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8-2
“아, 미국에서의 활약 잘 보았네. 정말 대단했어.”
“과찬이십니다. 대통령 각하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습니다.”
“허허, 역시 똑똑하구먼. 그래, 그걸 잊어선 안 돼. 망측하게도 개구리가 된 다음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하는 염치없는 기업인들이 참 많지. 재원 군은 절대 그러지 말게.”
“예.”
대답하면서도 유재원은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한몫 챙겨 놓으라는 말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는 위인은 또 처음이다. 그래도 대놓고 저러니 좀 낫기도 싶다.
겉으론 좋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 챙겨주지 않았다고, 마음에 두고 있다가 갑자기 불이익을 던지는 사람이었다면, 참 황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게 유재원에겐 더 알기 쉬웠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오명이가 해놓은 사업을 검토해보았네. 잘한 것도 있고, 좀 아니다 싶은 것도 있더군.”
드디어 본론이다.
오명 전 장관님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아니꼬운 일이었지만, 유재원은 그걸 지적할만한 위치는 아니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중에서 ISDN 보급 사업이라는 게 눈에 띄었지.”
아이고, ISDN은 좀 놔줘라.
미국 실리콘밸리 사무실과 통신은 ISDN을 통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ID 톡을 통해 대부분의 회사 일이 다 진행된다. 화질도 떨어지고 느리기도 한 국제 팩스 대신 ID 톡으로 문서 파일을 주고받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오명이는 ISDN의 정식 서비스를 최대한 빨리 시작하는 식으로 사업 계획을 잡아 놨더구먼. 그런데 그 ISDN으로 사용할 서비스가 없다는 거야. 김원중 부장에게 물어보니 이런 문제 해결에는 자네가 업계 최고라고 하더군.”
김원중 부장?
오명 장관과 마찬가지로 유재원에게 호의적인 체신부 사람이었다. 그러면 김원중 부장이 홍병도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대충 예상이 된다. 하지만 가뜩이나 피로한 상태에서 머릴 굴리려니 모래가 낀 것처럼 매끄럽지 못했다.
“ISDN을 활용할 방법은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이 쓰기엔 PC 통신 서비스만큼 좋은 건 없습니다. 유료화도 쉽게 할 수 있고요.”
결국, 유재원이 하는 답변은 가장 무난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재원 군도 같은 생각이구먼. 김원중 부장도 ISDN의 상업 서비스는 PC 통신이 적합하다고 했다네.”
역시 너무 앞서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조금 전에 PC 통신 대신에 인터넷 같은 걸 꺼냈다면, 이 무식한 양반이 그걸 이해하진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PC 통신은 아직 없다는 거야. 김 부장 말로는 조그만 신문사가 운영하는 케텔이라는 게 제일 크다고는 하는데, 거기는 상업적으로 운영할 생각도 없고, 손실도 너무 커서 조만간 닫을 거라고 하더만.”
에엑?
케텔이 문을 닫는다고? 그럼 인터넷은 어디로 접속하라는 말인가.
“그래서 말인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앞선 하이테크 업체가 바로 재원 군의 ID 테크놀로지 아닌가. ID 테크놀로지가 케텔을 인수해서 정식 서비스를 해보는 건 어떤가?”
케텔을 인수하라니.
그건 이제껏 생각해본 적 없는 사업이었다. 유재원의 로드맵은 95년도까진 미국과 일본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 후에, 국내에 인터넷 시대가 태동하면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시작하는 거다.
가만.
그런데 케텔 인수가 꼭 부담스러운 일일까?
생각해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서버 유지 비용이나 통신회선 유지 정도는 현재 ID 테크놀로지의 수익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오히려 케텔을 인수하고, 케텔 운영을 명목으로 국가 기간통신망 지분에도 한 발 걸칠 수 있을 거 같다.
또한, 미국과의 통신회선 확보를 위해 태평양 광케이블에 대한 투자도 훨씬 부드럽게 참여할 수 있다.
PC 통신 업체들은 인터넷 시대가 오면서 적응하지 못하고 다 도태되었지만,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있는 유재원에겐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 케텔을 인수해 하이텔로 만든 한국통신보다 훨씬 더 잘 운영할 자신이 있다.
“좋은 제안을 주셨네요. 미국에서 작은 사설 PC 통신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니, 케텔을 인수해도 큰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미국은 소규모라서 운영비가 그리 크게 들지 않는데, 케텔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호오! 미국에선 벌써 운영 중이란 말이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이미 운영 하고 있다면 케텔 인수에 재원 군만 한 적임자는 없다는 것이지.”
이 양반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찾아 듣는 모양이다.
