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4
“아? 재원이 왔느냐?”
오랜만에 보는 미래 그룹 전명헌은 예전처럼 유재원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유재원도 꾸뻑 머리를 숙이면서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전명헌은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인데, 조금 안타까운 점이라면 얼굴에 주름도 좀 늘어나고, 수척해진 모습이라는 거다. 아무래도 미래건설 건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어디 가서는 중학생인 줄 알겠어.”
“진짜요?”
“그럼, 이래 봬도 이 사람이 눈썰미 하나는 좋다고 자부한다.”
수척해지시긴 해도 클래스는 영원한 것 같다. 짧은 말 한마디로 유재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국민학교, 중학교 때는 1년에 3, 4cm씩 자란다는데, 자기가 바로 그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지루한 땅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네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미국에서 큰 사고 쳤다지?”
역시 이야기의 시작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분쟁이었다. 하긴, 국내에서 기사로 나오는 건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다. 연합통신사가 짤막하게 보내준 토막 기사를 가지고, 한국 ID 테크놀로지 지사에 문의한 다음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쓰는 식이다.
그나마 21세기 양산형 기자들이 쓴 원고보다는 나았다. 그자들은 데스크에 앉아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서핑하면서 올린 게 대부분이다. 심지어 문의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원체 단순한 방식으로 기사를 쓴 덕에, 자연어 분석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AI가 등장하자마자 그들의 역할을 단번에 대신했다.
고성능 컴퓨터 수백 대를 묶은 클라우드 시스템에서 돌아가는 기자 AI의 생산 능력은 양산형 기자 수천 명을 가볍게 능가했다.
하여튼, 국내 기자들이 낸 가벼운 기사로는 미국에서 ID 테크놀로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분쟁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유재원은 이용권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의 일을 설명해야 했다.
대신 IT 관련 전문 지식이 있는 이용권과 달리 전명헌 회장은 컴퓨터 초보였기에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써서 설명했다.
“미국이란 나라는 참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일어난 것도 아닌 데 6천만 달러 손실을 인정해줬다는 말이냐?”
소프트웨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패키지나 디스켓 등, 눈에 보이는 건 소프트웨어를 담고 있는 그릇이고, 실제 컴퓨터 안에서 작동하는 건 0과 1로 구성된 바이너리 데이터였으니 말이다.
건설부터 시작해, 중공업, 자동차 등등 커다란 기간 산업을 해왔던 미래 그룹 왕회장님께는 좀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네, 지금 서면 공방 중인데, 저희도 마이크로소프트의 개념적 손해를 능가할, 쉽게 보이지 않는 부가 가치를 올렸다고 계산해서 제출했어요. 간단히 해보니까 6천만 달러는 가뿐히 넘어가더라고요.”
마이크로소프트는 말도 안 된다면서 펄쩍 뛰었다.
말이 안 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자기들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생각은 만국의 공통된 의식이었던 모양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측이 이에 대한 반박 서면을 내면, 드디어 정식 재판이 진행된다. 최대한 늦게 낸다더라도 한 달을 넘기진 않아야 하니, 11월 1일 전후로 재판이 시작되는 거다.
“허허, 큰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전명헌 회장은 유재원의 대응이 체계적인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원에게 인간적 호감으로 마음이 가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의 당부도 받았는데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는 책망을 들을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로데오 거리에 있는 건물과 땅을 사고 싶다고?”
드디어 본론이다.
“네! 우리 ID 테크놀로지가 미국에 큰 직영 판매점을 두 개나 냈다고 조금 전 말씀 드렸잖아요. 이번에 한국에도 같은 판매점을 내려고요.”
“거기에 말이냐? 가게를 열어서 팔만한 물건은 소프트웨어뿐이지 않으냐? 게다가 정품 판매는 더더욱 시원찮을 거고. 인건비니 관리비니 해서 손해만 볼 텐데 괜찮겠나?”
오프라인 가게라서 그런 걸까?
IT 관련해서는 일반인 수준의 상식을 가진 전명헌 회장이었지만, 오프라인으로 넘어오자마자 바로 정곡을 찌르신다.
