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25화 (125/1,007)

[125]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6-2

CPU 주문량이 많아졌으니, 할인이 생기는 건 당연했지만, 기대했던 수준 이상이었다. 게다가 배송도 총알처럼 빨랐다. 인텔이 달라졌는데, 다른 부품 회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이라는 거, 참 신기하더구나.”

“뭐가요?”

“비싼데 잘 팔려. 게다가 한국에서도 제법 수요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거지. 도대체 이 현상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사소한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법이죠. 에그 PC가 컴퓨터로 명품 반열에 오른 거예요.”

“헛, 벌써?”

“네, 이런 걸 베블런 효과라고 해요.”

“응, 뭐라고? 배불러 효과?”

“베블런 효과요.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낸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에서 상류층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 없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어요.”

이용권은 유재원의 청산유수 같은 대답에 혀를 내둘렀다.

비싼 돈 들여서 미국 유학을 다녀오긴 했지만, 거기서 배우긴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거기 가서 공부만 죽어라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당시엔 영어 실력도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어린 유재원은 유식함이 철철 넘쳐 흘렀다.

“명품은 당연히 선망의 대상인데, 누구나 가질 수는 없지요. 비싸니까요. 그렇지만 에그 PC가 상류층만 살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하게 비싼 건 아니잖아요. 하여튼, 앞으로 품질 관리가 중요할 거예요.”

“재원이 너는 이런 거 언제 배웠니?”

“뭐, 이동하는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보는 거죠.”

겸양의 말을 하는 유재원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는 전생에 죽어나게 했다. 이제야 좀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음, 내부도 깔끔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외부 케이스가 맞물리는 부분 같은 데 유격이 생기면 안 돼요. 예전엔 통과했을 텐데, 앞으론 불량으로 판정하고, 꼭 고쳐야 해요.”

“음, 당연히 그래야지.”

유재원은 삼보 컴퓨터 주식 한 장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주인처럼 이것저것 주문했다. 그런데도 이용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사항을 모두 적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었고, ID 테크놀로지와의 협력 관계는 더욱더 깊어져야 삼보 컴퓨터가 일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ID 오피스와 안드로이드 알파를 정식으로 채용했단다. 보석글이 좀 아깝긴 해도 ID 오피스의 생산성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더구나.”

삼보 컴퓨터가 ID 테크놀로지의 제품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대놓고 말했다.

“에그 PC 다음 디자인이 나오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한다!”

“예. 당연합니다.”

삼보 컴퓨터의 유일한 걱정은 에그 PC의 차기작이 다른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신선함은 사라진다. 게다가 여러 경쟁업체에서 에그 PC를 모방한 디자인의 일체형 PC를 우후죽순 내놓고 있었다.

디자인의 완성도는 에그 PC가 제일 높았고, ID 테크놀로지의 인증 마크도 있었기에 위협이 되는 대체품은 아직 없었다. 덕분에 다른 회사들은 가격 경쟁을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베블런 효과가 강조되면서 에그 PC의 인기가 더 올라갔다.

문제는 후속제품이다.

삼보 컴퓨터엔 컴퓨터 디자이너가 없다. 회장님은 에그 PC의 위력을 보고 난 다음에야 디자인을 강조하면서 관련 부서를 만들기로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이 에그 PC의 후속 제품을 제대로 만들 것 같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에그 PC의 원작자인 유재원에게서 제대로 된 후속 디자인을 받는 것뿐이다.

“전에는 멋모르고 그냥 헐값에 받았는데, 이제는 디자인 값도 제대로 쳐주마.”

“그래요? 제가 원하는 대가는 좀 비싼데?”

비싸다는 말에도 이용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지금 에그 PC를 한 대 팔면 벌어들이는 수익이 200만 원이 넘는다.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일반 형태의 IBM 호환 PC를 팔 땐 3, 40만 원 정도였는데, 디자인 하나로 마진이 5배 이상 상승한 것이다.

비싸더라도 충분히 값을 치를 용의가 있다. 그런데 이어진 유재원의 말은 이용권의 예상 밖이었다.

