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23화 (123/1,007)

[123]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5-2

“집마다 컴퓨터가 있고, 여기에 데이터 전용 고속 통신망이 연결된 상태를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통신망에 은행의 전산망이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요? 은행 창구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송금과 세금, 전기나 수도 요금 등을 편하게 낼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금융 거래도 활발해지겠죠?”

인터넷 뱅킹의 편리성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뱅킹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모바일과 결합하면 핀테크 시대가 열리는 거다.

“증권사의 전산망과도 연결할 수 있어요. 그러면 여유 자금이 있는 개인도 집에서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기업은 자금조달이 훨씬 쉬워지고, 개인은 주식 투자를 통해 부를 늘려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지점을 찾지 않을 테니 은행과 증권사가 망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지점에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도 많잖아요. 오히려 전산망을 유지하고, 저마다 독특한 서비스를 만들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고용도 창출하고, 회사의 매출도 상승하는 것이죠. 이렇게 경쟁력이 향상되면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통할 수준으로 성장하는 거고요.”

인터넷 때문에 고용이 좀 줄어들긴 해도, 그에 몇 배가 되는 신규 산업이 생겨나면서 일자리가 늘어난다.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건 한참 후에 나올 4차 산업이 치명타였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치는 꼴로 저렴한 가격의 범용 일꾼 로봇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난리가 난다.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고 있고, 음악 서비스도 할 수 있겠네요. 특히 주문형 비디오의 경우 과목과 수준별로 다양한 강좌를 만들어 놓으면 학부모님이나 수험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KBS 3TV에서 나오는 건 정해진 시간에 딱 한 번 볼 수 있는 거고, 공부 수준도 보편적이라서  학생마다 다른 학습 수준을 다 충족하진 못하잖아요.”

고속 통신망을 통해 할 수 있는 유료 서비스는 수도 없이 많았다.

유재원은 그중에서 지극히 일부만 말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원 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안개처럼 흐릿했던 미래가 선명히 보이는 것 같구먼. 혹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한 적이 있나?”

“없어요.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다가 대통령 각하께 처음 꺼내는 거예요.”

유재원의 말에 노 대통령은 더욱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이런 비전을 구체적인 보고서로 담아서 보내줄 수 있겠나? 신년사는 이미 발표했지만, 조만간 있을 국회 시정연설에서 이 내용을 꼭 발표하고 싶네.”

시정연설?

살짝 고민이 되는 유재원이다.

이번 건은 대통령의 생색내기를 위해 대충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세기의 화두였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잘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껴봐야 쓰레기가 된다. 실제 예산 집행은 거의 없을 생색내기일 테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나서서 데이터 통신망에 대해 연설하고 비전을 보여주면, 그만큼 디지털 혁명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디지털 혁명의 순도가 높아질 만큼 ID 테크놀로지의 이익과도 직결되니,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다만 예정에도 없는 연구 과제를 떠안게 된 게 귀찮았다.

그런데 시점이 좀 애매했다.

조만간 있을 국회 시정연설이라니?

오늘 아침,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서 확인했던 90년 1월의 타임라인에는 시정 연설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나라 전체를 혼돈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거대한 정치 이벤트가 막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바로 3당 합당이다.

민정, 통일, 공화당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한 여당이 만들어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정계 개편이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의 국회 지형을 밀실 야합을 통해 여대야소로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유재원도 이번 사건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3당 합당이 되면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을 텐데, 시정 연설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당장 이번 달이나, 다음 달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에 발표하긴 할 것 같았다.

유재원은 그렇게 청와대에서 두 번째 미팅을 잘 끝냈다. 이번에도 다행히 삥을 뜯기는 건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청와대를 벗어날 때는 아쉬운 마음도 살짝 일어났다.

혹시나 하고 기다려 봤는데 국적 문제라던가, 소련이나 중국의 정보원 이야기는 단 마디도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핸디캡은 상상했던 범위 안이었기에 마음을 쓰진 않았다.

