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9-1
“뭐라고? 제임스 어거스틴? 그 작자가 여기서 왜 나와?”
스티브와 게이츠는 재판의 증인으로 제임스가 신청되었다는 소리에 펄쩍 뛰었다.
ID 오피스를 리버스엔지니어링 하다가 알파 랩의 모든 데이터를 날려 먹은 탓에 해고되었던 팀장의 이름은 그들도 단단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능력이 그만큼 좋았던 거다.
그렇지만 알파 랩 사건처럼 일을 부주의하게 처리한 것 하나로 해고된 것은 아니다. 여러 실수가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그날 폭발한 것이다. 신중하고 직원과 친화적인 스티브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신 알파 랩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한 만큼, 마이크로소프트의 비밀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입을 열면 후폭풍이 대단할 것이다.
“당장 제임스와 접촉해! 그가 재판에 등판하는 걸 막아!”
“지금 시도 중입니다.”
“좋은 말로 안 끝나면 미리 받아 놓은 보안 서약서라도 들이밀란 말이야!”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게이츠가 나쁜 경찰을 하면 스티브가 좋은 경찰처럼 나오는 게 마이크로소프트 수뇌부의 기본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건은 달랐다. 이번 재판은 단순한 판매금지 처분의 가부를 확정 짓는 것을 넘어서 상대에게 거대한 손해배상까지 물어내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것도 몇백 달러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1억 달러까지 상승한 엄청난 수준이다.
1억 달러를 저쪽에 주라는 판결이 떨어지면 마이크로소프트도 버티기 힘들다.
무엇보다 리테일 소비자, 거대 파트너와의 신뢰 관계가 붕괴하면 다음번에 아무리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도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
비서와 변호사들이 게이츠의 불호령에 앗 뜨거라 하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벅적했던 게이츠의 사무실에는 스티브 한 명만 남았고, 적막감만 자리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지?”
게이츠의 입에서 푸념이 나왔다.
제임스를 해고했을 때만 해도 이보다 더 뛰어난 인재를 가져올 자신감은 충만했다. 제임스가 제법 유능한 녀석이긴 했지만, 언행과 품행이 가벼워서 여러 가지 사고를 많이 쳤기 때문에 스티브도 막지 않았다. 실제로 제임스가 해고된 뒤에 알파 랩 팀장이 온 사람은 제임스보다 더 실력이 좋았다.
새로운 팀장이 이끄는 알파 랩에서는 윈도우 3.0 개발의 막바지 작업이 총력 진행 중이었고, 안드로이드 알파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원래 계획보다 훨씬 강력해진 그래픽 운영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제임스를 과감히 해고할 수 있었던 건 보안 서약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파 랩에서 작업한 비밀을 발설하면 큰 손해배상을 감수해야 했다.
상당히 큰돈이다.
덕분에 제임스 이전에 여러 사람을 해고했음에도 아직까지 문제가 없었고,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제임스 뒤에 ID 테크놀로지가 있다면?
요즘 잘나가는 ID 테크놀로지의 자본력은 무서운 수준이다. 그들에겐 비밀 서약을 어기면 내야 할 돈은 문제도 되지 않을 거다.
“우리도 대책을 마련해야겠어.”
“그래야지. 제임스의 증인 자격 자체를 무효로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아.”
스티브의 말을 게이츠가 받았다.
“그래. 그런데 제임스가 퇴사하면서 빼돌린 증거가 있나?”
“아니. 디스켓이나 수첩은 물론, 연필 하나 돌려주지 않았지 않나. 그냥 돈 몇 푼 쥐여준 다음 맨몸으로 쫓아냈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게이츠와 스티브는 이번에도 죽이 잘 맞았다.
둘 사이에 제임스의 증언을 무력화하기 위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되었다.
ID 테크놀로지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은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진부하게 흘렀던 재판에 새로운 변수 제임스 어거스틴의 등판 때문이다. 보통 증인도 아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 부서인 알파 랩에서 최근까지 근무했던 특별한 증인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ID 테크놀로지와 연결이 된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측의 대응은 제임스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 모양이다. 해고된 이유부터 그간 쌓은 나쁜 행적들이 경마 보도를 하는 것처럼 하나씩 언론에 풀렸다.
ID 테크놀로지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간 마이크로소프트가 결심한 악행을 현장에서 직접 수행해야 했던 제임스의 마음고생을 부각했다. 동시에 그렇게 더러운 일을 시켰으면서 제대로 대우조차 해주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두고 바로 해고 시켰고, 무시무시한 비밀 엄수 계약서를 들이밀며 입까지 막았다고 했다.
매년 2배 가까운 성장을 하면서 공룡이 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언론 장악력은 상당했지만, 작년부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ID 테크놀로지의 저력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치열한 언론전 속에서, 12월 6일 수요일에 제임스가 증인으로 채택된 심리가 열렸다.
