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6-1
고풍스러운 서재에서 사람을 위한 물건은 책상과 의자가 딱 한 세트뿐이었다.
서재의 넓이는 학교 교실만큼 넓었지만, 가득 차 보일 만큼 커다란 책장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다. 비싼 돈을 들여 설치한 습도 조절기와 냉난방 설비는 사람이 아닌 책의 기준이었다.
그야말로 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책상의 위치가 서재의 중심이었고, 책장들의 배치도 중심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덕분에 이 서재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향해 시선이 집중되는 구조였다.
그것이 평소의 분위기였는데,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달랐다. 딱 한사람만을 위한 책상의 맞은 편에 화려하진 않아도 제법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빈 의자와 맞은편, 서재의 주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비어있지 않았다.
40대 중반의 남자가 눈을 감은 상태로 편히 앉아 있다. 그가 바로 일성 그룹의 새로운 신임 회장 최현희였다.
회장에 오른 지 1년 조금 지났으니 신임이라는 단어는 떼어도 무방했지만, 전임자의 존재감이 워낙 큰 탓에 아직도 신임 회장이라는 수식어는 따라다니는 상태다.
똑똑똑.
-회장님, 이혁재입니다.
“들어 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최현희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낮잠을 즐겼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념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라 반응이 즉각적다.
눈을 뜬 최현희는 서재로 들어온 이혁재의 표정을 보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았다. 둘이서 함께 손발을 맞춰 온 게 벌써 20년째다.
척하면 딱 답이 나오는 게 둘의 관계였다.
“무슨 일인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들어보려고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ID 테크놀로지에서 회장님과 유재원이의 미팅을 뒤로 미뤄야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유는?”
“그쪽의 최강욱이란 사람이 말하는 명분은 대통령이 엑스포에 관해 특별히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돕기 위해 지금은 오명 유치위원장과 이야기 중인데, 그게 좀 길어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알아보니 지금 유재원이는 여의도에 있긴 합니다.”
“유치위원회 본부도 여의도에 있지?”
“네. 하지만 조직이 제대로 작동되는 상태는 아닙니다.”
“흠. 우리가 재원이라는 녀석에게 까였구만.”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최현희다.
보통의 능력으로 이 서재의 주인은 절대 되지 못한다. 최 씨 집안의 순수혈통을 타고 난 사람 중에 남들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있어야 이 자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일성 그룹을 거느리고 있는 최 씨 집안에는 후계자만 넷이나 있었다. 그중에서 최현희는 가장 순위가 낮은 막내아들이었다. 그런데도 형들을 제치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가진 뛰어난 감각 때문이다.
남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반도체 산업에 거침없이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막대한 수익을 뽑아내고 있다.
이처럼 몇 수 앞을 보는 뛰어난 그의 감각은 이번 유재원의 미팅 변경이 단순한 선약 때문은 아니라는 걸 바로 포착했다.
“다음 약속은 잡았나?”
“아, 아닙니다. 회장님과의 약속을 쉽게 깬 저들이 괘씸해서 나중에 보자고만 했습니다.”
“거봐. 자네가 저들의 수에 놀아난 거야. 구체적인 날짜를 잡자고 해보면 차일피일 미루겠지.”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깜짝 놀란 이혁재가 질문을 던지고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는 답을 하는 사람이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던 탓이다.
“글쎄.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재원이에게 밉보이는 게 있었겠지.”
역시 날카로운 최현희 회장이다.
“말도 안 됩니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우릴 밉보다니요. 당장 그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습니다.”
“무슨 수로?”
“예? 평소 하던 대로 불러다 타이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다.”
“하아, 자네. 언제 철이 들 건가? 한량 시절은 끝났네. 일성의 총비서라는 자각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게다가 그 녀석 뒤에 미국이 있는 거 모르나. 야당 감시하느라 정신없는 안기부는 아직도 모르는 눈치지만, 그 녀석에게 접근하던 벌레를 미국이 세 번이나 막아줬다네.”