케텔을 정식서비스로 해서 ISDN과 모뎀 접속까지 다 지원하려면 얼마의 비용이 들지는 계산해봐야 한다니까!
그렇게 나온 비용과 사용자의 숫자에 따라서 적절한 요금을 붙여야 한다. 초반 손해는 감수해야 할 일이지만, 적자가 계속되진 않을 거다. 90년대 초엔 PC 통신에 대한 붐이 일어나서 가입자가 폭증하기 때문이다. 하이텔과 같이 월 2만 원 수준의 저렴한 요금제를 해도 큰 손해는 나지 않을 거다.
“케텔 인수에 관해 결정권을 가진 분들과 미팅을 주선해주시면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조속히 준비하도록 하지.”
홍병도는 골칫덩이 사업 하나를 잘 넘겼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처음보다 훨씬 너그러운 자세로 유재원을 대했다.
호감이 가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대통령과 가까운 실세였기에 적당히 응하면서 친분을 다지고 체신부를 나서는 유재원이다.
케텔 인수는 급물살을 탔다.
지금껏 케텔을 운영하고 있던 한국경제신문사는 나날이 늘어가는 사용자 숫자에 비례해 손해도 막심해지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가, 체신부의 중매를 통해 매각대상자가 나타나자 속전속결로 움직였다.
ID 테크놀로지는 케텔의 시스템과 운영 인력에 대해 실사를 시작하면서 인수 비용 책정에 들어갔다.
-ID 테크놀로지, 정식 PC 통신 서비스 시작 예정!
-최강욱 비서실장이 주도하는 케텔 인수팀 본격 가동!
케텔의 주인이 신문사라서 그런 걸까.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미 인수가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기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인수할 수밖에 없는 여론을 만들어 놓고, 매각 대금을 최대한 높이 받으려는 수작이다.
하지만 인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강욱 비서실장과 로버트 하일에게 맡겨둔 유재원이었기에, 기사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신 유재원이 신경을 쓰는 건, 바로 안드로이드 알파의 첫 번째 패치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이었다.
이로 인해서 6학년 2학기 말에 접어든 학교생활이 붕 떠버렸지만, 학교에선 유재원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6학년 학기가 시작한 다음 3번 있었던 시험에서 전 과목 백 점을 맞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결석이 좀 잦다는 게 문제지만, 학교생활도 원만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학교에서 터치할 문제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년 유재원이 졸업해버리면, 그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이 더 깊어졌다.
11월 20일.
패치 배포 D-2일,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기 이틀 전.
유재원은 평소처럼 에그 PC 앞에서 안드로이드 알파의 첫 패치를 살펴보는 중이다.
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패치 배포에 관해 딴죽을 걸까 봐, 미국 연방지방법원에서 문제없다는 답변을 받아 놓은 상태다.
배포가 금지된 것은 안드로이드 알파이고, 이미 배포가 끝난 안드로이드 알파를 지원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징조가 좋았다.
이틀 후 열릴 정식재판이 시작하기도 전에 ID 테크놀로지가 1점을 먼저 먹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기분이 좋다고 정작 제일 중요한 패치를 대충 넘기면 안 되기에, 유재원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금껏 완성된 결과물을 검토 중이었다.
물론 유재원에게 최종 버전이라고 보고하기 전부터 실리콘밸리 개발팀은 한창 내부 테스트를 진행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알파 사용자 중 테스터를 자청한 이들에게도 배포해서 비공개 테스트했다.
이번에도 다행히 큰 문제가 터지지 않아서 유재원에게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었다.
“파일 관리자 기능을 이 정도로 끌어 올렸으면 성공이지.”
이번 패치에서 가장 공을 들인 건 컴퓨터 안의 파일이나 디렉터리를 검색하고 관리하는 파일 관리자였다.
처음 발표된 파일 관리자는 파일의 이동이나 삭제, 복사 정도만 가능한 기본적인 수준이었다. 여기에 로우 포맷과 일반 포맷, 물리 디스크 하나를 여러 개의 논리 디스크로 나누는 기능, 디스크 복사와 같은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다루는 기능을 추가했다.
해당 디스크에서 마우스 우클릭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포맷 같은 건 그냥 보이고, 로우 포멧이나 디스크 분할과 같은 고급 기능은 전문가 기능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야 보인다. 컴퓨터 초보가 그냥 막 사용했다가 컴퓨터가 고장 날 수도 있기에 해놓은 장치다.
일반 사용자를 위한 기능도 있다.