유재원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10일 전에 열린 재판이라서 미국으로 날아가 구경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은 레밍턴과 엘런이 재판에 대한 준비나, 심리가 있을 때마다 경과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기에, 관련 자료를 읽는 것으로 재판의 분위기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나 압권은 6일 있었던 재판이었다.
재판의 시작부터 제임스에게 맹공을 퍼붓는 마이크로소프트 측 변호인단은 상당히 매서웠다.
“증인 제임스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상당히 악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증인 제임스가 무슨 주장을 하던, 그 발언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증인 게이츠 회장과 스티브 사장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지요?”
마이크로소프트는 역시나 제임스의 증언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임스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예.”
잠깐 고민한 제임스 어거스틴이 마이크로소프트 측 변호사의 추궁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객이 술렁거렸다. 여기서 예라고 한다면 본인의 증언에 신빙성이 낮아진다는 소리에 동의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아니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저는 이 증언석에 설 때, 진실을 말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렇기에 감정이 있다는 것에 대해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이고, 앞으로 나올 증언 역시 사실입니다.”
제임스가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누적된 스트레스가 그를 달변가로 만들어 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이 증인 선서를 지킨다는 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증인이 선서를 교묘히 이용해 자신에게 불이익을 줬다고 생각하는 마이크로소프트에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제임스에 대한 인신공격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다.
제임스가 마이크로소프트에 근무하면서 실수했던 것들은 물론이고, 영수증 발행을 깜빡해서 팀원들과 쓴 돈인데, 혼자만 착복한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제임스는 입을 앙다물고 그 비난을 묵묵히 받아냈다. ID 테크놀로지의 변호사들이 커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비난이 거세지면 논점을 이탈했다고 지적하거나, 재판과는 상관없는 발언이라고 열심히 지적해서 마이크로소프트 변호사단의 발언이 심해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방청객이나 판사들이 보기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신나게 공격하고, ID 테크놀로지는 방어에 급급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구도에 변화가 일어난 건, ID 테크놀로지 측 변호사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증인에게 마이크로소프트의 수뇌부가 불공정 경쟁을 하도록 지시했지요?”
“네, 게이츠 회장이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습니다. MS-DOS 4.0의 메모리 관리 시스템 파일에 ID 오피스를 감지하는 코드를 삽입했고, 감지가 활성화되면 사용된 메모리 블록의 반환을 부실하게 해서 불안정성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대신 코드를 대단히 복잡하게 짜서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해서도 이 작동 원리는 쉽게 밝혀내지 못할 겁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MS-DOS 4.0에서 ID 오피스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치명적인 오류 수치에 관한 통계를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MS-DOS 3.3과 비교해 놨으니 증인의 발언이 사실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증거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하는 엘런이었다.
증거라는 소리에 안색이 좀 나빠졌던 재판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양측이 이번 재판에 증거라고 내놓은 자료들의 크기는 법전만큼이나 두툼해서 그걸 다 보기에 너무도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은 곧 밝아졌다. 이번엔 A4용지 다섯 장 분량으로 작아서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게이츠 회장의 개입은 믿을 수 없는 증인의 발언뿐입니다.”
증거가 제출되기 무섭게 마이크로소프트 측 변호사가 발언권도 얻지 않고 소리쳤다.
“또한, 4.0의 새로운 메모리 관리 기능은 미리 준비하지 못한 다른 개발사들의 문제입니다. 호환성에 조금 부족해서 ID 오피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도 에러가 종종 발견되기에 ID 오피스를 겨냥했다고 말하기엔 무리입니다. 증인 역시 리버스엔지니어링으로도 검출하기 어렵다고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증언들 역시 다 이런 식이면, 증인 제임스가 그저 게이츠 회장과 스티브 사장을 개인적 감정으로 비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취직할 때 작성한 비밀 엄수 계약서를 위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 증인은 이번 증언을 마치면 ID 테크놀로지에 높은 몸값을 받으며 취업할 겁니다. 비밀 엄수 계약을 위반한 위약금 역시 ID 테크놀로지 측에서 부담하겠죠?”
마이크로소프트 측 변호사의 발언은 청산유수였다.
이번 변호인단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한다고 하더니, 실력은 확실한 모양이다. 하지만 비밀 엄수 계약서를 언급했을 때, 제임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예, 변호사님 말대로, 지금 제 발언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밀 엄수 계약을 위반하는 겁니다.”
ID 테크노롤지 변호사가 반론하려고 할 때, 제임스가 한 발 더 빨랐다.
보통은 아니라고 해야 할 대목에서 시인을 하니, 제지해야 할 판사들은 그저 흥미롭다는 듯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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