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07화 (107/1,007)

[107]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7-2

유재원의 콘퍼런스가 있은 지, 이틀 정도가 지났다.

보통 거대한 행사가 열리면 첫날이 가장 성황이고, 날이 갈수록 방문객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 89년도 컴덱스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일부 부스이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방문객이 많아지는 곳이 있었다. 바로 ID 테크놀로지의 부스였다.

관람객의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히트작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에그 PC였다.

항상 각진 컴퓨터, 상아색이나 검은색이 아니면 다른 색은 찾아볼 수 없는 PC에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PC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도 신기한데, 모니터보다 약간 더 덩치로 하나의 시스템이 완성이다. 위에 손잡이도 달려서 옮기기도 쉬웠고, 켰다가 끄는 것도 간단했다. 단점이라면 분해도 어렵고 확장도 제한이 있다.

그렇지만 컴퓨터를 사들인 사람 중에 확장슬롯을 꽉 채워서 사용하는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 있을까 하는 수준이라서 큰 문제는 없다. 게다가 사운드카드는 메인보드에 내장되어 있어서 확장슬롯 하나를 아낀 상태다. 당연히 스피커도 일체형으로 붙어 있다. 음질에도 신경을 써서 유닛은 작아도 소리는 짱짱하다.

컴덱스에 나타난 혁신적인 신제품이라고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난리였다.  그러니 구경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에그 PC를 보기 위해 일반인 관람객뿐만이 아니라, 컴퓨터를 파는 여러 바이어들이 ID 테크놀로지에 방문했고, 긴 줄을 만들었다.

실속도 있었다.

바이어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견적서를 받아갔다. 심지어 컴덱스 행사 중에 실제 주문으로 이어진 것도 있었다. 베스트바이만 해도 벌써 1천 대를 주문해 놓기도 했다.

ID 톡과 AES-256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자체 운용 중인 사설 BBS와 FTP뿐만이 아니라, ID 톡이 업로드된 여러 사이트에 내려받으려는 사용자가 밀리면서 접속 불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ID 테크놀로지의 BBS는 물론이고 컴퓨서브의 거대한 서버까지도 같은 증상이었다.

호평은 당연했다.

ID 톡은 비록 도스용이지만, 거기에 들어간 기술은 21세기의 것이었다. 다중접속 기술이라던가,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기술, 문서나 그림 파일을 주고받는 기술은 완성된 상태의 것이었다. 연결된 이들의 통신 회선 상태만 좋으면 전송속도는 PC 통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발표한 지 불과 하루 만에 ID 테크놀로지 서버에 사용자로 등록한 이들이 3만을 넘었다. 이 기세라면 한 달만 지나면 100만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 있다.

AES-256에 대한 문의도 많았다.

생각보다 저렴한 라이센스 비용에 진지하게 도입을 생각하는 회사들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ID 테크놀로지의 비즈니스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는 증표였다.

이렇게 ID 테크놀로지의 기세가 확장되면서 찬란한 태양 빛을 뿜어내는 만큼, 어둠에 잠기는 쪽도 나오는 건 당연했다.

차디찬 달 그림자에 잠긴 곳은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였다.

ID 테크놀로지가 에그 PC와 ID 톡을 발표한 다음 날, 게이츠 회장이 거대한 공연장에서 신제품 발표 행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포터블 워드와 포터블 엑셀이었다.

유재원이 제법 완성도 있는 장난감이라고 평했던 샤프의 전자사전에 MS-DOS를 올린 다음 워드와 엑셀을 탑재한 것이다. 건전지 3개로 켜지는 전자수첩에서 자판을 쿼티로 바꾸고, 메모리를 조금 늘린 시스템이다.

제대로 만든 제품이었다면 유재원도 당장 하나 샀을 거다.

이동시간이 많은 유재원이었으니, 오가는 시간에 멍하니 있는 것 대신 포터블 워드로 작업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들고 다니면서 사용하기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작동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건전지 3개로 2시간 반. 게다가 탑재된 LCD는 품질이 너무 나빴다. 픽셀은 큼직한데, 화면 면적은 작으니 한 화면에 들어갈 내용 자체가 적었다. 결정적으로 CPU는 TI의 8088 호환 칩인데, 그렇지 않아도 느린 속도가 더 느렸다. 오죽하면 자판을 빠르게 누르면, 유령처럼 뒤늦게 화면에 나타났다.

불안요소가 이렇게나 많이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저장한 파일을 다른 컴퓨터로 옮기거나, 외부의 파일을 포터블 워드에 입력하려면 외장 디스켓 드라이브를 써야 한다는 거다.

USB 포트 같은 게 없는 시절이니, 컴퓨터에 바로 연결해서 파일을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포터블 제품이라서 연결하는 커넥터가 표준형이 아니라 전용 케이블과 전용 디스켓 드라이브가 있어야 했다.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장점 하나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단점인 제품이었다.

