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04화 (104/1,007)

[104]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6-1

라스베이거스.

미국 네바다 주의 드넓은 사막 가운데 있는 환락의 도시. 카지노와 호텔이 즐비한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국은 도시마다 별명도 있는데, 라스베이거스의 별명은 씬 시티, 죄의 도시다.

그렇지만 여기서 죄라는 게 범죄는 아니고, 종교나 윤리적으로 죄라는 이야기다. 도박으로 먹고사는 도시이니 말이다.

실제로 범죄율은 그다지 높진 않다. 카지노나 윤락 시설이 밀집한 만큼, 경찰들의 순찰도 많았고,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도시였으니, 범죄에 특히 민감했다. 끔찍한 범죄라도 터지면 방문객이 줄어서 도시 재정에 타격이 가기에 밤낮으로 열심히 순찰하였다.

이러한 행정부의 노력 덕에 가족 관광객도 많이 찾는 도시였고, 덕분에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유재원이 임원 몇과 돌아다녀도 이상한 그림은 아니었다.

유재원은 최강욱과 레밍턴 그리고 김대석 이렇게 넷이서 걷고 있다.

이번 미국행에는 여행 일정은 하나도 없어서, 부모님을 동반하진 않았다. 부모님도 일 년에 두 번씩이나 미국에 가는 건 부담스러워 하셨다. 게다가 한 달 전부터 선산에서 송이버섯이 쏟아지고 있어서 그곳으로 큰아버지와 함께 일손을 도우러 가셨다.

송이버섯은 나오는 즉시 포장되어 일본에 팔려 가는데, 상등품은 1kg에 2만3천 엔, 한국 돈으로 11만 원이라는 고가에 팔리고 있다.

선산에서는 그런 상등품 송이가 하루에 10kg씩은 나왔고, 중급은 수십 kg씩은 나왔다. 가격이 좀 내려가는 중급이지만, 비싸긴 여전히 비싸다.

송이로 한 철 장사하면, 큰 집, 작은집 할 것 없이 온 식구가 1년은 풍족히 먹고살 돈이 나온다. 이런 건 남에게 맡기기보다는 직접 챙기는 게 우리 어른들의 생각이었고, 그것이 가족들의 총출동을 불렀다.

유재원은 한국에서 최강욱과 김대석만 대동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부스를 꾸미는 데 필요한 상당한 분량의 짐은 항공 운송을 통해 한참 전에 보냈고, 에그 PC처럼 중요한 물건은 이번에 직접 가져왔다.

그냥 항공 화물로 가져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밀수하는 거 아니냐고 책이 잡힐 수 있어서, 한국 삼보컴퓨터가 미국 ID 테크놀로지로 수출하는 형태였다. 중요한 물건이라서 ID 테크놀로지 부사장 레밍턴이 직접 한국까지 와서 인수하는 형태로 서류가 만들어졌다.

모든 준비가 끝난 건 어제였고, 행사는 내일부터 시작한다.

하루의 여유 시간이 생긴 유재원은 임원들 긴장감도 풀어줄 겸 해서 거리로 나왔다.

“저도 카지노에 들어갈 수 있나요?”

“안 됩니다. 카지노와 술은 성인부터 가능하죠. 동양인은 좀 어리게만 보여도 바로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합니다.”

유재원의 물음에 레밍턴의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미국이라고 하면 무척이나 자유로운 나라라고 생각되지만, 이런 쪽을 보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면이 많았다.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으니,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났다.

“오늘 저녁에 꽤 큰 복싱 경기가 있는데, 이걸 보시죠?”

슬롯머신 레버를 몇 번 당기고 싶었던 유재원이었는데, 카지노의 철저한 나이 제한 때문에 절망했다. 그런 유재원에게 레밍턴이 복싱 관전을 추천했다.

“권투요?”

“예, 시저스 호텔에서 하는데, 마침 도전자가 보스와 같은 나라랍니다. 에, 이름이 킴이라는군요. 챔피언은 이탈리아계 레이 맨시니입니다.”

수첩에 적어 놓은 걸 읽어 주는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기시감을 느꼈다.

“아, 김덕구 선수?”

“네! 맞습니다. 한국에선 유명한 선수인가 보죠?”

선수도 유명하지만, 오늘의 경기도 문제였다.