“미, 미국입니까?”
“그래. 에드윈 풀러가 직접 말해준 거네.”
“에드윈 풀러?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옛날처럼 경거망동 말게. 유재원 건은 내가 알아서 하지. 나갈 때, 저 빈 의자나 치우게.”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이혁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빈 의자를 들고 서재를 나섰다. 최 회장의 전용 의자보단 가벼웠지만, 그래도 20kg는 나가는 것이라 얼굴에 인상이 잔뜩 올라오는 이혁재였다.
“고얀 놈.”
다시 혼자가 된 최현희의 입에서 고약하다는 소리가 났다. 이혁재에겐 대범한 척 했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유재원을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내진 않았다.
어째서 ID 테크놀로지가 자신과 일성에 푸대접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차차 알아나가면 된다. 어차피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일성의 영향력을 벗어나진 못할 테니 말이다.
다만 꼬마 녀석 하나를 멋대로 부를 수 없는 현재 일성의 위치에 대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국에선 대통령은 물론 미래와 대호에 밀려 겨우 3등이나 하는 상태였고, 세계로 나가면 성적표는 더욱 초라해진다.
그렇기에 유재원과 만나서 미국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이야기나, 재판에서 어떻게 승리를 끌어냈는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다국적 기업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일성이지만, 두 가지 모두 아직 달성하지 못했던 과실이었다.
미국에서 일성의 가전제품은 값이 싸서 사는 것이지, 선망하며 사는 제품은 아니었다. 그나마 메모리 반도체는 컴퓨터 산업의 발달 덕에 구매하려는 바이어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생산을 위한 장비는 죄다 수입품이었다.
재판도 마찬가지다.
기업 간 특허소송부터, 제품을 사용하던 고객의 부주의 때문에 생긴 사고지만 제품 문제로 몰아서 걸린 배상소송까지 다양하게 걸린 상태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할 승전보는 없었다. 그저 쓸데없이 변호사비만 잔뜩 물고 있었다.
유재원의 행보가 돌파구였다.
신생 기업 ID 테크놀로지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결정적 증거도 증거였지만, ID 테크놀로지가 만든 소프트웨어의 품질이 최고였기 때문이라는 최현희의 분석이었다.
일성의 미국 지사장 보고로는 MS-DOS는 이제 구식이 되었고, 안드로이드 알파라는 게 대세라고 했다. 성능도 그렇고, 비호감으로 전락해버린 탓에 소비자들이 찾지 않는다고 한다. 대량의 재고가 있는 거대 컴퓨터 제조사 말고는 MS-DOS를 탑재한 제품을 내놓지 않고 있으니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품질이 허접했으면 안드로이드 알파를 썼을까?”
아니다.
소비자들은 자기 이익에 민감했다. MS-DOS가 불의하더라도 성능이 압도적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는 판단이다. 그렇기에 최현희의 뇌리에 일성의 제품 수준이 최고가 된다면 ID 테크놀로지의 전례를 따라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최고만 살아남는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최고가 될까?
“평소대로 하면, 평범한 물건만 나오는 거지."
기존의 생산 방식으로 계속 제품을 만들어 봐야, 똑같은 수준의 제품이 나온다. 엄청난 불량률도 그대로일 것이다. 제품의 설계나 디자인, 심지어 생산설비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 그리고 과거의 관습에 연연하는 머리가 굳은 임원들까지.
"다 바꿔야 해.”
최현희 회장은 이 모든 것들을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생각을 정리했을 거다. 하지만 최현희 회장은 달랐다.
“어떻게 바꿀지가 관건인데…….”
바꿔야 한다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바꾸자고 하는 것에서 더 심층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사안인지라 훨씬 어려웠다.
고민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유재원과 미팅이 취소되면서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기에, 방해받지 않고 이 고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답은 천재로군.”
