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4-2
“어? 일성? 제가 아는 일성 맞아요?”
“예. 일성의 최현희 회장님이 사장님을 꼭 한 번 만나서 밥 한 끼 먹자고 했습니다.”
일성 그룹에 대놓고 욕을 한 적은 없는 유재원이다.
그렇지만 88년 수출기업인의 밤에서도 그렇고, 이번 금융법 개정안에서도 그렇고, 최현희에게 치명타를 많이 날렸다.
기업 지형을 따지면 그다지 겹치는 것도 없다. 기껏해야 ID 오피스 도입을 부탁할 정도? 그런데 일성 그룹은 기업 내부 문서처리에 자기들이 자체 개발한 훈민정음이라는 워드 프로세서를 한동안 썼다. 거의 90년대 중반까지 그랬다. 그러다가 버틸 수 없는 순간이 돼서야 오피스를 채용했다.
어째서 보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거 같다.
동그라미가 처진 것들은 주로 인터뷰였다.
KBS와 카메라를 동반한 특별 인터뷰도 있고, 3대 일간신문도 기본으로 잡혀 있다. 인터뷰 요청을 넣은 언론사들에게 뭘 물어볼 것인지 미리 물어본 모양인지, 짧게 메모가 되어 있다. 그런데 다들 비슷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분쟁과 재판 흐름 등을 자세히 알고 싶은 모양이다.
“개학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다 진행할게요.”
지금 유재원에게 남는 건 시간이다.
최강욱이 자신에게 제일 좋은 것만 추려서 스케줄을 짰을 테니, 최대한 성실히 수행하는 게 회사에 보탬이 될 거다.
“그나저나 케텔 인수는 어떻게 됐나요?”
“예. 실사는 끝났고 아직 이견이 남은 가격만 조율하면 도장을 찍으실 수 있습니다.”
최강욱이 서류철을 뒤져서 정리된 보고서를 내밀었다.
케텔이 보유한 재물과 여러 가지 데이터에 대한 가치 평가를 통해 총자산을 산출한 보고서였다.
“에? 제가 본 게 맞아요? 1억2천만 원? 이거밖에 안 돼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이값도 많이 쳐주고 있는 겁니다. 케텔의 시스템이 생각보다 좋은 게 아니더군요. 사용자 숫자도 부풀린 게 많습니다. 가입자가 10만 명이라는데, 한 달에 한 번 이상 접속한 사람은 1만 명이 넘지 못합니다.”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접속한 사람이 그 정도라니. 무엇보다 케텔의 서버로 쓰는 컴퓨터 성능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올림픽 때 사용한 IBM 시스템 중에 하나를 중고로 들여온 것인데, 싼 것만 찾다 보니 스펙이 제일 떨어졌다.
깐깐하게 계산하면 8천만 원도 안 된다. 하지만 케텔을 가진 한국경제신문사는 최소 본전을 원했다. 영 가격이 맞지 않으면 그냥 맨땅에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중간에 홍병도가 껴 있기에 그럴 순 없었다.
최강욱이 열심히 조율해서 나온 게 1억2천만 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홍병도 장관의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약간의 선물을 받아왔다.
“네? 데이콤 지분이라고요?”
데이콤의 정식명칭은 한국데이터통신으로 82년 3월 29일 설립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반 전화선이 아니라, 데이터 통신을 위한 기간망 건설이 주요 업무였다. ISDN 설치도 데이콤에서 주도하는 사업이다.
지금은 구리선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나중에는 광케이블을 깔게 되는데, 이를 통해 백본망을 이루는 것이다. 나중에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할 한국통신이나 하나로통신 같은 여러 사업체는 데이콤의 백본망을 빌려서 사업을 하는 거다. 나중에 자본이 축적되면 시골 마을까지 자체 선로를 깔기도 하는데, 중추적인 사업망은 여전히 백본망이다.
홍병도는 케텔을 비싸게 사야 한다는 최강욱의 푸념에 데이콤의 지분 일부를 저렴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얼마나요?”
“10%입니다. 여유가 있다면 30%까지 프리미엄 없이 취득 가능하답니다.”
한국데이터통신의 자본금은 538억 원으로 제법 덩치가 큰 기업이다. 여기서 10%라면 54억 약간 안되는 돈인데, ID 테크놀로지에 큰 부담은 아니다. IMF 때라면 헐값에 나올 테지만, 정보통신 산업이 막 시작되는 90년대 초에는 없어서 못 하는 주식이기도 했다.
