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26화 (126/1,007)
  • [126] 사막의 폭풍 ==============================

    #77-1

    ○ 사막의 폭풍

    90년 2월 9일.

    전국의 텔레비전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역사적 이벤트를 특집으로 보도하는 중이었다.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합니다.

    3당 합당 사건이다.

    한국 정치사에 큰 존재감을 발휘할 민주자유당, 보통은 민자당이라 불리는 거대 보수여당이 드디어 오늘 출범한다.

    -번영된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느냐? 불안한 구태의 절벽으로 떨어지느냐의 갈림길에서 우리 3당 총재들은 국민을 위한 번영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 다음으로 박태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국민을 들먹였다.

    이번 합당을 동의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심지어 통합하는 당내 의원들도 합당한다는 것을 모르다가 발표 얼마 직전에야 알아서 난리가 났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가혹한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견뎌냈습니다. 88올림픽을 통해 세계는 서울로 왔지만, 서울은 아직 세계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국민의 뛰어난 역량을 정치세력이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정치적 공통점이 있는 민주, 통일, 신민당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김영삼, 일명 YS가 나와서 통합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국민의 역량에 대해선 맞는 말인데, 어째 결론이 그런 쪽으로 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하긴 대통령이 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는 진짜 속마음을 공동기자회견장에서 말하긴 좀 그랬을 거다. 그래도 YS는 나중에 민정당의 대선후보가 되었고, 이를 통해 대통령까지 되면서 자신의 목표를 완벽히 달성할 거다.

    먼 훗날 일부 역사가들은 YS가 3당 합당 이후 여당으로서 정치 여로가 열렸고, 이를 통해 대통령도 수월하게 당선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민정당의 최대 계파는 노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계였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전폭적으로 믿을 수 있는 민정계에서 후임 대통령이 나오는 게, 본인 퇴임 후의 안위를 위해서도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차기 후보로 민정계를 적극적으로 밀었다.

    그런 상황에서 YS가 민정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것과 거의 동급의 정치 싸움을 벌였다는 의미였다.

    -신당의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맡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 최고위원은 김영삼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종필과 민정당의 대표였던 박태준은 최고위원을 맡았습니다. 나머지 최고위원 2명은 외수에서 영입하기로 했는데, 호남지역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로 이중재, 신형식 전 의원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본론은 언제 나오는 거야?”

    대다수의 국민들처럼 텔레비전 앞에 있는 유재원은 점점 지루해졌다.

    처음엔 역사적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보는 것이 신기하긴 했는데,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80년대의 극도로 경직된 권위주의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피곤해졌다.

    아나운서 맨트가 끝나자 다시 노 대통령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코앞으로 다가온 21세기를 맞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 드디어 나온다.”

    -21세기의 핵심 기술은 정보통신에 있고, 정부와 당은 합심하여 전 국민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고, 21세기에 걸맞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정보통신망 설치하기로 목표를 모았습니다. 정보고속도로사업입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의 상징이자 국토의 대동맥이라면, 정보고속도로는 온 나라의 신경을 연결해주는 신경망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10년간 25조 원을 투입하여 대학과 연구소 중심의 인터네트 통신망을 산업 분야로 확대하고, 1초에 신문 4천 장 분량을 전송하는 광케이블 통신망으로 국토 전역을 거미줄처럼 엮어 놓겠습니다. 또한, 최대한 이른 시점에서 ISDN의 정식서비스를 시작하여 가정에서 음성과 문자, 영상 등의 멀티미디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틀을 정부와 민주자유당이 주도하겠습니다.

    “헉? 25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유재원은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25조 원이란다. 10년간 25조이니 단순 계산으로 1년에 2조5천억 원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정보통신망 구축에 사용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정보고속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미래 비전을 담은 문서를 보낸 게 저번 달 말이다. 그런데 벌써 돈 이야기가 나오니 진척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설마? 25조가 진짜로 편성되는 건 아니겠지.”

    정치인들의 말은 일단 걸러서 들어야 한다.

    단적으로 오늘 창당된 민자당의 강령에는 내각제 개헌도 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대통령이 내각제를 추진할 생각이 없다는 속내를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YS는 국민의 반발을 이유로 전면 폐지해버리기도 했다.

    노 대통령 후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데, 총리와 권력을 나눠야 하는 내각제를 YS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발표도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이 편하다.

    어쩌면 이번 정보고속도로 사업으로 거하게 해먹기 위해서 일단 질러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겨우 3년 남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올해 예산은 이미 편성이 끝났다. 믿어볼 건 추경뿐이다. 그러니 3년 간 약간의 삽질 좀 하다가 후임자가 전면적으로 파기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편성한 예산 중 최소 반은 통신망 건설에 사용하겠지."

    일단 희망을 가지고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지하 자원도 없고, 환경도 척박한 한국의 유일한 자원은 바로 국민 여러분입니다. 유재원 군의 ID 테크놀로지가 써내려가는 신화가 단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2, 제3의 ID 테크놀로지가 나올 수 있도록 정부와 당이 전력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어?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갑자기 텔레비전 속 대통령이 본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자 유재원은 뜨끔했다. 속으로 열나게 털고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이 나온 거다. 게다가 언급하는 장소를 생각하면 더 황당했다.

    지금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신당인 민자당의 첫 기자회견 자리였다.

    총재인 노 대통령과 대표 최고위원인 YS 등의 거물이 나와서 당의 운영과 정강·정책 등을 발표해야 하는 자리였다. 유재원은 정책 발표를 통해 정보고속도로가 짧게 언급될 거로 예상했다.

    그런데 아예 대놓고 유재원 본인의 이름은 물론이고 ID 테크놀로지라는 회사까지 대놓고 이야기하면서 도전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에휴, 이 유명세라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건가?”