한참을 생각한 최현희의 결론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해답도 ID 테크놀로지가 이미 보여줬다. 최고의 제품은 역시나 최고의 천재가 만드는 법이라는 진리였다.
작년만 하더라도 유재원의 실력을 의심했지만, 이젠 아니다.
유재원은 천재가 맞다. 한국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가 인정한 세기의 천재다. 그런 녀석이 만든 제품이었기에,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계를 석권했으니, 귀한 달러 돈을 갈퀴로 긁어올 수 있었다.
법인세로 145억을 신고했다고 하니, 작년엔 7, 800억 원을 벌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작년의 매출액을 보면 올해 성적도 예상할 수 있지만, ID 테크놀로지만큼은 예외다. 얼마만큼 성장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89년 성적을 초월하는 결과가 나올 거다. 동시에 이와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수십만 명을 혼자서 먹여 살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최현희의 눈이 번뜩 뜨였다.
“100만 명을 먹여 살릴 천재.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천재.”
일성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세기의 천재다.
유재원과 같은 세계적인 천재를 보유했다면 정말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천재가 길가에 널린 것도 아니니 쉽게 구할 수는 없다. 100만, 천만을 혼자 먹여 살리는 천재는 하나뿐일 테지만,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천재는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런 천재들을 모은다면 세계 일류로 도약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이고, 이 누추한 곳에 왕림해주셔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용권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유재원을 보고, 과장된 인사를 날렸다. 마음 같아선 유재원을 업고 사방을 뛰어다니고 싶을 지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보컴퓨터가 에그 PC의 생산을 시작하고부터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바이어를 찾아가던 영업 방식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찾아오는 바이어가 하도 많아서 찾아가지 않아도 물건은 잘만 나갔다.
열심히 만든 제품인데, 하도 팔리지 않아서 눈물을 머금고 염가로 팔았던 일도 이젠 거의 없다. 예전에 만들어 놓은 재고나 작년에 계약한 구식 물량 말고는 염가 판매는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쏟아지는 에그 PC의 주문을 소화하는 것도 벅차서 일반 PC의 제조는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그렇게 중요한지 왜 몰랐을까?”
에그 PC와 삼보 컴퓨터가 만든 최고급 PC의 스펙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에그 PC가 확장성은 부족했다. 하지만 판매량으로 보면 에그 PC의 지분은 압도적이었다.
이제 생산능력이 본궤도에 올라서 월 5, 6만 대 수준의 에그 PC를 만드는 중인데도, 올여름까지는 예약이 밀렸다. 그런데 예약 물량을 다 소화하기 전에 또, 주문이 들어오고 있으니 올해는 생산량이 곧 판매량이 되는 믿지 못할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기존의 컴퓨터와 에그 PC의 차이점은 단 하나. 디자인이었다.
“컴퓨터라는 게 다 고만고만한 모양이었으니, 고정 관념이 생긴 거예요. 다른 형태의 컴퓨터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시도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상태였죠. 그런데 좀 많이 바빠 보이네요?”
이용권 부사장에게 유재원의 말은 한마디로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기는커녕 어여쁘게만 보였다.
“응? 제2 공장을 만드는 중인데, 내가 총책임자라서 그래. 좀 바쁘긴 해도 제2 공장이 완성되면 월 10만 대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주요 부품 수급이 문제 없다는 전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생산량이 곧 판매량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고도 바이어들이 주문한 숫자를 맞출 수가 없어서 새로운 공장을 만드는 중이다.
컴퓨터를 조립하는 일은 엄청난 설비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단지 투명 케이스의 주요 재료인 폴리카보네이트를 만드는 공정이 좀 위험하고 까다롭긴 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제까지 삼보컴퓨터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던 컴퓨터 부품 업체들의 태도 변화였다.
컴퓨터 업계의 가장 큰 갑이었던 인텔도 달라졌을 정도다. 예전엔 486을 주문해도 배송을 받기까지 한참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 신규 주문을 넣으니 예전엔 받을 수 없었던 대량구매 할인까지 받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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