정답이다.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팔 건 소프트웨어 몇 종뿐이다. 정품 구매 의식이 높은 미국에서야 그래도 수익이 나오지만, 한국에서는 파리만 날릴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계속 소프트웨어만 팔 건 아니었다.
에그 PC가 디스플레이되면, 컴퓨터도 파는 것이고, ID 테크놀로지가 나중에 MP3 플레이어를 시작으로 PCS 휴대전화기, 스마트폰과 같은 IT 관련 하드웨어를 내면, 고객이 바로 가서 살 수 있는 훌륭한 매장이 될 거다.
“그 비싼 땅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역시 결론은 돈이다.
전명헌 회장은 일성과 달리 자기 생각으로 사업 타당성이 보이면 일단 뛰어드는 게 특징이었다. 중공업도 그랬고, 조선업도 그랬다. 하지만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최대한 빨리 이익을 뽑아내는 것도 특기였다.
초반엔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엔 기필코 이익을 낸다!
전명헌 회장의 확고한 경영철학이다. 이러한 생각이 제대로 적중해서 조그맣던 미래 건설은 거대한 미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전명헌 회장이 보기에 플래그쉽 스토어는 돈만 낭비하고 손해가 나는 가게였다. 안 하는 게 나아 보였는데, 유재원이 엉뚱한 길을 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말리려는 투가 역력했다.
“몇 년 정도 손해가 나도 걱정 없습니다. 최근에 상당한 수익을 나기도 했거든요. 총알은 충분해요. 게다가 언제까지 그곳에서 소프트웨어만 팔 생각은 없어요.”
“흐흐, 분당에서 크게 한탕 했다지? 몇백억 원 벌었다니 그게 큰돈처럼 보이지만, 물쓰듯 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게 사업이라는 거야.”
전명헌 회장의 말에 유재원은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어떻게 이걸 전명헌 회장이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분당의 투자는 최대한 은밀히 진행한 것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창업도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 그저 주주님들과 친인척에게 알린 게 전부다. 게다가 ID 인베스트먼트가 분당의 알짜배기 땅을 샀다는 것도 숨겼다.
명의 변경을 할 때, ID 인베스먼트 대신 부모님의 이름이나 친척들 등등 차명을 사용한 것이다. 탄천 근방에 땅을 가진 고 씨 어르신처럼 못 미더워하는 몇몇 분에겐 ID 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 이름을 밝히기도 했지만, 다른 땅들은 차명 하나로 거의 다 사들일 수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적으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던 유재원이다.
신기하게도 질문을 던진 동시에 의문도 풀렸다. 분당 신도시 개발에 도급 순위 1위인 미래 건설이 빠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눈과 귀도 물려 있을 터이니 황재홍의 꼬리가 밟히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국가가 밀어준 컴퓨터 천재, 부동산 투기 빠지다.”
헉 하는 비명이 절로 나온다.
자신을 저격하는 기사의 제목이이지 않은가. 국가가 밀어준 컴퓨터 천재는 유재원 본인이고, 부동산 투기에 빠지다라는 건 분당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그런 기사를 저는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나온 기사인가요?”
언론 스크랩은 수행비서 김대석의 일과였다. 유재원도 나름대로 신문과 텔레비전을 챙겨 보면서 언론의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도무지 이런 기사를 본 기억은 없다. 아니 유재원이 못 봤더라도 최강욱이나 로버트 하일 등의 임원들이 보았다면 바로 보고를 올렸을 거다.
“당연히 지면으로 나온 게 없으니, 본 사람도 없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조그만 지역 신문에 나올 기사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 기자 녀석과 우리 미래 건설은 무척이나 긴밀한 관계란다. 덕분에 지면으로 나기 전에 내 귀에 먼저 들어왔고, 적당히 무마시켰다.”
전명헌 회장은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다.
귀찮은 모기 하나를 때려잡은 것처럼, 사소한 것 하나를 처리했다는 식이었다. 혹시 자기 공을 부풀리려고 없는 일을 꾸민 거 아닌가 생각해 봤지만, 전명헌 회장이 자신을 두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자신의 이름이 분당의 일이 신문에 오른다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 토지개발공사가 분당 땅을 수용할 때의 통계를 보면 원주민이 가지고 있던 건 30%도 되지 않았다.