언론과 친한 마이크로소프트인지라 기사나 잡지엔 좋은 이야기만 가득했지만, 실제 컴덱스 행사장에서 제품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악평을 주저하지 않는다.

게이츠 회장도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발표를 마친 다음 날, 컴덱스 행사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바로 시애틀 본사로 돌아가 버렸다.

유재원은 아쉬웠다.

게이츠 회장이 부스에 나타났다면, 그의 사인이라도 하나 받으면서 그의 썩어가는 표정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89년 컴덱스는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성대한 축제도 끝이 있는 법이었고, 며칠 전에 결국 막을 내렸다.

컴덱스는, 컴퓨터 제품 전시 쇼이니만큼 참가한 회사들끼리 경쟁하는 건 없다. 하지만 마지막 날 기자단의 투표를 통해 베스트 아이템을 선정한다.

-89년 컴덱스 베스트 아이템

-ID 테크놀로지, 에그 PC!

이러한 투표를 통해 89년 컴덱스에서 에그 PC가 당당히 최고에 올라섰다.

특출난 것 하나 없이, 그저 저가형 PC로 미국 시장에 도전하고 있던 삼보 트라이젬 대리점에 하루에 수십, 수백 통의 전화가 쏟아졌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주문이 ID 테크놀로지 플래그쉽 스토어로 이어졌다.

에그 PC는 가격으로 경쟁하지 않았다.

디자인과 성능으로 승부했다. 경쟁사 제품보다 비싸지만, 한 대에 3,000 ~ 4,000달러씩 하는 고급형 컴퓨터 시장에서는 몇백 달러는 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명품은 비싸도 잘 팔리는 것처럼 에그 PC는 비싸도 잘 팔렸다. 주문이 쏟아지자 바빠지는 건 한국의 삼보컴퓨터였다.

제조 공장이 밤낮으로 돌아도, 쏟아지는 주문을 다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생산공장도 늘리고, 인텔이나 AMD, 대만의 메인보드 업체에 추가 주문을 넣었다.

지금 주문을 넣어도 내년에나 받을 수 있다고 공지했지만, 주문은 쏟아졌다.

80년대의 황금기가 끝나는 시점이었지만, 그만큼 중산층도 많이 형성되어 여유 자금도 많았던 상황이었다. 486 에그 PC가 비싸긴 해도, 구매할 수 있는 숫자는 아주 많았다.

물량이 부족해서 삼보컴퓨터는 비명을 질렀다. 행복한 비명이었다. 언제나 염가로만 팔아봤지, 이렇게 웃돈까지 받아가면서 팔아 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삼보 컴퓨터 좋은 일만 해주는 것이냐?

그런 건 아니다.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팔리는 에그 PC는 당연히 ID 테크놀로지가 챙기는 유통마진이 붙는다. 게다가 에그 PC에는 안드로이드 알파가 기본탑재 되고, ID 오피스도 기본 번들로 제공된다. 이것저것 따지면 에그 PC 한 대당 3, 40만 원 정도는 떨어진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컴덱스를 끝낸 유재원이지만, 89년도를 성공적으로 보냈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시큐리티 챌린지의 마무리까지 이제 한 달하고도 며칠이 더 남긴 했다. 하지만 소스코드가 공개된 지금에도 누군가 취약점을 발견했다던가, 크랙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덕분에 많은 기관에서 AES-256 방식의 암호 체계 도입을 위해서 구체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도 ID 오피스를 2천 카피나 주문했다.

소스코드 분석을 통해 백도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대대적인 도입에 나선 것이다. 2천 카피로 거래가 끝나는 게 아니라, 시작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ID 오피스로 공문서를 처리하기 시작하면, 관련 부서도 당연히 ID 오피스를 써야 하고, 이러한 연쇄반응이 이어지면서 ID 오피스의 보급 속도를 가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게임 소프트웨어의 경우엔 출시한 직후의 일주일에 제일 많은 매출액을 올린 다음, 서서히 매출액이 줄어든다.

ID 소프트웨어의 울펜슈타인도 이 패턴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10월 말까지 120만 장을 팔아치운 울펜슈타인은 그날 이후로 45만 장 정도 팔렸다고 한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한 달 약간 넘는 기간 동안 120만 장을 팔아치웠던 때에 비하면 매수 기세가 많이 줄어들었다.

걱정하지 않는다.

전생의 울펜슈타인은 지금보다 부족한 퀄리티임에도 꾸준히 인기가 이어지면서 최종적으로 300만 장이 팔렸었다. 유재원과의 결합을 통해 훨씬 강력해진 울펜슈타인이 전작보다 덜한 성적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전생의 울펜슈타인보다 디테일이 올라가서 잔혹한 묘사도 한층 강해졌다. 학부모 협회 같은 곳에서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학부모 협회의 힘은 어마어마하니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한 방에 큰 성공을 거둬서 들뜬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진을 달래는 것도 일이었다.

텍사스 사무실은 아직 놀자판이었다.