“다음은 일정은 오명 조직위원장과의 면담입니다.”

“네, 바로 가죠.”

청와대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은 유재원은 행사가 잔뜩 밀려 있는 연예인처럼 바쁘게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오명 위원장은 작년에 내각에서 나오긴 했지만, 엑스포 유치 위원장으로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덕분에 위원회에 지원도 넉넉해서 사무실도 여의도에 크고 화려하게 개업했다.

이동하는 동안 유재원은 엑스포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아마 지금 오명 위원장은 유치가 쉽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안팎으로 어려움이 그대로 있는 상태다.

난이도를 따진다면 88 올림픽 유치 정도라고 할까?

정부의 계획은 91년 개최인데, 대규모 엑스포를 위한 예산 배정에 야당의 반대는 당연했고, 여당 일각에서도 반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3당 합당 이후엔 강력해진 여당으로 거듭나니 야당의 목소리가 좀 약해질 테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기류는 여전했다.

그나마 대통령이 밀어주니 위원회 활동은 원활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무조건 반대에서 약간 선회하기도 했다. 최근 반대 측에서 내놓은 조건은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물론 반대측이 선심을 써준 건 아니다. 그들이 봤을 때 불가능한 미션을 내준 것 뿐이다.

지금 국제박람회기구는 엑스포 개최와 관련해서 1999년까지 공인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박람회 준비를 위한 자금은 개최하는 나라에서만 내는 게 아니라, 국제박람회기구에 참석한 나라들도 예산을 들여가며 전시관을 꾸리는 형태다. 날이 갈수록 크고 화려해지니 들어가는 돈이 막심한데, 돈을 쓴만큼 선전 효과가 나는 것 같진 않았다.

국제박람회기구에서 가장 큰 손은 역시나 미국이었다. 그런데 현재 미국의 경제 상태는 찬란한 80년대의 황금기가 끝나서 서서히 위축되는 상태였다. IT 붐이 일어나는 90년대 중반까지는 혹독한 겨울이다. 씀씀이가 줄어드니 대규모 박람회 개최에는 무척 부정적이다.

“재원 군,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나?”

막 만난 오명 전 장관은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마음고생이 무척이나 심했던 모양인지, 마지막 보았던 작년 여름에 비해서 핼쑥한 상태였다. 주름도 몇 개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맡게 된 엑스포유치 조직위원장의 역할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쉽게 목표를 이룰 거로 생각했다. 오명 위원장뿐만이 아니라 그 자릴 두고 경쟁하던 이들도 그랬다.

막상 자리에 앉고 나서 일을 진행해 보니 웬걸. 너무도 어려웠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파열음이 나왔고, 대통령이 나선 후에야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아 오라는 타협안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국제박람회기구 의장국이나 주요 회원국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99년도까지 공인을 해줄 생각이 없는 거 아닌가.

눈앞이 깜깜해지는 오명이었다.

기술관료로 체신부의 장관까지 했고, 영전의 형태로 엑스포위원장이 되었다. 엑스포 유치에 성공한 후에 국회의원, 혹은 총리와 같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설 욕심이 있었는데, 다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유재원에게 오명은 확실한 우군이다. 오명이 잘 될수록 자신이 받는 서포트의 질도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란 엄청나게 특별한 건 아니다. 애초에 원래의 역사에서 오명 유치위원장은 스스로 힘으로 엑스포 인증을 받았다.

그 방법을 조금 일찍 알려주는 것뿐이다.

“중요한 건 예산입니다. 이제까지 엑스포들이 워낙 막대한 돈이 들어서 국제박람회기구 회원들이 어려워했거든요. 우리는 저예산으로도 엑스포를 치를 수 있다고 어필하는 겁니다.”

“저예산? 그러면 선진국 증명을 위해 치르는 행사인데 초라하게 치를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배부른 소리를 하는 오명 위원장이다.