신도시 개발에 관한 이야기는 올림픽을 하기 전부터 돌고 있었고, 부지런한 기업인들과 복부인들은 일찌감치 서울 근교의 땅 돌아다니며 수중에 넣고 있었다. 유재원은 거의 마지막 차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유재원의 일을 캐기 시작하면 힘 있는 분들의 투자(?)도 같이 딸려오게 될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무마가 될 거였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그래도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유재원은 진심으로 감사를 올렸다.
“그런데 기자 이름이 뭔가요?”
“왜? 이 늙은이가 처리한 게 미덥지가 않다는 거냐?”
“아, 아뇨!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잘 설명을 해두려고요.”
“아서라.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거다.”
“그럼 이름만 알고 있을게요. 나중에 잘 관리하게요.”
“허허, 관리라? 관리. 그래, 그렇다면 알려주마. 경기도일보 조민형이라는 녀석이다.”
경기도일보, 조민형.
유재원은 아예 수첩을 펴고 메모까지 확실히 했다. 말 그대로 중요체크다. 그러다가 문뜩 궁금증이 생기는 유재원이다. 그것은 전명헌 회장의 목소리에서 실망감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녀석이 땅 놀이를 했다고 타박하실 만도 한데, 전혀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놀라운 답변이 나왔다.
“뭐, 네가 누구에게 귀띔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잘했다. 미국은 좀 다를 테지만, 한국에선 큰돈은 이렇게 버는 거지. 투기라는 건 희미한 확률에 큰돈을 거는 일이지만,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돈을 걸었다면 투자이니 말이디. 일 처리도 깔끔하게 했더구나. 다만 운 나쁜 건 조민형이라는 기자 놈이 우연히 네 이름을 들었다는 거뿐이지.”
설명을 해주시는 눈빛에 따스함이 올라왔다.
교장 선생님이라면 어땠을까? 분명 유재원을 타박하셨을 거다. 그런데 전명헌은 그 반대다. 재벌 총수라서 그런지 사고 구조가 확실히 다른 것 같다.
“큰 빚을 졌네요.”
“빚? 나 전명헌이야. 이 정도는 빚 축에도 들지도 않는다. 뭐, 고맙다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대통령께 말이나 좀 잘 해주려무나.”
“그럼요. 저번 기업인의 밤 행사에서 함께 자리한 어르신 중에 전 회장님처럼 소상히 살펴주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일성이니 대호니, 금성이니 하는 재벌들은 이제까지 유재원과 접점이라는 건 없었다.
아니다. 있긴 있다. 학교 컴퓨터 보급 사업에 참여하려고 ID 테크놀로지의 타자 연습기를 공동 구매한 게 딱 한 번 있다.
전명헌 회장만큼 유재원에게 큰 호의를 보여준 재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저나, 원하는 땅이 압구정이라고 했지? 현지야! 서울 지도 좀 가져오너라.”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명헌 회장은 인터폰도 쓰지 않고, 문 쪽에 대고 크게 말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듯 목소리엔 힘이 넘쳐서 밖에서도 잘 들릴 것 같았다. 그러자 ‘네, 회장님’하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둘둘 말린 전지 크기의 지도를 오현지 비서가 회장실로 가져왔다.
구체적으로 지시를 받은 건 없지만, 오현지 비서는 알아서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우고, 지도를 펼쳤다.
서울의 정밀 지도였다. 손으로 그린 거라서 투박하긴 해도 상업구역, 주거구역 등도 색으로 잘 나누어 표시되었고, 건물 하나하나도 사각형으로 자세히 들어가 있다.
“여기, 그리고, 여기. 아, 여기는 건물만 우리 거다.”
전명헌 회장은 손가락으로 압구정동 이곳, 저곳을 찍었다.
찍는 곳마다 미래 그룹이 보유한 땅이나 건물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적잖이 비싼 땅이고, 앞으로는 더더욱 비싸질 땅이었다. 미래 그룹은 서울에 이 많은 땅을 다 보유하고 있는 거다.