“제가 원하는 대가는 삼보 컴퓨터가 컴퓨터 제조에 집중하는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컴퓨터는 가정의 필수품이 될 겁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선진국도 마찬가지죠. 즉 삼보컴퓨터는 앞으로 몇 년간은 정신없이 컴퓨터만 만들어도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당연히 곳간도 이익으로 가득 쌓일 테고요. 그럼 이제 좀 다른 걸 하고 싶을 때가 찾아올 텐데 꾹 참고 때를 기다려주시라는 말이지요. 차라리 이상한 사업을 하는 대신에 돈이 열리는 나무를 키우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유재원의 말에 이용권은 예전에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전에 말했던 그거로구나.”

그때도 제법 심각하게 듣긴 했다. 그런데 그걸 마음에 두진 않았다. 이용태 회장은 물론 이용권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유재원 같은 가능성 많은 인재가 부동산 투자 같은 기존의 재벌과 같은 행태를 하는 게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또 들으니 전해지는 느낌이 달랐다.

“조만간 발표가 날 텐데, 제가…, 아니 우리 ID 테크놀로지가 데이콤 지분을 취득할 거예요.”

“데이콤을?”

“네, ISDN을 시작으로 고속 데이터 통신망 보급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거든요. 케텔 인수에 대해서도 아시죠?”

“케텔 인수는 알고 있었다만, 데이콤 지분 취득까지 할 줄은 몰랐네.”

“이걸 통틀어 유선 데이터 통신망 사업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진짜 커다란 시장은 번거로운 유선에서 벗어난, 무선 통신 시장이에요.”

“그렇지!”

이용권도 지위가 지위인지라 전화를 쓰거나, 사용할 일이 많았다. 특히 밖에 나왔을 때 전화를 사용할 일이 생기면 이동전화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이동 통신분야는 생각보다 훨씬 큰 잠재력이 숨어있어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몇 년만 자본을 축적하시면 삼보 컴퓨터가 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하는 게 무리가 아닙니다. ID 테크놀로지가 보유한 유선통신망과 삼보의 무선통신망이 결합하면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 이상이 될 거예요.”

혼자 먹는 게 좋지만, 그럴 수 없는 분야도 있다.

정부의 견제도 그렇고, 비대해지는 조직도 문제다.

유재원은 데이터 통신 서비스에서 제일 기본적이고도 핵심인 백본망은 자신이 가지고, 응용 서비스인 무선 통신회선 사업은 가장 끈끈한 협력 관계인 삼보 컴퓨터가 하도록 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다.

물론 휴대전화의 운영체제나 하드웨어는 ID 테크놀로지에서 주도할 것이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 똑똑한 휴대전화가 대중화가 될 때도 다른 회사들은 영감도 부족하고 기술도 없을 테니까.

하여튼 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면 지금은 유재원이 말했던 대목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마음에 새겼다.

“잘 알겠다. 회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이미 회장님도 네 식견에 감탄하셨으니, 엉뚱한 사업을 하자고 하시는 일은 없을 거다.”

이용권과의 이야기도 잘 끝났다.

조만간 이용태 회장의 퇴진 하더라도, 이용권이 삼보의 회장이 되면 ID 테크놀로지와의 협력은 꾸준히 유지될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월 초가 되었다.

길었던 겨울 방학도 순식간에 끝나버렸고, 짧은 봄방학을 앞둔 시점이다. 수업이 진행되는 건 아니라서 아이들에겐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유재원에겐 지금도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뽑아주는 스케줄을 열심히 소화하는 게 일이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의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도 몇 차례나 소화했고, 여러 행사에 불려다니면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서 회사의 개발 일정을 지키기 위해 프로그램 개발에도 열심히 힘을 보탰다.

좀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안드로이드 알파의 첫 번째 패치를 낸 게 어제 같은 데, 벌써 두 번째 패치를 배포해야 할 날이 곧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 패치에서는 네트워크 기능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자체 다이얼 업 프로그램과 인터넷 접속을 위한 소켓 프로그램도 내장되는 것이다. 여기에 글라이드 X 2.0도 추가될 예정이니 상당히 큰 업데이트였다.