미국에선 그냥 틈틈이 열리는 복싱 경기 중 하나이지만, 한국 복싱계에는 결코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경기였다. 김덕구 선수는 경기 중 입은 타격으로 뇌출혈이 일어났고, 5일 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경기는 프로모터 밥 애런의 농간으로 성사된 시합이다. 제법 유명한 레이 맨시니의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도전자를 한국의 무명 선수를 고른 것이다.

이번 경기로 김덕구 선수만 죽는 게 아니다.

김덕구 선수의 모친은 아들이 죽자 우울증에 크게 와서 결국 음독자살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경기 심판 역시 김덕구가 위험한 상태를 인지하고도 시합을 14라운드까지 강행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자기로 인해 김덕구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 상대 선수인 레이 맨시니도 복싱에서 은퇴했다.

반면 프로모터 밥 애런은 죄책감 하나 없이, 복싱계의 큰손으로 군림하게 된다.

‘바꿀 수 있을까?’

기억의 궁전을 통해 관련 사실을 인지한 유재원은 당연하게도 쓰레기 프로모터 한 놈 때문에 셋이나 죽는 암울한 결과를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죠. 제일 좋은 자리로 마련해주세요.”

“탁월한 판단입니다.”

당일 VIP 티켓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레밍턴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다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다음 날.

유재원은 화려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상쾌하게 일어났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징조도 좋았다.

김덕구 선수를 살렸기 때문이다.

어제 김덕구 선수는 전생과 같이 분전했지만, 경기의 결과는 9회 심판이 TKO를 선언하면서 패배했다.

억지로 경기에 개입한 건 아니었다. 멍하니 경기를 보던 라운드 밖 심판 바로 근처에서 레밍턴과 크게 대화했던 것뿐이다. 김 선수 다리가 풀렸다. 계속하면 죽겠다고 하니, 화들짝 놀라면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곧 경기장 안 주심에게 뭔가 말을 전했고, 심판의 개입도 깐깐해졌다. 심한 감량으로 체력이 급속히 떨어진 9회에 김덕구 선수는 맨시니의 정타에 앞으로 쓰러졌다. 악과 깡으로 로프를 잡고 일어나려는데, 심판은 곧 TKO를 선언했다.

김덕구 선수는 바닥을 쾅쾅 치면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명인 그에게 이번 시합은 일류로 올라갈 발판이었다. 가난이 죽기보다 싫었고, 돈을 버는 건 자신의 주먹 하나뿐이었다. 몸이 죽어 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죽자사자 맨시니에게 달려들었던 근원적인 힘이 그것일 거다.

그런데 아직 힘은 남았는데 패배가 떨어지니 허사가 되니 허탈한 모양이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일단 그가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다.

유재원은 그런 김덕구 선수에게 다가가서 후원을 약속했다.

살려놓고 뒷일은 신경 쓰지 않는 건, 유재원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컴덱스에 참가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왔고, 그러다가 김덕구 선수의 경기까지 관람하게 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보통의 인연이 아니니 후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김덕구 선수는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약간의 뇌진탕 기운도 있고, 태평양 너머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 웬 한국 학생이 VIP라고 있는 게 낯익은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재원과 최강욱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한참을 설명한 끝에 김덕구 선수가 ID 테크놀로지를 기억해냈다.

병원비는 물론 그가 부모님과 함께 넉넉히 생활할 수 있는 후원금 약속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고마워했다. 워낙 가난해서 치열한 경기를 치르고도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김덕구였다.

그런데 이역만리 먼 땅에서 후원자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신 김덕구는 앞으로 모든 시합을 할 때, ID 테크놀로지의 로고가 박힌 트렁크를 입기로 했다. 또한, 유재원이 미국에서 일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 후원에 대해 신문과 텔레비전에 내기로 했고, 행사도 몇 번 치르기로 했다.

무명인 김덕구에게 광고 효과는 없을 거다. 하지만 조건 없는 후원은 좋은 건 아니었으니, 이렇게라도 대가를 받는 것이다.

김덕구의 성장을 늘 발목 잡았던 금전 문제는 해결됐으니, 앞으로 거물로 자라나는 건 모두 본인의 노력에 달렸다.

유재원의 입장에선 약간의 개입과 소정의 금전 지원으로 김덕구도 살렸고, 덤으로 그의 모친과 주심까지 살렸으니 완전히 남는 장사 했다.

“이제는 내 비즈니스를 해야지.”

어제의 상념을 떨친 유재원은 세면실로 가서 목욕재계했다.