만약 2010년도까지 이 땅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래 건설은 부도를 맞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라크 부실이 터진 가운데 IMF라는 격변을 그대로 얻어맞으면서 부실을 처리하기 위해 양질의 자신은 모두 매각해야 했다.
“이게 좋겠네요.”
유재원은 전명헌이 찍어준 건물 중에서 압구정 선릉로와 바로 닿아 있는 커다란 건물을 골랐다. 넓이 3,150㎡, 평수로는 960평 정도 되는 작은 구역 하나다. 보통은 작은 건물 3, 4개가 들어갈 자리인데, 여기엔 2층짜리 건물 하나가 크게 들어가 있다. 덕분에 강남에선 보기 힘든 승용차가 15대 정도 주차할 주차장 자리도 있었다.
“흐흐, 제일 큰 건더기를 고르는구나. 운 좋게도 건물과 땅 모두 가지고 있는 자리다. 지금 건물이 늙은 건 아니지만, 나중에 10층짜리 빌딩을 올릴 수도 있지.”
“네! 나중에 현대적인 쇼핑몰을 올리면 적당하겠어요. 얼마에요?”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이지만, 부르는 건 사려는 사람이 불러야 하는 게 기본 아니겠느냐?”
역시 선 제시는 사는 사람이 해야 하나 보다.
유재원은 서울의 부동산 시세에 맞춰서 적당한 가격을 마쳐 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89년 강남의 땅값부터 알아보는 게 먼저였다.
고민하는 척하며 살짝 눈을 감은 유재원은 오랜만에 기억의 궁전으로 접속했다.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랑이 펼쳐졌다. 회랑은 수많은 방과 연결되어 있었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방이 89년도 자료가 저장된 곳이었다.
거대한 방 안으로 들어서자 책과 컴퓨터 등이 있는 21세기 스타일의 서재가 나타났다. 컴퓨터 앞에 앉은 유재원이 89년 강남 상업지구 땅값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그러자 매일경제 신문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서울시 평균 땅값, 평당 179만 원.
경제신문답게 무척이나 직설적인 제목이었다.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대목은 서울의 상업지구 최고 땅값이 종로구로 평당 1,031만 원이라는 대목이었다. 강남의 경우엔 590만 원이란다.
그러니 유재원이 사려는 땅값은 단순 계산으로 56억 원이다.
역시 서울 땅값이란 주변 위성도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89년도에 590만 원이라니. 뭐 21세 초만 되어도 이보다 20배는 오른 1억 원을 가뿐히 넘길 테지만, 비싸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기에 건물값도 있고, 이번 기사 사건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뒤를 봐준 전명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도 해야 했다.
“평당 680만 원이면 어때요?”
“건물은 빼고?”
“에이, 건물도 포함한 가격이죠.”
“뭐, 좋다. 대신 어디 가서 이렇게 싸게 샀다고 소문내진 말아라.”
“고맙습니다!”
좋은 건 넙죽 받는 유재원이다.
그런데 65억2천800만 원이 싼 가격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유재원이 알기로 미래 건설은 강남의 여러 땅을 헐값에 샀다. 한 평에 쌀 한 가미라고 했으니, 엄청난 헐값이다.
미래 건설이 이렇게 저렴하게 땅을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전명헌 회장의 안목 때문이다. 강남의 개발 역사는 60년대로 거슬러 가는데, 결정적인 사건은 소양강 댐 건설이었다. 소양강 댐을 통해 한강의 수위 조절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한강에 많은 다리가 건설되면서 강남 개발의 서막이 올랐다.
당연히 소양강 댐은 미래 건설이 지은 기간 산업이었고, 한강 다리 역시 미래 건설이 지은 게 많았다. 이를 통해 강남 개발의 흐름도 먼저 볼 수 있었던 전명헌 회장은 목 좋은 땅을 선점할 수 있었다.
만약 유재원이 88년도가 아닌, 70년대로 회귀할 수 있었다면 전명헌 회장의 성공 신화가 자신의 공략 루트가 될 수도 있었다.
“선심으로 거기 입주해 있는 사무실도 당장 빼라고 해주마.”