홍병도의 생각도 뻔히 읽힌다.
데이콤 지분을 줄 테니, ISDN 가입자 확보까지 유재원보고 책임을 지라는 소리다. 가입자 숫자가 많아지면 자신의 공이 될 것이고, 가입자가 그다지 많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책임 소재가 떨어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방법이다. 또한, 데이콤을 통해 백본망을 깔 때, 돈도 보태라고 할 것 같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네요.”
조그만 PC 통신인 케텔에 덤이 데이콤 지분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30%를 다 인수하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 지분도 주식시장에 나오는 족족 인수해서 유선 통신망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면 한국의 인터넷 발전은 유재원의 생각대로 주도할 수 있다.
“당장 10%를 사고, 나머지 20%는 가을 이후에 사기로 하죠.”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다. 올여름까지 1억 달러를 석유에 투자하기로 했기에, 여유 자금은 그다지 없다.
울펜슈타인의 정산은 분기마다 하는 것이고, 안드로이드 알파도 100일마다 광고가 바뀐다. 그나마 매일 수익이 들어오는 건 ID 오피스인데, 시큐리티 챌린지가 끝난 다음 얼마나 팔리는지가 관건이다.
“저 없는 동안 수고 많으셨네요.”
보고를 다 들은 유재원은 만족감과 함께 고마움을 표시했다. 최강욱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마음 놓고 해외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다.
“사장님만 하겠습니까? 마이크로소프트와 재판에서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말도 못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서 해외에 나갈 때도 꼭 보필해드리겠습니다. 아참, 이것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고마움을 주고받으며 파장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최강욱이 다시 일감 하나를 꺼냈다.
뭔가 봤더니 1989년 실적 결산, 법인세 납부 영수증, 우선주 배당,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금 모집 등등.
회사 자금 변동에 관한 보고서였다.
실적이나 법인세 등등은 ID 톡을 통해 미국에서도 살펴봤던 것들이다. 1억1천8백만 달러에 달하는 매출액에서 이런저런 비용을 빼고 남은 순수익은 9천만 달러 조금 넘는 수준이다. 빡빡하게 계산하면 순수익이 더 많아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법인세를 많이 내야 한다.
불법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절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비용을 계산하고 나면 9천만 달러 정도가 나오고, 여기서 법인세가 정해진다.
법으로 정한 건 국방세 포함해서 30%나 되는데, 이런저런 명목의 공제를 다 동원하면 23~25% 수준으로 내려온다.
145억 원. 1989년 결산을 통해 ID 테크놀로지가 국가에 낼 법인세였다. 아직 입금이 덜 된 것도 있고, 회계적 절차가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입금대기 상태지만, 국가에 145억을 낼 거라고 확실히 신고했다.
“아, 내일 청와대 가서 자랑해도 되겠군요.”
“예, 우리처럼 1원 하나까지 법인세 산출에 보태는 기업은 또 없을 겁니다.”
ID 테크놀로지의 사회 공헌은 이뿐만이 아니다.
연말에 기부 활동도 활발히 했고, 직원들을 위해 의료보험은 물론 고용보험, 산재보험까지 다 들어주고 있었다.
험한 일은 별로 없는 ID 테크놀로지에 웬 산재보험이냐는 소리가 주변에서 나오긴 했는데, 3D 직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주의 패키지 생산 직원들은 산업용 인쇄기와 제본기를 다뤄야 해서 조금은 위험하다.
프로그래머들도 3D이긴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선망의 대상이지만 IT 시대로 진입하면 대표적인 고강도노동 직군이 된다.
“음? 배당금 처리가 의외네요?”
법인세 항목을 지나서 배당금 항목으로 넘어갔을 때, 나온 유재원의 물음이다.
89년도 결산을 통해 당기순이익은 457억 원을 찍었다. 여기서 우선주 배당으로 당기순이익의 1%인 4억5천7백만 원이 결정되었다. 88년도 배당금이 1억 원이었으니, 1년 만에 4.5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배당을 받아야 할 분들이 대부분 그 돈을 ID 인베스트먼트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재산은 넉넉하게 있다고 하시면서 수령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라리 은행보다 ID 인베스트먼트에 투자해보시라고 추천을 드렸습니다.”
