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00화 (100/1,007)

[100]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3

일체형 컴퓨터라는 개념은 개인용 컴퓨터의 역사와 거의 같이한다.

본체와 모니터가 합쳐진 컴퓨터가 매킨토시의 전용은 아니다. 다만 일체형 컴퓨터가 크게 흥행한 건 매킨토시의 맥 시리즈에 불과했다.

디자인과 공간 활용이 좋긴 한데, 확장성이라는 PC의 최대 장점이 무용지물로 변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경우 확장카드 숫자가 얼마 되지 않고, 규격을 깐깐히 지키니 큰 문제는 없지만, IBM 호환 PC의 경우 30cm가 넘는 확장 카드가 나오는 판이었으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어, 이거 도대체 누가 그린 거니?”

이용권 역시 일체형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다. 명색이 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성장한 완제품 PC 기업의 부사장이다. PC의 역사라던가, 일체형 컴퓨터에 대한 개념도 확실하게 꿰고 있다.

그에게 일체형 컴퓨터라는 건 보기 좋은 개살구 정도의 느낌이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그려진 일체형 컴퓨터는 이제까지 나타난 것과 느낌이 달랐다. 정면에서 그려진 건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안에 브라운관이 들어가 있고, 하단 양쪽에는 스피커로 보이는 동그란 것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로 3.5인치 디스켓 드라이브가 들어가 있는데, 마치 입처럼 보였다.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라서 순간 텔레비전 아닌가 싶었지만, 텔레비전 중엔 그런 형태가 없었다.

“물론, 제가 그렸어요.”

정말 아쉽게도 순수한 창작물은 아니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었고, 1980년대 말의 스타일은 2030년쯤에 한국에서 유행이었다. 이때가 사각진 세상에 곡선이 처음으로 도입된 시절이다. 단적으로 레밍턴이 새 차로 사들인 링컨 자동차만 해도, 바로 이전 모델은 딱딱 각이진 반면, 올해 나온 모델은 모서리가 둥글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한국에도 그대로 계승되어서 조만간 나올 뉴그랜저에 그대로 적용된다. 무척이나 독특한 감각이 있어서 21세기에도 80년대 스타일을 찾는 사람이 있었고, 이런 이들을 위해 현대적 감각을 섞어 만든 일체형 컴퓨터의 디자인이 지금 유재원이 들고나온 일체형 컴퓨터였다.

“세상에!”

좀 일찍 꺼내는 거 아닌가 싶어서 우려가 좀 있었지만, 이용권의 반응을 보아하니 기우였던 모양이다. 2030년에 복원한 레트로 모델이지만, 89년도 사람들의 감성도 확실히 자극하는 모양이다.

유재원은 넉살 좋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혼자서 다 한 건 아닙니다. 산업 디자인 전공하신 분께 도움도 좀 받았어요. 혹시 3.5인치 디스켓 드라이브하고 VGA 달린 컴퓨터 있나요? 이미지 파일이랑 캐드로 설계한 도면도 디스켓에 담아 왔거든요.”

“내가 누구니? 그런 기본적인 스펙은 당연히 보유하고 있단다.”

이용권은 자신의 책상에 설치된 컴퓨터로 유재원을 안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이에 출력된, 일체형 컴퓨터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인식을 날려 버릴 만큼 디자인의 수준이 높았다.

확장성을 희생해서 공간을 절약하는 정도가 장점이었던 일체형 컴퓨터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으로 만들어진다면, 디자인의 장점이 몇 배로 폭증한다. 확장성 정도는 희생해도 될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부팅이 완료되자 유재원은 컴퓨터에 디스켓을 삽입한 후, 프롬프트를 디스켓으로 옮겼다. 그리곤 ‘egg’라고 타자를 한 후 엔터키를 눌렀다.

드륵드륵, 디스켓 읽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화면이 그래픽모드로 전환된 후, 깔끔하게 그려진 일체형 컴퓨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이용권은 유재원이 준 종이가 이 화면을 출력한 거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유재원이 엔터키를 치자 화면이 바뀌었다. 측면에서 본 모습이다. 반투명한 하얀색 윤곽과 에메랄드 커버가 첫인상을 확 사로잡았다.

“컴퓨터 케이스는 보통 알루미늄에 아이보리 페인트가 보통이잖아요. 처음엔 좋았지만, 지금은 좀 질린다는 감이 있죠. 그래서 이 제품은 파격적으로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에 색을 넣는 거예요.”

“폴리카보네이트?”

“네, 투명도는 아크릴이 제일 좋지만, 상처에도 약하고 충격에도 잘 깨지잖아요. 게다가 곡선을 만들기도 어렵고요. 폴리카보네이트는 틀만 잘 만들면 프레스 기법으로 찍어낼 수 있어요. 대신 좀 비싸죠.”