아, 그러고 보니 임차인 문제도 있었다.
미국에 낸 플래그쉽 스토어도 먼저 들어왔던 임차인이 있었을 텐데, 엘런이 잘 처리를 했던 모양인지 아무런 잡음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했는데, 전명헌 회장 덕분에 쉽게 풀었다.
“거래는 네 토지보상금이 들어오면 해야겠지?”
“네. 지금은 그렇게 큰돈이 없네요.”
일렉트로닉아츠의 3분기 정산금이 곧 들어오고, ID 오피스의 판매대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긴 한데, 한번에 65억씩 쓸 만큼의 여유는 없다. 샌프란시스코 씨티은행에 잠들어 있는 1천만 달러짜리 예금증서를 동원하면 되는 데, 그건 올해의 마지막 날 성대한 행사와 함께 찾을 계획이라서 손대면 안 된다.
토지개발공사로부터 받는 보상금을 받기까지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토지개발공사는 토지를 판다고 나온 사람이 나오면 중간에 마음이 바뀔까 봐 최대한 빨리 입금을 해줘 버리기 때문이다.
“10월이 다 지나기 전에 거래를 마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전명헌 회장과 유익한 시간을 마무리한 유재원은 강남의 플래그쉽 스토어 개장행사 때, 귀빈으로 초청하겠으니 꼭 와주시면 고맙겠다고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명헌 회장과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습니까?”
유재원이 자동차에 오르자, 김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 그룹 회장실을 막 나선 후부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던 탓이다.
“아, 이야기는 잘 됐어요.”
전명헌 회장과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 대신 걸리는 게 있으니, 자신의 뒤를 밟았다는 지방지 기자 이야기다.
미국이라면 레밍턴을 통해 만들고 있는 정보팀으로 소상히 찾아볼 수 있을 텐데, 한국은 그럴만한 조직이 없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게 여기서 다 드러났다. 하지만 매출액 비중을 보면 한국은 미국의 1/10도 되지 않는다. 이번에 토지보상금이 나오면 한국이 일시적으로 우위에 서겠지만, 내년만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다.
“레밍턴 부사장이 이끄는 정보팀 알죠?”
“네, 물론입니다.”
“한국에도 그런 정보팀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재원은 미국에 정보팀을 꾸리면서도 한국은 생각하지 않았다.
기억의 궁전 안에는 한국의 주요 사건은 기본이고, 신문에 오를 정도의 사건이라면 죄다 총망라된 상태다. 그러니 한국 정보팀을 운영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흐름을 만들어가는 건 자신이었고, 이로 인해 조민형 기자 같은 사건이 생길 수 있었다.
수십 년 투자해 만든 마스터플랜이지만, 시뮬레이션이라는 한계는 있었던 거다. 아무리 잘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도 역시 현실 난이도는 차원이 다르다.
“음, 글쎄요. 제가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없어서 무슨 조언을 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다.”
문제는 김대석은 물론 최강욱이나 로버트 하일 등등, 한국의 주요 임원 중에 이쪽으로 소질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당연히 유재원 본인도 마찬가지다.
전명헌 회장님의 비서실장이나, 일성 그룹의 이혁재 비서실장 같은 사람이라면 바로 답을 줄 텐데, 이제 막 역사가 시작한 ID 테크놀로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인지도도 부족해서 이혁재급의 능력자를 데려오기도 어렵다.
한때 안기부의 표어로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이 건은 차근차근 고민해봐야겠네요.”
다만 급하다고 어설픈 정보팀을 만들었다가, 잘못된 정보로 더 큰 사고를 칠 수 있다. 인선은 신중히 해야 한다.
대신 유재원은 황재홍을 시켜 조민형에게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경위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왕회장님이 잘 처리했다고 확언을 주셨으니, 직접적인 만남은 피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파악하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좋은 소식들이 하나둘 전해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어제 100회 연재를 했다고 과분할 만큼 많은 독자님이 축하를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200, 300, 400회 그리고 그 너머까지 오늘의 마음을 잊지 않고 열심히 달라가겠습니다~!!
독자님도 올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는 어마어마한 대박이 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