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1-2
비록 회사 업무이긴 해도, 고성능 컴퓨터를 직접 만지는 건 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작년에 도입된 IBM의 메인프레임도 로저스에겐 낯선 시스템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전문가처럼 잘 다루는 경지에 올랐다.
“아뇨. 아직은 x86 서버들을 신뢰하긴 어렵잖아요. 이번에도 IBM의 메인프레임을 도입하죠. 게다가 DB2만큼 쓰기도 편하고 범용성도 좋은 데이터베이스도 없고요.”
“예!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에 IBM이 신형 메인프레임을 개발했다고 해요. 레밍턴이랑 로저스가 IBM으로 가서 한 번 보고 견적도 받아오세요. 아, 미국과 한국에 설치해야 하니 2세트를 구매하는 거예요.”
“두 대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도입에 예산은 얼마나 책정하는 겁니까?.”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제 마이크로소프트를 먹을 수 있을까 계산해본 덕에 현재 회사 잔고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유재원이다.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1억 달러가 넘는다.
“음. 일단 50만 달러? 그리고 여기에 추가로 50만 달러를 더 투자할 수 있고요. 써보고 좋으면 추가 도입도 할 수 있죠.”
서버는 다다익선이다.
메인프레임이 비싸긴 해도, 다중접속 시스템 중에 이만큼 안정적인 건 없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WWW가 나오기 전까지는 PC 통신은 대세가 될 거다. 가입자 숫자가 적어도 수백만 명 단위는 될 테니, 이 많은 유저들에게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메인프레임이 최고다.
운영체제와 오피스를 꽉 잡은 다음, 온라인과 인터넷 기업으로 거듭나는 게 ID 테크놀로지의 성장 계획이다.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로저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백만 달러를 메인프레임 구매에 쓰는 것도 엄청난 것이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추가로 도입할 수 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종종 대단위 투자가 이뤄지고 있긴 했지만, 이만한 투자는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IBM이 신형 메인프레임을 완성했다는 건 자신도 모르는 소식이었다. 그저 유재원이 대단하게만 보이는 로저스였다.
“아, 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줄 우리 배상금은 언제 입금되는 거예요?”
엘런에게 떨어진 질문이었다.
세금 떼고 해서 1억 달러가 좀 넘는 거금이다. 일찍 받아낼수록 조만간 일어날 선물시장의 큰 변동을 타고 훨씬 큰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
“음. 우리야 당장 오늘이라도 받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최종심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강제성이 크지 않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파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거 때문이죠? 그러면 최종심이 떨어지기 전에 가져올 방법이 없나요?”
아직 새로운 주식 시장이 시작하지 않았으니,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총액은 작년 29일 기준인 39억 달러다.
2억 달러 주기 싫다고 39억 달러짜리 회사를 파산시키는 바보는 없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상식적이기만 한 생각이고, 실제로는 충분히 파산 가능성이 있다. 당장 내일 개장하는 주식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가 얼마만큼 폭락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10억 달러 이하로 추락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들이 팔리지 않아서 사내 유보금이 메마르기 시작하면 배상금 2억 달러가 큰 부담이 된다.
“음, 그들이 혹할 몇 가지 당근을 제시해서 일찍 받아오는 방법이 최선을 것 같습니다.”
재판에 이기긴 했지만, 최종심이 아니라 강제성이 없으니 답답한 유재원이다.
“좋아요. 그럼 이 건도 엘런이 좀 처리해주세요. 그리고 혹시나 진짜로 파산할지도 모르니 임시압류 같은 걸 걸어놓으면 괜찮겠네요. 만약 할인을 원한다면 20%까지 가능하다고 하고요. 물론 일시금으로 낼 때, 최대 20%라는 거예요.”
“예. 맡겨 주십시오.”
할인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말이 20%지 돈으로 치면 4천만 달러나 되는 거금이니 말이다. 애초에 배상금에 할인 같은 걸 해주지 않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유재원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궁전에 저장된 신문 라이브러리를 통해 배상금을 내지 않기 위해 기업이 파산한 경우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었다.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렇게 막 나갈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지만, 사람 일은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일단 떡밥을 던져보는 거다.
“그리고 진짜 파산할 거면, 우리가 인수할 의향도 있다고 하세요.”
기왕 떡밥을 던지는 김에 유재원은 가장 큰 것도 던졌다.
“인수요? 연말에 주가가 좀 내려왔다지만, 우리에게 그만한 돈이 있습니까?”