“잘하셨어요.”
그분들의 성향은 유재원이 잘 안다.
계속 안 받겠다고 하셨으면 유재원이 더 곤란했을 거다. 그런데 수령 대신 투자를 선택한 덕에 돈 좀 받아가시라고 권해드릴 수고가 사라졌다. 그런데 나중에 투자금 정산 때, 어마어마한 수익률이 터진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걱정이다.
“마지막으로 이찬수 개발팀장의 미팅 신청이 있습니다.”
“아, 이찬수 씨요? 그런데 이게 진짜 마지막이죠?”
유재원의 물음에 최강욱은 씨익 미소를 보였다. 왠지 앞으로도 일이 또 엄청나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사장님, 완전히 존경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이찬수는 대뜸 존경한다는 말부터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일단 앉으세요.”
유재원의 입장에선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찬수의 입장에선 존경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첫 번째 감동 포인트는 ID 오피스의 소스코드였다.
이찬수는 사회에 나가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프로그래밍 수준을 높이기 위해 몇 년을 투자했었다. 서울대에 들어갈 정도로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자부하는 이찬수였지만,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배운 프로그래밍이었는데, ID 오피스의 소스코드를 보는 순간 그의 상식 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소스코드도 술술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종류의 감탄이었다.
이전까지는 소스코드에 들어 있는 함수의 기능 하나를 알기 위해서 열심히 머릴 굴려야 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코드를 봤을 땐, 한눈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ID 오피스는 달랐다.
함수마다 꼼꼼하게 달린 주석을 읽다 보면 난해했던 함수도 깔끔히 이해되었다. 게다가 ID 오피스의 그래픽 인터페이스 그림과 해당 기능을 실질적으로 구현한 함수를 매칭시켜 인쇄한 책자 형태의 소스코드는 프로그램의 전체적 구조를 이해하는 걸 더욱 쉽게 해줬다.
ID 오피스 개발에 이찬수는 알파벳 한 글자 공헌한 적도 없지만, 소스코드를 보고 나서는 함께 작업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적화 노하우도 압권이었습니다. 공유 메모리라는 개념이나, 파일 압축 기능도 처음 봤습니다. 게다가 어셈블리어를 사용해서 그렇게 깔끔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이찬수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사업하면서 얼굴이 두꺼워진 유재원이었기에, 코앞에서 자기 칭찬을 해도 부끄러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게다가 ID 오피스 제작에 들어간 소스코드는 전생에 피와 땀으로 배운 유재원 본인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당당 그 자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도 그렇게 완벽한 KO승을 거둘지도 몰랐고요.”
이찬수의 입에서 유재원의 업적이 끊이지 않았다.
유재원이 89년 이뤄낸 성과는 너무도 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루 종일 떠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이찬수가 학교에 가면 후배들이 썰 좀 풀어 달라고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정도다.
덕분에 유재원과의 나이 차이 때문에 쉽게 나오지 않았던 존대가 유재원을 보자마자 튀어나왔다. 작년 유재원이 스카우트했던 자리에선 어렵게 나온 존대가 지금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ID 오피스는 이찬수 팀장님 이끌 겁니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국의 실리콘밸리 개발팀은 안드로이드 1.0 완성을 위해 총동원 할 거라서요. 그러니 ID 오피스는 한국의 로데오 팀이 맡아야죠. 1.0이라는 뼈대가 만들어졌으니, 이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업그레이드 방향도 제가 다 알려드렸고요. 인력 충원은 이찬수 팀장님께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열심히 팀을 만들어 보세요.”
실리콘밸리 개발팀 안드로이드. 한국의 로데오 개발팀은 ID 오피스. 게임 개발과 글라이드 X 등 엔터테인먼트 개발 업무는 ID 소프트웨어로 집중한다.
중구난방 퍼져 있던 개발팀 교통정리를 위해 유재원이 생각한 방식이었다.
“실리콘밸리 팀에 속했던 ID 오피스 개발 인력 중에 한국 근무를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 로데오 팀으로 이동시켜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가 한국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네! 개발 능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이찬수의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보증이고 자시고,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라면 당연히 미국인이지 않겠는가. 그들과 원할한 소통을 하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선 영어를 사용해야 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이찬수였다.
그렇게 회사의 시급한 사안들을 일단 확인한 유재원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드디어 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공식 일정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행선지는 당연히 한국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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