단순한 샤워가 아니라, 큰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닦는 것이었다. 먼저 준비한 맞춤 정장도 잘 차려입었다.

정장 스타일도 레밍턴이나 최강욱과는 좀 달랐다. 바지나 재킷 모두 다들 펑퍼짐한 스타일이었지만, 유재원이 직접 맞춘 정장은 투 버튼 스타일이긴 해도 슬림핏으로 날렵하고 세련된 형태였다.

“아기 피부처럼 상태가 좋아서 풀 메이크업은 필요 없겠습니다. 조그만 잡티 몇 개만 가리면 되겠네요.”

오늘을 위해 특별히 모셔온 스타일러의 칭찬이었다.

대신 헤어스타일엔 조금 공을 들였다. 삐죽삐죽 자라난 머리끝을 다듬으며 리젠트 컷으로 단정히 세팅했다.

“보스, 이렇게 꾸미고 보니 할리우드의 라이징스타 같군요.”

레밍턴은 요즘 만나기만 하면 칭찬인지라, 진짜인지 아니면 립서비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엔 유재원이 보기에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썩 나쁜 건 아니었으니, 칭찬이 맞나 보다.

“자, 이제 갑시다!”

스타일러스에게 고맙다고 하며 팁도 약간 챙겨준 유재원은 결전의 장으로 이동했다.

최초의 컴덱스는 1979년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호텔에서 열렸다. 매년 봄과 가을 행사가 열리는데, 봄 시즌은 뉴욕에서, 가을 시즌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여는 게 전통이었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고,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컴덱스의 규모도 커졌다. 89년 컴덱스는 MGM 호텔이 아닌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에서 그 성대한 문을 열었다. 몇 년 전부터 호텔의 행사장만으로는 참가 업체를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장소가 바뀐 것이다.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는 정면에서 보면 접시형 UFO가 내려앉은 모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히 넓은 사각형의 공간이 나온다.

장충체육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넓이였고, 오늘은 그 행사장이 수많은 회사가 차린 부스로 가득했다.

올해도 흥행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행사장 밖으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이미 행사장 안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ID 테크놀로지의 부스는 컨벤션 센터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인텔이나 IBM에 밀리지 않을 초대형 부스로 꾸며졌다.

장충체육관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ID 테크놀로지의 부스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은 죄다 80년대 스타일이라면, ID 테크놀로지의 부스는 21세기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띄는 하얀색으로 부스의 벽을 올렸고, 여기에 화질 좋은 프로젝터를 동원해서 ID 테크놀로지의 로고나 예술적인 시각효과를 띄웠다. ID 테크놀로지 부스 안에 들어오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서 프로젝터도 교묘하게 가려 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주얼 화면은, 시연할 때 일반 관람객들도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대형 스크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준비된 제품도 키보드 워리어부터 울펜슈타인, 안드로이드 알파 그리고 주인공인 ID 오피스가 있다. 데모도 전시하고, 관람객이나 바이어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게, 시연용 컴퓨터도 20대 가까이 준비했다.

행사장에 팔기 위해서 재고를 박박 긁어서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기도 했다. 패키지 디자인이 워낙 훌륭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있었다.

부스를 지키는 직원들은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차출한 에이스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 컴덱스쇼가 진행되는 7일간의 쌓아놓은 패키지가 다 팔리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을 거다.

하지만 ID 테크놀로지의 부스 어디를 봐도 에그 PC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밀 병기이기 때문이다.

컴덱스쇼는 단순히 부스만 오픈해놓고 쭉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컨벤션센터 근처의 작은 행사장에서 크고 작은 발표회가 수도 없이 개최된다.

행사장에는 일반인 관람객도 많아서, 번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바이어들, 매스컴들, 관련 종사자들을 모아놓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신기술, 신제품에 관해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있다.

ID 테크놀로지 역시 근처 MGM호텔의 커다란 콘퍼런스장을 잡아 놓았다. 발표는 바로 오늘 저녁 6시이고, 행사가 끝나면 VIP들과 MGM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 접대도 한다. VIP는 아니더라도 초청된 사람들이나 친히 이곳까지 방문한 사람에겐 MGM 호텔의 뷔페를 대접하기로 했다.

이곳이 컴덱스쇼의 승패를 결정할 결전의 장소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 편으로 가시기 전에 추천 한 방 부탁드립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