“흐흐, 다 생각이 있습니다. 협상 카드는 많을수록 좋잖아요.”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귀담아들을 일은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유재원이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기에 엘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들과 늦은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은 유재원은 오후에도 개인 일정을 보냈다.
운동이다.
남아 있으려고 하는 임원들을 억지로 다 퇴근시키고, 혼자서 호텔 피트니스 센터로 내려가 근육운동을 하면서 열심히 땀을 뺐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다. 남성호르몬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면서 몸에 근육이 붙을 시기이다. 마스터플랜에서도 몸 관리를 시작할 때라고 적시되어 있다. 전생에 몸이 약해 고생했으니, 이번에는 어릴 때부터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는 거다.
“속도가 떨어집니다. 1분 연장! 두 팔도 리듬감 있게 흔들어 줍니다!”
가까이서 외친 PT 강사의 목소리에 귀가 따가운 유재원이다.
“알았다고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트레밀을 달렸다.
혼자 하는 건 재미도 없다.
또한, 스쿼트나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같은 기본기는 시작할 때 자세를 잘 잡아 놓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퍼스널 피트니스를 신청한 유재원이었다. 기대한 건 건강미 넘치는 미녀 강사였는데, 막상 나타난 강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근육질로 된 형님이었다.
그것도 전직이 신병교육대 교관인 듯 모든 말이 군대식이다. 때아닌 군대식 훈련을 받는 유재원은 기초부터 단단히 배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유재원은 전날의 격한 웨이트로 인해 녹초가 된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함께 탄 레밍턴이나 김대석은 어째서 유재원이 지금도 파김치 상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혹독한 트레이닝 때문이라고 말을 하면 더 놀릴 것 같아서 꾹 참는 유재원이다.
하여튼 비행기의 종착지가 한국행은 아니다. ID 소프트웨어가 있는 텍사스 댈러스로 가는 비행기다.
ID 소프트웨어로 가는 건 당연히 비즈니스 때문이다.
평직원들에겐 2일까지 푹 쉬라고 했지만, 유재원은 회사를 이끌어가는 오너이자 사장이었기에 마냥 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재원이 가진 회사는 ID 테크놀로지뿐만이 아니다. ID 소프트웨어도 있다. 그리고 잘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ID 인베스트먼트도 잊으면 안 된다.
오늘은 댈러스에서 ID 소프트웨어 관련 업무를 보고, 내일은 맨해튼으로 가서 ID 인베스트먼트를 챙기는 게 이번 미국 출장의 몇 안 되는 공식 일정이다.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에 내려서 밖으로 나오자 존 카멕이 유재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차 좋네요.”
확 달라진 존 카멕의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그와 함께 세워진 커다란 리무진이었기 때문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구식 임팔라였는데, 지금은 크롬 빛이 번쩍거리는 리무진이다. 마치 게임업계 최정상에 오른 ID 소프트웨어의 위상을 자동차 하나로 보여주는 듯했다. 게다가 기사도 따로 있는지 호텔의 벨보이 같은 차림에 모자까지 쓰고서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오해하지 마시길! 사장님 오신다고 하루만 빌린 거예요. 돈벼락 때문에 헛바람 든 건 작년에 다 뺐습니다.”
존 카멕이 두 손을 흔들며 오해를 풀었다.
생각해보니 의전이랄 게 없는 ID 소프트웨어였다. 이런 리무진을 사 봤자 일 년에 몇 번이나 사용할까 싶었다. 사는 것보단 필요할 때 빌리는 게 100번 낫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좋은 차도 다 타보네요.”
89년 한 해 엄청난 성장을 거둔 유재원이지만, 리무진은 타볼 경험은 없었다.
과연 리무진이다. 유재원의 일행과 존 카멕까지 네 명이 뒤에 타도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운전사도 리무진 전문인 듯 부드럽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제임스는 잘 적응했나요?
“네, 유능한 분이더라고요. 업무에도 금방 적응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작년 12월 6일 마이크로소프트를 침몰시킨 제임스는 모든 언론이 최고로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에게 몰려든 매스컴에 덜컥 겁이 난 그는 유재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재원은 그를 텍사스에 있는 ID 소프트웨어로 보냈다.
ID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ID 소프트웨어 소속이 되었지만, 그게 그거였고 대우는 최상급이었기에 제임스는 만족해했다. 그가 ID 소프트웨어에서 맡을 일은 글라이드 X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일이다.