유재원은 설명을 이어가면서 엔터키를 눌렀다.

케이스의 커다란 조각으로 분리한 그림도 나왔고, 내부에 어떻게 보드를 배치하고, 확장 카드를 설치하는지도 나왔다. 14인치 컬러 브라운관의 덩치가 상당한데도, 어떻게 잘 욱여넣었다.

전문가인 이용권이 보기에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케이스값만 10만 원은 넘겠다.”

대신 금형도 새로 떠야 하고, 폴리카보네이트를 다루는 공정도 만들어야 하니, 생산 원가가 미친 듯 오를 거 같다.

“케이스를 다 자체 제작하시려고요? 그럼 좋긴 하겠지만, 처음 다뤄보는 소재라서 힘들 거예요. 금형은 우리가 만들더라도, 실제 제작은 폴리카보네이트를 전문으로 다루는 다른 기업에 외주를 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외주 말이냐?”

“네, 아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껴야죠.”

유재원의 말에 이용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수백억씩 벌어들이는 녀석이 먼저 아낄 건 아끼자고 한다. 정답이다. 케이스를 자체 생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금형을 만들 때, 여기 설계 수치와 완벽히 일치한 곡률이 나와야 해요. 우리나라 금형 업자들이 만들 수만 있다면, 저렴하게 할 텐데, 아직 그분들 기술로는 힘들 거예요. 저희가 일본 금형 기업을 알아보고 있어요.”

이용권도 동의했다. 내부에 들어가는 샤시 정도는 국내에서 프레스로 찍을 순 있겠지만, 단단한 합금을 깎아서 여기 보이는 매끈한 곡선을 넣는 건 아직 부족할 거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용권은 불현듯 깨달은 게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디자인도 특허를 냈니?”

“아니요. 일체형 컴퓨터라는 개념은 진작 나온 거라서 특허를 내는 건 무리죠. 대신 국제디자인등록출원을 냈어요.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일본, 미국 등등의 주요 국가에선 이미 증서를 받았어요.”

증서를 받았다고 하니, 안심되기도 했고, 아쉽기도 하는 이용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디자인을 그대로 시장에 내놓으면 돌풍을 일으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ID 테크놀로지가 다 가지고 있으니, 삼보 컴퓨터 이름을 달고 시장에 내놓기는 어려울 거 같다.

“그런데 이런 디자인은 어떻게 만든 거냐?”

“아, 그거요. 우리가 미국에 플래그쉽 스토어 2개를 개장한 건 아시죠? 목 좋은 곳에, 인테리어도 정말 끝내주게 했거든요. 그런데 옥에 티가 바로 시연용 컴퓨터였어요. 조립 제품으로 만들어서 성능은 좋은데, 스토어 분위기를 홀딱 깨는 투박한 디자인이거든요. 플래그쉽 스토어에 어울릴만한 디자인을 구상해서 나온 게 이거예요. 정식 명칭은 ID egg PC인데, 에그로 불리게 되겠죠.”

에그?

달걀이라고 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측면에서 보면 달걀을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이는 형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겨우 40대 만들고 금형을 묵히는 건 아깝지 않니? 금형 하나 뜨는 데 몇백만 원은 할 거 아니냐?”

“흐흐, 혹시 에그 디자인에 관심이 있으세요? 그러면 쓰세요.”

“진짜?”

“네, 플래그쉽 스토어에 깔아 놓으면, 방문객들은 분명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볼 거예요. 그러면 트라이젬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해드릴게요.”

트라이젬은 삼보의 미국 상표 이름이었다.

삼보라는 뜻이 보석 3개이고, 이걸 영문으로 그대로 바꾼 게 트라이젬이다.

“진짜로 프로모션까지 해준다고? 고맙다! 고마워!”

ID 테크놀로지의 플래그쉽 스토어는 서부의 산호세, 동부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자리하고 있다. 둘 다 어마어마한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곳이었고, 시큐리티 챌린지를 통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별의별 조합으로 이뤄진 전문가 그룹, 해커 그룹이 찾아오는 성지로 등극했다. 워낙 많은 팀이 몰리다 보니, ID 테크놀로지의 사설 BBS 게시판을 이용해 시간 배분을 자기들끼리 해서 혼란함을 최소화했다.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같은 곳으로 발전했다.

이것 자체로 구경거리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이로 인해 두 개의 플래그쉽 스토어는 해당 도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조건은 뭐냐? 이 디자인의 가치는 내가 봐도 엄청나다. 이걸 우리에게 제공하는 진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조건이요? 음!”

물론 유재원은 삼보에 바라는 게 있다.