저예산 키워드는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큰 압박을 받는 시점에서나 나왔던 모양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유치한 다음 대기업들에 적당한 당근을 제시하고 협력을 요구해 전시관을 지어 올리면 직접 투자되는 예산을 절약하면서도 규모는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오, 그렇구나.”

본인이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면서, 기업들에 돈을 뜯자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유재원이다. 그렇지만 기술관료인 오명까지도 거대한 국가적 행사를 위해서라면 대기업도 당연히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포 장소는 선정하셨어요?”

유재원의 물음에 오명 위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타협안이 나온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국회에 막혀서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하지만 장소 선정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

서울의 과밀화는 피해야 하니 지방 도시로 선정해야 할 텐데, 지방 도시는 국가적인 거대한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뭐든 다 할 태세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시 선정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밀려드는 청탁 때문에 귀찮을 지경이다.

“그러면 대전을 추천해 드릴게요.”

“대전?”

“네, 최근 대전에 있던 공군기지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잖아요. 긴 활주로를 남기고요. 그 활주로부지를 사용해서 예산을 절약할 거라고 하면 좋은 반응이 올 거 같아요. 다만 91년도 유치는 너무 빠르니까. 92년 아니면 93년 유치를 목표로 하시는 게 좋아요.”

“92년은 몰라도 93년은 무리인가 싶다.”

아슬하다는 건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를 말한다.

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한 목적은 대통령의 치적 때문인데 93년으로 미뤄지면, 퇴임 이후이니 대통령이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실제 개최 날짜는 93년 가을로 확정될 수밖에 없을 거다.

날짜가 뒤로 밀리면 유치위원장은 위로 불려가서 싫은 소리를 몇 번이고 들어야겠지만, 뭐 다른 방법은 없다.

“조언 고맙네. 하도 막막해서 공사가 다망한 재원 군에게 폐를 끼쳤군. 자네의 조언은 다음 출장 때 꼭 사용해보겠네.”

오명 위원장의 입장에서 93년까지 미룬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유재원이 제시한 방법들은 분명 효과가 확실히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헤헤, 분명 잘 될 거예요. 엑스포가 유치되면 제가 경영하는 ID 테크놀로지로 사상 최대의 부스, 아니 전시관을 만들어서 참가할게요. 대신 제일 좋은 자리는 제가 예약한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조언을 준 김에 실리도 확실히 챙긴 유재원은 오명 위원장과의 미팅을 종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치위원회 사무실을 나섰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다음은 일성 그룹 최 회장입니다.”

유재원의 인기를 말해주듯 하루에 스케줄이 3개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성북동쪽으로 가는 도로를 타기 위해 북쪽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음, 잠깐만요.”

그러다 문뜩, 멍하니 창밖을 보던 유재원은 마음에 변덕이 들었다.

그것은 지금과 비슷했던 전생의 기억 때문이다. 일성의 회장이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지금의 모습은 전생에도 있었다. 전명헌 회장님이라면 비즈니스적 관계보다는 한 단계 위로 친밀한 사이였으니 갔을 텐데, 일성의 회장님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생에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는 일성도 강력한 연관이 있었다.

크나큰 대가를 지급한 다음에도 어렵게 시작한 두 번째 생인데, 전생의 관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 돌려주세요. 삼보로 가죠.”

지금 아쉬운 건 본인이 아니라, 저쪽 일성이다. 튕겨 보면 반응이 올 거다. 차라리 가까운 삼보 컴퓨터에 가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마음도 편했다.

유재원의 그랜저 자동차는 매끄럽게 유턴했고, 일말의 미련도 없이 속도를 올렸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겁이 없어진 재원이가 마이웨이를 시작했네요~.

과연 한국에서 일성을 쌩까고 사업을 잘할 수 있을 것인가!!

아 그리고, 독자 님의 성원 덕에 이벤트에 당첨되었네요.

모든 영광은 독자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편에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님께 딱지를 3장씩 나눠드리겠습니다.

마감은 2018년 1월 12일 23시 59분까지인데, 선착순 100명이에요! 당연히 중복 응모도 안 되고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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