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5-1
다음날.
유재원은 아침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했다.
멍했던 정신이 차가운 물에 번쩍 돌아왔다. 어찌나 차가운지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런 분노를 이용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만큼 이번 청와대행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실 인제 와서 고백하자면 유재원은 청와대의 힘을 조금 과소평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 대통령의 별명은 물태우라고 알려졌기도 했고, 전생에 이 시기의 유재원은 놀기 바빠서 정치권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체감하지 못했다.
회귀를 위한 거래 후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했을 때는 한참이 지난 후라서 서적이나 논문, 신문 정도로 간접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를 이끈 인물답게, 뭐 하나 결정을 내리면 추진력이 대단했다.
청와대로 가는 길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럼, 청와대로 모시겠습니다.”
“네, 잘 부탁합니다.”
유재원의 그랜저 자가용은 언제나 김대석이 운전했지만, 오늘은 예외다. 청와대 경호처에서 사람이 나와서 운전을 맡게 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달랑 운전 특기 경호원 하나만 보내주진 않았다. 앞뒤로 붙는 경호 차량도 있고, 경찰의 오토바이도 붙었다. 심지어 교통신호 통제해줄 거라고 했다.
뭐지 싶은 유재원이다.
일개 사업가에게 해주기엔 너무도 과한 의전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미국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게 대통령 귀에 들어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면 국내에서 소련과 중공의 정보부 요원들이 유재원에게 접근하려다 미국에 의해 차단되었다는 게 이제야 보고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부산스럽게 의전을 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 이게 아닐 수도 있지.’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으로 2억 달러 벌었다고 생각해서, 그 공을 치하해주는 거다.
외국에서 좀 인정받았다고 하면,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는 게 80~90년대의 시대상이었다. 70년대에는 해외 음악회에서 수상했다고, 카퍼레이드했던 기록이 비디오 클립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사열용 오픈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도는데, 도로 주변으로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하고, 건물 옥상에선 색종이를 뿌리는 전형적인 행사였다.
유재원은 그런 면에서 독보적이었다.
작은 나라도 아니고, 무려 미국에서 완벽히 인정받았다. ID 테크놀로지가 발표한 모든 소프트웨어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큰 판매량을 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판매된 대금은 모두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의 수출 우선 정책은 70년대부터 시작한 전통이었다. 심지어 21세기에도 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내수 시장에 집중하기보다는 수출에 목을 매는 게 한국 경제 구조의 특징이었다. 아마 수출을 강조하는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에게 유재원은 효자처럼 보일 거다.
원재료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파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아이디어만으로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으니 말이다.
“설마 퍼레이드를 하진 않겠지.”
유재원은 뭐가 기다리고 있든, 그냥 체념한 상태다.
그나마 긍정적인 건 청와대의 융숭한 대접이 의미하는 건 자신의 몸값이 올랐다는 의미라는 거다. 데이콤 지분을 염가에 산다거나, 이런저런 혜택을 받는 거로 딴죽을 걸 사람은 없을 거 같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있겠다는 건 아니다.
군부 정권은 노태우 대통령으로 끝난다. 노태우 다음으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거다. 3당 합당으로 인해서 정권교체가 되었다는 말을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온전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권교체와 거의 맞먹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다음 정권에서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 미리 선을 대놓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음, DJ까지 해놓는 게 좋겠지.’
DJ 이후로는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오게 된다.
유재원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정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정권이 ID 그룹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시나.
청와대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서울에 진입할 때부터 방송의 취재 차량이 붙기 시작하더니, 청와대 입구에는 진을 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여기 좀 봐달라느니, 손을 좀 들어 달라느니 하는 말도 여기저기서 터졌다.
심지어 노 대통령이 영빈관 입구에 나와서 유재원을 맞이했다.
“대통령 각하의 융숭한 환영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각하라니. 전처럼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때는 5학년이었다.
어린 티가 다분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쑥쑥 자라서 젖살은 거의 다 빠진 상태다. 집에 가서 키를 재보니 벌써 165cm가 되었다. 이대로만 자란다면 170도 넘고, 180까지 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여튼, 지금 모습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졌으니, 마냥 어리광을 부리면 징그러워 보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어른이 된 척 의젓하게 나오는 게 호감을 살 거라는 판단이었고, 적중했다.
