한 정보는 매우 희박했다.
“재원이도 같이 갈래?”
“네? 아, 집합 시간이 다 된 거 같은데, 저기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응? 그럴래? 알았다. 그럼 있다 보자.”
권은석은 유재원의 부모님을 모시고 앞장섰다. 유재원은 그 모습을 조금 지켜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국민학교 때와 달리, 처음부터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긴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덕진 국민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일부 선생님들이 정말 특이했다. 그런 참교육자를 한 번 만난 게 인생 전체에 걸쳐 한 손에 꼽을 만큼 큰 행운일 것이다.
“뭐, 이런 학교가 다 있어?”
교실로 가는 유재원은 다시 한 번 툴툴거렸다.
“그러게! 예비 소집 날 시험을 보는 건 반칙이야!”
주민이와 영식이로부터 따로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덕진국민학교 출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엄청나게 친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처음 본 아이들과는 달리 그래도 친분이 있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1학년 1반 교실로 갔다.
대화에서 알 수 있듯, 학교 측에서 예비소집하는 날 반 배치고사를 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겨울방학부터 봄방학까지 펑펑 놀던 아이들이 지금 죽을상을 하는 이유다. 더구나 시험을 보는 이유는 반편성을 위한 것이란다.
즉, 1학년 1학기 때부터 우열반을 운영한다고 대놓고 공지를 한 것이다.
“다 찍을까?”
“그럴까?”
“응? 뭐라고?”
“나도 그냥 찍어볼까?”
그냥 해본 말에 유재원이 장단을 맞추자 오히려 녀석이 훨씬 놀랐다. 본인이야 공부랑 그다지 친하지 않다지만, 유재원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찍어도 넌 제대로 봐야지. 네 어깨에는 덕진의 명예가 걸러 있다고!”
“헐, 무슨 영화 찍냐? 오바하긴.”
유재원도 진짜 그러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예비소집일부터 줄 세우기에 들어가는 학교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온 말이었다.
“그럼 너도 시험 잘 풀겠다고 약속해. 자고로 시험이란 잘 보는 게 장땡이잖아.”
“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해보는 데까지 해 보마.”
곧 선생님이 들어왔다. 입구에서 봤던 권은석이었다.
곧바로 교탁 위에 올라가 교실 안을 둘러 본 권은석은 구석에 앉은 유재원을 찾아서 눈빛 교환까지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조용! 학교가 오일장이냐? 여긴 여주중학교다. 특히 우리 학교는 학습 분위기 좋기로 소문난 학교란 말이지. 학습 분위기를 해치는 것에 대해선 필벌이 확실한 곳이니 주의하도록. 봐주는 건 이번뿐이니 말이다.”
권은석은 유재원의 부모님 앞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교탁을 회초리로 탁탁 치면서 말하니 아이들이 다들 쫄아서 목소리도 크게 대답했다.
“시험 이야기는 밖에서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너희 학습 수준을 보고 수업 진도와 수준에 참고할 거니까 잘 봐라. 시험을 망치면 너희가 졸업한 국민학교 이름에 먹칠하는 거니까 신중하게 답을 써라. 그리고 커닝하면 0점 처리한다. 덤으로 다신 커닝 생각이 나지 않도록 엄청나게 맞을 거니까 시도조차 하지 마라.”
시험지는 두 장이었다.
하나는 국어, 다른 하나는 산수다. 그런데 국어 시험지 뒷면에는 영어 문제가 튀어나왔고, 산수 시험지 역시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하여튼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예비 소집 후, 집으로 돌아온 유재원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상상했던 학창시절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은석이라는 선생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은 입학식이 있는 3월 2일까지는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는 거다.
학교의 행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빠른 유학 루트를 타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좋은 소식이 내려오면서 기분이 풀렸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가장 큰 건은 연초에 IBM에 주문했던 신형 메인프레임이 드디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한국 IBM은 세관만 통과하면 바로 로데오 사무실로 가져와서 설치를 해주겠다고 했다.
두 번째는 외부의 조직에서 함께 작업을 하나 해보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물어오는 전화였다. 그런데 그 조직과 인물은 재원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조직의 이름은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였고, 전화를 걸어온 이의 이름은 팀 버너스리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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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군요~! 이번 주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