    하긴, 대통령의 입장에서 자신의 치적으로 ID 테크놀로지만 한 게 또 없다.

    재벌도 아직 기가 펴지 못한 미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유일한 회사가 ID 테크놀로지였고, 유재원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정부와 보폭을 맞추면서 실리를 챙기는 게 좋을 거 같다.

    “아, 정식 발표가 되었으니 문서를 공개해도 되겠지?”

    유재원은 스스로 반문한 후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문서란 청와대 부속실로 보냈던 ‘정보고속도로.IDW’ 파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부속실에 보낸 것에서 인터넷 뱅킹이나 HTS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적당히 걸러서 삭제하고, 정보고속도로의 개념과 비전을 중점적으로 편집해서 게재하면 사람들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동이 빠른 유재원은 바로 실행했다.

    케텔에는 A4 6장 분량으로 올렸고,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교 인터넷 게시판, 컴퓨서뷰의 정보통신 포럼 등에는 이보다 더 줄인 4장 분량의 영문 문서를 올렸다.

    전송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유재원은 직접 올린 글을 열람해서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한 후에 컴퓨터를 종료했다.

    다음 날.

    -…이것이 정말 청소년이 쓴 글인가 하고 믿을 수 없었지. 정책 연구소의 연구원이라도 내다볼 수 없는 비전이 담겨 있었거든. 그런데 유재원이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과연 재원 군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네.

    “과찬이십니다.”

    -정보통신 관련해서 궁금한 게 많네. 조만간 한 번 만나서 식사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네, 불러주시면 영광이지요.”

    이후 짧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들은 유재원은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방금 전화 누구였는데, 그리 긴장을 했던 거냐?”

    한숨을 돌리니 옆에서 안 듣는 척, 다 듣고 계셨던 아버지가 물으셨다.

    “김영삼 대표예요.”

    “김영삼 대표? YS 말이냐?”

    어제저녁엔 청와대에서 고맙다는 전화가 오더니, 이제는 김영삼 대표였다. 정보고속도로 문서를 민자당 대표들이 다 돌려 본 모양이다. 하긴 어제 발표장에서 대통령 혼자 독단으로 25조 원짜리 정보고속도로 사업을 발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야, 여당 대표가 직접 전화도 주고, 우리 재원이 대단하네.”

    유봉만은 대통령보다 YS에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덕진리를 한 번도 떠나 보신 적이 없었지만, 노 대통령보다는 YS를 훨씬 좋아하는 게 훤히 보인다. 하긴 대통령이 아무리 보통 사람이라고 외쳐도 군복 입고 있던 모습을 기억하는 분이 많았다. 반면 YS는 민주화 투사이자 여공들을 보호해주던 친근한 모습도 있으니 3당 합당이란 야합을 선택했음에도 YS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국민은 얼마 없었다.

    “그러게. 어제는 대통령이 이름도 불러 줬고, 오늘은 YS네. 그럼 내일은 김대중 선생에게서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어머니인 김말숙은 YS 같은 유명한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주는 게 그냥 좋으실 뿐이다. 날이 지나도 친척은 물론, 최근 알게 된 이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줄지 않으니 매일 신나는 하루였다.

    “실없는 소리. 그분은 민자당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나 있지도 않을 거야. 단번에 정치적으로 고립돼버렸잖아.”

    아버지의 말대로,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 날이 되어도 DJ로부터의 전화는 없었다.

    대신 매스컴에서는 민자당의 출범과 함께 천명된 정보고속도로에 대해 갑을 논박이 주로 올라왔다.

    25조나 쓸 사업이냐 하는 야당 의원들의 주장이나, 경부고속도로 사업을 예로 들면서 야당의원들을 반박하는 여당 의원들의 논쟁에 불이 붙었다.

    3당 합당 그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쏙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민자당은 218석이라는 슈퍼 여당이었기에, 당내에서 이견만 없다면 무슨 법이든 다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제2의 유재원이 되겠다고 컴퓨터 업계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여론까지 좋았다.

    정보고속도로 사업은 무난하게 추진될 것 같았다.

    2월은 짧은 달인 만큼,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그만큼 유재원의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았다. 그중에 하나는 2월 15일 치러진 덕진국민학교의 졸업식이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유재원이었다.

    상장은 물론 장학금까지 받았다. 졸업생 대표가 되어서 은사님께 꽃다발도 드리고, 졸업생 인사도 했다. 전생의 초라했던 국민학교 졸업식 때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기에, 나름 뿌듯한 유재원이었다.

    전생에는 그저 단상에 올라가 상 받는 아이들에게 박수만 쳐주다가 털래털래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일이 바빠서 오시지도 못했다.

    유재원이 달라진 것처럼 부모님의 상황도 달라지셨다. 두 분은 유재원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다.

    옷차림부터 제일 세련된 모습이었다. 작년부터 ID 인베스트먼트의 부동산 투자 관련 일을 도와주시면서 서울로 올라갈 일이 많아지셨다. 그때부터 최강욱이나 황재홍의 도움으로 미용과 옷에도 배려를 받으시면서 촌티를 완벽히 떨쳐버리셨다.

    게다가 유재원도 여러 친구와 두루두루 친했고, 수경이나 주민이처럼 진짜 친한 이들의 경우 자주 놀러다닌 탓에 부모님과도 친분이 있었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이나 일부 선생님들께는 투자를 받을 정도였다.

    투자도 성공적이었다.

    지분투자는 초대박이었고, 일반 투자나,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정도의 투자도 원금은 물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자 수익을 정산 받았다.

    그러니 선생님들도 유재원의 부모님께 살뜰하게 대했다.

    덕분에 수경이 부모님, 주민이 부모님 등등,  얼굴만 알던 사이가 금세 친구처럼 가까워지셨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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