청와대가 유재원을 맞이하는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심지어 방명록까지 정식으로 썼을 정도다. 이런 모습을 청와대 사진사들과 매스컴 기자들이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저녁 9시 뉴스가 땡하고 시작하면 무슨 화면이 나올지 바로 상상이 될 정도다.
이렇게 준비된 몇 가지 공식 행사를 마치고서야, 유재원은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대통령과 둘이서 먹는 건 아니었고,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과 함께 먹는 식사였다.
그 자리에서 유재원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또 해야 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유재원은 재탕에 3탕도 하고, 이젠 4번째지만 듣는 사람은 처음 듣는 거라서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단지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야 하는 유재원이 지루할 뿐이다. 그래도 여러 번 썰을 푼 덕에 어느 대목이 흥미가 있고, 어떤 건 재미가 없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완급 조절을 기가 막히게 했다.
특히 재판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제임스 어거스틴과 어떻게 접촉하게 된 대목이나 시큐리티 챌린지와 연관된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물론 판사가 2억 달러 배상 판결을 내리는 순간이 제일 하이라이트이긴 했다.
“그런데 아직 입금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
“네. 1심이라서 강제력이 없대요. 마이크로소프트 측도 항소했고요. 그래서 저희도 빨리 돈을 받으려고 같이 항소를 신청했어요. 마이크로소프트의 행태가 괘씸하니 항소에서 벌금의 규모를 더 키울 작정이에요.”
유재원의 말에 노 대통령과 장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다. 투자은행 설립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 결과를 예상하고 신청했던 것이냐?”
이게 무슨 소리야?
알고 봤더니,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자금에 대해 청와대가 좀 오해하는 게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받은 배상금 2억 달러를 밑천 삼아서 설립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ID 인베스트먼트는 테크놀로지의 일부 수익금과 일가친척들, 그리고 지인분들이 투자해주신 돈을 기반으로 설립된 투자회사입니다. 2억 달러를 받게 되면 그 돈도 투자나 연구에 사용될 테지만, 지금은 3천만 달러 정도입니다.”
여름쯤에는 7천만 달러가 더해져서 총 1억 달러가 투자될 테지만, 당장 ID 인베스트먼트로 배정된 투자금은 겨우 3천만 달러뿐이다.
“3천만 달러나?”
유재원에겐 겨우 3천만 달러인데, 여기 있는 분들에겐 3천만 달러씩이나! 하는 티가 팍팍 풍겼다.
그래서일까.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이렇게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상품의 수익률은 영업 비밀이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힘만 쓰면 다 알 수 있는 양반들이이다.
기왕 점수를 딸 거 시원스레 때는 게 좋다는 생각에 유재원은 출시 중인 소프트웨어의 마진을 적당한 근삿값으로 계산해 주었다.
“120달러짜리 ID 오피스 하나를 예로 들어 보면, 세금과 생산 비용, 유통 비용을 다 때고나면 7~80달러쯤 남아요. 이런 ID 오피스를 지금까지 36만 장 정도를 팔았어요. 이것 말고도 울펜슈타인이라는 게임도 잘 팔고 있고요.”
“진짜로?”
“네! 우리 회사가 이번에 신고한 법인세가 145억 원이에요.”
유재원의 말에 다들 입이 떡 벌어지신다.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꼭 ID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가 필요한 건가? 돈이 잘 벌린다고 이것저것 벌리다가 한순간 무너지는 기업을 많이 보았네만.”
노 대통령은 걱정이 조금 깃든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염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를 일일이 챙길 생각은 없습니다. 월 스트리트 출신의 유능한 분을 스카우트 해서 투자를 맡길 예정입니다.”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빈센트 그린힐이 있다. 그리고 조만간 그린힐은 본인의 인맥을 활용해서 유능한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 등을 모아서 제대로 된 팀을 꾸리게 될 거다. 유재원은 방향만 찍어주고, 이들이 실무를 하는 것이다.
유재원은 대신 노태우 대통령이나 함께 자리한 장관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분들이 진짜로 알고 싶은 건 ID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도대체 어떤 투자를 하려는 건가 물어보는 거다. 유재원이 도깨비 방망이를 든 것처럼 돈을 쏟아내니 자신들도 따라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배포된 사업계획서에는 투자 방향에 대해 자세히 적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높으신 양반들이 보기에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보기 좋은 말만 적혔다고 생각했다. 진짜 비밀스러운 방향은 총책임자에게서 직접 듣는 거라고 인식이 박힌 양반들이다.