게임 개발에 훌륭한 라이브러리로 떠오른 글라이드 X는 이제는 표준이나 다름이 없었다. 웬만한 게임들은 글라이드 X를 다 사용했다. 그러면서 하드웨어 기술이 발전했고, 이를 지원할 함수들이 추가되면서 글라이드 X의 크기도 커졌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존 카멕이 함께 맡기엔 무리였기에 제임스 어거스틴이 맡게 되었다. 그 혼자 하는 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알파 랩에 있다가 함께 해고된 동료들을 모으는 중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본 제임스에게 글라이드 X 프로젝트는 딱 맞는 임무였다.
"다만 날씨가 문제죠. 덥다고 좀 힘들어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겨울인데 말입니다. 만약 여름이었다면 끔찍했겠죠."
"아, 시애틀하고 댈러스는 기후가 좀 차이가 나겠네요. 사무실 전체에 에어콘으로 냉기의 철벽을 쌓으세요. 설치비나 유지비는 다 본사에서 지원해드릴 테니까요."
"역시 사장님은 통이 크시네요.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잡담 끝에 ID 소프트웨어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작년 선물했던 BMW M3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타고 다닌 듯, 광택이 살짝 죽긴 했지만 날렵한 포스는 여전했다.
유재원이 들어서자 작년과 똑같은 함성이 벌어졌다. 게다가 때마침 점심때라서 다 같이 스테이크 집으로 가서 고기를 썰고 오는 것까지도 같았다.
“자, 이제 일 이야길 해봐요. 드디어 차기 프로젝트를 결정했다고요?”
소고기로 배를 가득 채운 거나한 식사를 한 후 회의실에 다시 모인 자리에서 유재원이 물었다. 그러자 존 카멕이 대표로 일어나 준비한 자료를 유재원과 레밍턴, 김대석에게 나눠준 후, 발언을 시작했다.
“네, 동료 중엔 울펜슈타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는 좀 더 나은 세계관의 액션 게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정확한 분류는 3D FPS 액션게임이죠.”
유재원은 계속해보라고 손짓을 했다.
혹시 쓸데없는 거 만들지 말고 이미 히트한 울펜슈타인의 차기작이나 만들라고 할까 걱정했던 존 카멕은 용기를 얻었다.
“네, 신작의 시대 배경은 근 미래인 2020년입니다. 울펜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 때라서 무기에 제약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무기 선택의 폭이 넓게 근 미래로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배경은 화성이고요. 지구가 좁아져서 화성을 개척하러 나간 개척단에 주인공이 속해 있는 겁니다. 주인공 직업은 경비고 미래 시대에 맞게 매끈한 슈트를 입고 있죠. 나눠드린 유인물 뒷장에 스케치가 있습니다.”
존 카멕의 말에 따라 뒷장으로 넘기니 익숙한 그 모습이 있었다. 미래 지향적 전신 슈트에 멋진 전투 헬멧을 착용한 바로 그 남자다.
“키보드 워리어를 오마주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로메로가 키보드워리어에 푹 빠져 있어서 이렇게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아닙니다. 아주 마음에 드네요.”
“다행이네요. 우리도 그 슈트가 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음, 신작의 시작은 화성 개척단이 의문의 유적을 발견한 시점입니다. 죽은 유적인 줄 알았는데, 뭔가를 잘못 만지니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작동된 유적에서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그 유적은 지옥과 통하는 포털이었거든요. 악마들에 의해 순식간에 개척단이 몰살당했고, 주인공이 혼자 남아서 그 악마들을 온갖 무기들로 처리하는 거죠! 싱글 플레이에 우선을 두고 있지만, 멀티플레이도 최대한 공들여 만들어보겠습니다.”
존 카멕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유재원도 감격스럽긴 마찬가지다. 드디어 이게 나오는구나 하는 감탄이다. 그러다 문뜩 존 카멕이 게임의 이름을 따로 말하지 않고 신작이라고만 칭하고 있는 걸 상기한 유재원이다.
“그런데 게임 이름은 아직 안 정했나요?”
“아? 네. 타이틀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헬게이트, 스페이스 마린, 등등 후보가 많거든요.”
“제가 정해드릴까요?”
“사장님이요? 좋은 이름이 있습니까?”
“둠(DOOM). 어떤가요?”
“둠? 둠! 역시 사장님의 감각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영광입니다.”
그래, 둠이다.
드디어 악마들을 공포에 떨게 할 둠가이의 태동이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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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님의 추천 응원 덕에 이번 주도 모두 연참 했네요~!
새해의 첫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