유재원에게 받은 보너스인 BMW M3를 거칠게 몰고 다니다가 접촉사고를 낸 녀석도 있을 정도로 들뜬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존 카멕은 ID 테크놀로지에서 받은 1천만 달러 상당의 정산금을 1/n으로 나눠줬던 탓이다.

유재원이라면 1/n을 하더라도 성과에 따라 1등과 꼴등 사이에 2배수 정도의 차등을 두었을 텐데, 마음이 약한 존 카멕은 그러지 못했다. 다들 20대 초반의 나이에 큰돈을 벌은 탓에 흥청망청 분위기가 절로 생겨났다.

그나마 존 카멕이 중심을 잘 잡고 있어서 조만간 원래의 집중도를 끌어 올리고, 차기작에 대한 준비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불안한 점도 있다.

바로 저번 달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지진이었다. 10월 17일 17시에 규모 6.9의 지신으로 실리콘밸리에도 여파가 아직 있었다. 이건 유재원도 어쩌지 못할 사건이었다.

물론 지진이 올 것을 알고 있던 유재원은 실리콘밸리의 직원들을 뉴욕 맨해튼으로 출장시켜서 그날의 참사는 피했다.

명목은 뉴욕 플래그쉽 스토어 오픈 행사 지원과 개발팀 포상이었다. 실리콘밸리 플래그쉽 스토어 직원을 전부 뉴욕으로 파견해서 오픈을 돕도록 했고, 개발팀도 함께 딸려 보냈다.

미국의 서부 끝에서 동부 끝으로 가는 것이라 말이 좀 나왔지만, 회사 사장인 유재원이 시키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출장 기간이 일주일이었는데, 3일만 돕고 나머지 4일은 호텔에 투숙하며 뉴욕과 워싱턴 DC를 둘러보는 관광이라서 다들 좋아했다.

그렇게 출장 중에 큰 지진이 왔지만, 다들 화를 피했다.

만약 원래 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피해가 컸을 거다. 실리콘밸리 플래그쉽 스토어의 유리 인테리어가 다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그나마 콘크리트 건물은 단단해서 금이 좀 갔다고 무너뜨릴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 유재원에게 강한 운이 따른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아쉽게도 샌프란시스코 시장에게 지진에 대해 말해서, 피해를 줄이진 못했다.

지진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나는 강렬한 진동이었기에, 대비하고 말고가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유재원은 지금 지진 예측 관련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말해봐야 괜히 이상한 취급을 받을 거다. 게다가 현직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정치적 존재감이나 역량이 큰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그것이 결론이었다.

대신 회사의 규모가 더 커지면 지진 연구소라도 세워서 점쟁이 노릇을 크게 해볼 작정이다.

하여튼, 고가 도로가 무너질 만큼 상당히 강력한 지진이라서 지금도 크고 작은 여진이 며칠의 주기를 가지고 오고 있었다.

뉴욕 출장 겸 여행으로 본진을 피한 직원들이지만, 복귀 후에 일어난 여진 탓에 진동을 몇 번 느껴보았다.

덕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행사를 마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직원들에 옅은 불안감이 서렸다. 하지만 기억의 궁전 속에 이후 여진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기사는 없었기에, 유재원만큼은 지진에 대해 걱정하진 않았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 일등석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 유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재판뿐이구나.”

성공적인 89년이 되기 위해 유재원이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가 하나 남았으니 재판이다.

판매금지 임시처분으로 시작한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재판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소송에 ID 테크놀로지도 반소를 걸었다.

부당한 판매금지 소송으로 인한 피해보상에다가, MS-DOS 4.0에 특수한 코드를 삽입해 ID 오피스의 안정성을 해쳤고, 이로 인해 공정 경쟁을 깼으니 이에 대해 보상을 하라는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점적 지위로 공정거래를 회피한 피해자로 DR-DOS의 디지털 리서치 사를 끌어들여 소송의 규모를 더욱 키웠다.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안드로이드 알파로 인한 손실 6천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고, ID 테크놀로지와 디지털 리서치 연합 측은 독점적 지위 남용으로 인한 징벌적 피해배상금으로 1억 달러를 요구했다.

청구 금액이 엄청나서 재판부에 내야 하는 인지세도 1,600만 달러나 되는 세기의 재판이었다.

실리콘밸리의 IT 종사자는 물론, 미국 전역이 앞다퉈 보도하는 세기의 재판이 11월 22일 시작한다.

“단번에 끝내주마!”

컴덱스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만큼, 이번 재판에서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유재원이다. 무엇보다 재판을 질질 끌려가서 재판부와 변호사들 배만 불리는 일은 절대 없도록, 확실히 끝장을 내버릴 작정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드디어 2018년이네요.

올해도 열심히 달려서 보겠습니다.

독자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K나 N같은 웹소설 사이트에도 이글이 올라가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차질이 생겼습니다. 조아라가 노블 연재 조건을 바꾸어서, 이제는 그곳에 연재하려면 프리미엄으로 전환을 해야 할 수 있다고 하네요.

무엇이 독자님께 이득이 될지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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