이와 함께 실리콘밸리 개발팀 중 최정예를 모아놓고 안드로이드 1.0을 위한 유닉스 형태의 커널 개발작업도 시작되었다. 유닉스의 방대한 기능 중에 개인에게 필요 없는 기능은 과감하게 삭제해 최대의 성능을 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찬수가 이끄는 한국의 로데오 팀도 곧 업무를 시작한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게다가 케텔로부터 인수한 서버의 이전 작업도 진행 중이었고, IBM에서 주문한 신형 서버도 들어올 예정이라서 로데오 팀이 입주한 건물은 아직도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이렇게 조직이 착착 갖춰지고 있지만, 유재원은 아직 코딩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

ID 테크놀로지의 인지도가 크게 오른 만큼 회사에 좋은 인재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긴 해도, 유재원과 같은 프로그래밍 실력을 갖춘 이는 아직 없었던 탓이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거대한 개발팀 여럿을 동시에 운영하는 체계가 완전히 잡힐 때까지 유재원의 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 몇 가지가 결정되었다. 교육청의 뺑뺑이가 돌면서 유재원이 진학할 중학교가 선정된 것이다.

여주중학교다.

무난하기가 그지없는 학교의 이름처럼, 여주 시내에 있는 남자 중학교였다. 한 반에 50명씩 8개 반을 운영하니, 총학생 수가 1,200명에 이르는 커다란 학교였다.

이렇게 규모가 큰 덕분에 유재원의 친구인 주민이나 영식이도 같은 학교로 가게 되었다. 다만 여자 중학교로 진학하는 된 수경이나 은혜는 유재원과 떨어지게 되어서 무척이나 속상해했다.

뭐, 보통 국민학교 친구들이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이렇게 학교가 갈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건 예로부터 증명된 진리였으니 말이다.

-학교 끝나면 우리 사무실로 오면 되지. 평일에는 오후 6시까지는 거기서 있다가 올 거니까.

이대로 교우관계가 끝나는 거 아니냐며 훌쩍이는 여자애들에게 유재원은 시원하게 말했다.

유재원은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여주 사무실을 본인의 아지트로 삼을 계획이었다. 자신에게 컴퓨터를 계속 배우고 싶은 친구들은 거기로 와서 배우면 된다. 놀 때도 같이 놀고 말이다.

친구 중에 눈여겨보는 녀석은 둘이다. 하나는 영식이였는데, 놀랍게도 프로그래밍에 능했다. 다른 한 명은 수경이였다. 밥만 먹고 키보드 워리어만 했던 모양인지 워드프로세서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눈썰미도 좋아서 출력된 유인물을 보고, 그걸 그대로 ID 워드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다.

국가공인 워드프로세서 자격이 생긴다면 수경이는 한 방에 1급을 딸 거 같다.

“코딩도 아니고, 이거 뭐하는 건지 모르겠네.”

ID 워드를 띄워놓고 한창 키보드를 치던 유재원이 푸념을 올렸다. 대통령이 직접 부탁한 그 문서를 열심히 만드는 중이었다.

원래 유재원이 생각하고 있던 스케줄은 2월 말쯤에 보내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정치 야합인 3당 합당이 원래 대로 1월 22일 터지면서 나라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졌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정신이 없을 테니, 보고서 작성은 뒷순위로 밀렸다. 그런데 며칠 전 언제 보내줄 거냐는 청와대의 독촉 전화를 받고 나서 열심히 작성 중이다.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이 있으면, 수경이나 다른 사람 시켜야지.”

장담 못 할 다짐을 하는 재원이다, 그래도 입을 놀지만, 손가락은 쉬지 않았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완성이다.”

문서의 제목은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였다.

완성된 문서는 ID 워드 파일의 형태 그대로 정보고속도로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는 ISDN을 통해 청와대 부속실로 순식간에 전송이 완료되었다.

청와대와 덕진리의 거리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폭발적인 이벤트 열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선착순 100명 달성이 순식간에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일단 100위까지는 3장씩 보내드렸고요, 뒤늦게 참가하신 분을 위해서 100위 밖에서부터는 좀 희박한 확률이지만 랜덤으로 딱지를 보내드렸습니다~!

받은 딱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마이페이지에서 선물함 관리에 가보시면 나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럼, 주말 즐겁게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