“이미 아실 테지만, 저희 ID 테크놀로지의 개발팀은 실리콘밸리에 있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콘밸리의 신화는 70년대 말부터 시작했다. 위명은 쟁쟁했기에 보통의 상식을 가진 이들은 그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다.
“덕분에 실리콘밸리의 근황에 관해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 입주한 여러 벤처기업은 이제껏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여러 신기술과 신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 빛을 보는 건 아니더라고요. 시장성이 부족하거나, 투자를 받지 못해서 사장되는 기술이 수도 없이 많아요.”
“그러면 거기에 ID 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하겠다는 것이냐?”
“네! 우리나라가 부족한 게 기초기술과 첨단기술 분야잖아요. 직접 개발하면 좋겠지만, 밖에서 돈을 주고 사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신문을 보면 기초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연구와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소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기업이나 정부는 당장 돈이 되는 것에 투자하지, 정작 중요한 기본기 개발에는 미적댄다.
그러니 유재원은 발상을 전환해서 아예 돈을 주고 필요한 기술을 사오자고 하는 것이다.
“옥석을 가리는 게 중요하겠군.”
맞다.
그게 핵심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제가 자신이 있는 정보통신 분야의 기업들을 먼저 투자하려고요.”
“정보통신?”
“네, 미국에서는 이미 디지털 혁명이 시작됐거든요. 컴퓨터로 만드는 자료가 종이책보다 많아졌어요. 그렇게 디지털 형식의 자료는 통신망을 통해 손실 없이 어디로든 보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가치가 만들어질 거 같아요. ID 오피스로 디지털 자료 생성의 일익을 담당했으니, 이렇게 만들어진 디지털 자료가 원활히 오갈 통로를 만드는 게 순서 아니겠어요?”
“아아. 그래서 케텔도 인수하고, 데이콤 지분도 사들이는 거냐?”
데이콤 지분 매각이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던 모양이다.
이에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체신부 장관 홍병도가 눈을 찡긋했다. 자기 공을 잊지 말라는 동작이다.
“맞습니다.”
유재원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중간에 하나 빠진 게 있으니, 석유 선물 투자였다.
석유 선물을 통해 투자금을 뻥튀기한 다음에, 넉넉해진 자금을 통해 기업과 특허 사냥을 시작하는 것이 유재원의 계획이다.
운이 정말 좋다면 마이크로소프트도 인수하고 말이다.
설명을 들은 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아니, 일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과학기술처 장관의 정례 보고보다 훨씬 선명한 비전을 듣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유재원이 투자할 종목에 자신도 한 발 걸치겠다는 마음도 진해졌다. 직접 물어보기는 그렇고, 다른 선을 타면 그걸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한결 부드러워지는 노 대통령의 얼굴이다.
“음, 그런데 그렇게 비싼 돈을 뿌려 설치한 데이터 전용 통신선으로 대중이 사용할 서비스라는 게 있습니까? 혈세를 들여 통신선을 구축해봤자 특정 계층 말고는 효용이 없을 것 같은데요.”
질문을 던진 이는 과학기술처 장관 이상희였다.
과학기술처 장관이긴 해도 약대 전공이라서 정보통신 쪽은 취약했다. 게다가 유재원이 제시한 비전에 대통령의 신뢰감이 대폭 상승하는 걸 보고 경쟁심리가 발동한 티가 역력했다.
점잖게 방향만 제시하고 끝내려던 유재원이 발끈했다.
“장관님이 말씀하시는 건 논문 라이브러리를 칭하는 거죠?”
현재 인터넷의 위치는 학자들의 학술용 네트워크 수준이다. 그나마 미국은 FTP나 게시판을 통해서 학생과 일반인 사용자도 많이 늘었다.
“잠깐 생각을 해보시면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몸이 어려지다 보니, 쓸데없이 혈기도 왕성해져서 이렇게 표출한다. 특히 자기가 속한 IT 분야가 폄하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으로 가시기 전에 추천 한 방 부탁드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