아이콘 기능의 강화다. 이제는 확장자 별로 파일 관리자에 표시되는 아이콘이 달라지게 했다. 아이콘도 기본 256컬러를 사용해서 화사하고 세련되게 디자인했고, 디렉터리와 일반 파일의 구분도 확실하게 했다. 특히 그림 파일의 경우 아이콘을 미리 보는 작은 그림으로 대체했다. 파일의 이름만 가지고 내용을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해졌다.
미리 보기 기능은 컴퓨터 성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386에선 좀 버겁다. 486이라면 답답함은 없다. 게다가 한 번 미리 보기 처리가 완료된 상태라면, 섬네일 파일로 저장돼서 다음번 작업은 훨씬 빠르게 완료된다. 이를 위해 가벼운 그림 파일 뷰어도 하나 만들어서 탑재했다.
마지막으로 마우스를 이용한 사용법도 넣었다. 드래그 & 드립을 통해 파일을 복사하거나 옮기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신기능은 하나도 빠짐없이 특허로 등록되고 있다.
나중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비슷한 걸 만들고 싶어도, 특허를 회피할 수 없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이런 식으로 버전업 패치 때마다 특허가 출원되면 조만간 ID 테크놀로지는 최고의 특허 기업이 될 것 같다.
“광고 기능도 빠질 수 없지.”
1회차 광고가 곧 마무리되고, 2회차 광고가 시작된다.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분쟁 중이지만 광고는 잘 팔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광고 효과가 두드러지면서, 효용이 확실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슬롯 하나에 5만2천 달러까지 올랐고, 회사 하나가 여러 개의 광고를 사기도 했다.
2회차 광고부터는 사용자가 광고를 클릭했을 때, 관련 문서가 뜨도록 했다. 인터넷이라면 하이퍼링크로 광고를 의뢰한 기업에 연결해주었을 텐데, 지금은 문서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제품을 선전하는 것이라면 제품에 대한 자세한 스펙과 구매 방법이 담긴 텍스트 파일이 열리고, 때로는 큰 이미지 파일이 열리게 하는 것도 있다.
모든 기능이 만족스러웠다.
“기쁘게 승인!”
첫 번째 패치를 승인한다는 서류에 멋진 사인과 도장을 찍은 유재원은 팩스로 서류를 넘겼다.
그렇게 22일이 되었고, 안드로이드 알파의 첫 번째 버전업 패치가 FTP와 PC 통신, 그리고 오프라인 소매점을 통해 배포되었다.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의 연방지방법원에서 ID 테크놀로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적인 재판이 시작되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ID 테크놀로지의 개발팀과 유재원이 열심히 만든 패치는 호평이었다. 비싼 값에 광고를 샀던 광고주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효과에 만족했다.
유재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용자들의 반응도 호평이었다.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파일 관리자를 사용할 때가 많은데, 이전 버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컴퓨터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영체제의 완성도가 한 차원 높아졌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이제까지 마우스 없이 컴퓨터를 사용했던 사용자들도 마우스를 장만하기 시작했다. 마우스를 사용하는 건 초보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그래픽 인터페이스 운영체제에서는 마우스가 단축키보다 훨씬 편리한 도구였다. 키보드와 함께 마우스도 필수 주변장치라는 인식이 점점 퍼졌다.
반면 재판은 유재원의 예상대로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들의 억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억지 자료들을 엄청나게 제출했고, 이에 맞선 ID 테크놀로지도 그간 열심히 준비한 자료로 반박했던 탓이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들에게 제기된 여러 가지 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면서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다.
처음엔 이번 재판을 세기의 승부라며 열심히 취재했던 매스컴도 하나둘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대신 12월이 되고서도 아직 뚫리지 않은 ID 오피스 시큐리티 챌린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논하는 기사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지루한 대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재판부에서 자료 검토를 다 마치고, 증거로 채택할지 말지를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걸 인지한 법무팀장 엘런이 증인을 신청했다.
전직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랩 팀장 제임스 어거스틴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무한 감사합니다~!!
어제, 타 사이트 연재에 관해 우려의 소식을 드렸는데요.
오늘은 좋은 결과를 알려드리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조아라 노블 연재를 하면서도 타 사이트에도 회귀로 압도한다를 연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연재 분량에 시차가 좀 있을 겁니다. 조아라 노블레스에는 제가 그날 작성된 분량을 퇴고 후에 바로 올리는 데, 다른 사이트들은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해 한 권 분량씩 교정 후, 편집해서 올리는 방식이라서요.
실시간으로 생생히 보실 분은 조아라 노블레스에서 보시고, 편당 결제로 여유 있게 보실 분은 타 사이트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좋게 결론이 난 건 모두 독자님들의 성원 덕입니다.
저도 이제 글 쓰는 데만 집중해서 재미있는 글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