ID 테크놀로지를 통해 전 세계 시장을 두루 아우르려는 유재원에게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은 작았다. 하지만 태어난 나라이고,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사는 나라이기도 했다. 마스터 플랜에는 치국을 위한 분량도 상당하다.

그러니 유재원과 뜻을 함께할 우군은 많을수록 좋다.

“ID 테크놀로지와 삼보, 삼보와 ID 테크놀로지가 단순한 협력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하는 거로 충분합니다.”

마음 같아선 유재원은 삼보컴퓨터의 주식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싶다. 그래서 무선호출기, 시티폰, 케이블 방송과 같은 엉뚱한 사업에 돈을 낭비하지 않고, 이동통신이나 확실히 잡을 수 있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지분이 없더라도 자신의 조언이 찰떡처럼 받아들여질 만큼 존재감이 커지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에그 PC가 대박이 나면 유재원의 입김은 삼보컴퓨터에서 어마어마해질 테니까. 게다가 삼보 컴퓨터는 90년대 초 상장이 되는데, 필요한 주식은 그때 매입하면 그만이다.

“고맙다! 당연히 삼보 컴퓨터도 ID 테크놀로지와의 관계가 협력을 넘어서 동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단다.”

이용권은 디자인 사용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미리 만들어 준 계약서였는데, 주요 내용은 에그 PC 디자인이 적용된 PC가 하나 팔릴 때마다 1만 원의 로열티를 ID 테크놀로지에 줘야 한다는 거다. 또한, 계약은 1년마다 갱신하고, 서로의 이의가 없다면 자동 연장되는 형식이다.

삼보컴퓨터는 최대한 빨리 제품을 완성해서 보내주기로 했다. 데드라인은 11월 초로 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1월에는 지상 최대의 컴퓨터 쇼인 컴덱스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에그 PC를 컴덱스에서 발표한다면 분명 파격적인 반응이 올 거라고 확신한다.

"삼보 컴퓨터도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려면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좋을 거예요."

"흐흐, 기대하고 있으마."

삼보에서의 볼일은 다 봤던 유재원은 이쯤에서 미팅을 마치려고 했다. 하지만 점심을 같이 먹자는 이용권의 말에 근처 식당으로 갔다.

소박한 백반이었지만, 맛은 매우 좋았다.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접대하는 레스토랑 식사가 아니라, 같은 식구끼리 먹는 밥상 같아서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백반으로 배를 단단히 채운 유재원은 ID 테크놀로지의 서울지사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김대석이 운전하는 그랜저 자동차는 이젠 집처럼 편안하다. 점심까지 먹으니 슬슬 졸리기까지 했다.

참고로 김대석은 요즘 살판이 났는지 항상 싱글벙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매칭해주었던 미래 그룹 오현지와 다시 또 잘 되는 모양이다.

올해 봄까지만 해도 오현지는 김대석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기에, 보기 좋게 깨질 줄 알았다. 그런데 저번에 미국에 다녀왔을 때, 김대석에겐 긴 휴가를 주었는데, 그때 뭔가 관계에 진전이 생긴 모양이었다.

막 사귀기 시작해서 알콩달콩한 상태인 모양인데, 이러다 나중에 진짜 깨지기라도 하면 실의에 길게 빠질 것 같아서 우려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연애만큼 좋은 건 없으니, 크게 관여하진 않는 유재원이다.

따르릉.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랜저에 달아 놓은 카폰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가까운 지인과 회사 사람들이니 고개를 흔들어 잠을 쫓은 다음,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사장님, 황재홍입니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ID 인베스트먼트의 현장 매니저 황재홍이었다.

분당에서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황재홍은 요즘, 유재원의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 경기도 투어 중이었다.

부동산 거래의 노하우를 유재원의 부모님께 가르쳐 주고, 동시에 부동산 개발의 성공 모델을 직접 돌아보면서 안목을 높이는 중이었다. 배경지식 하나 없이 시작한 부모님이지만, 몇 년 열심히 배우면 분명 나름의 노하우를 갖게 되실 거다.

그렇지만 오늘은 부모님이 집에 계시는 날이었다. 황재홍이 전화할 일은 별로 없다.

-사장님, 드디어 터졌습니다!

“터져요?”

-분당의 땅값이 사장님이 정해주신 금액에 도달했습니다! 500억 원입니다!

신도시가 예정되어 있던 분당에 45억 원을 투자했던 유재원이었다. 이후엔 목표 금액이 도달할 때까지, 소식은 뚝 끊었다. 황재홍에게도 목표 금액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신도시 이야기는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벌써요?”

그런데 10월 2월에 벌써 그 500억 원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11배 정도의 수익을 예상하긴 했던 유재원이다. 그런데 적어도 11월은 돼야 목표 금액에 도달할 줄 알았는데, 이보다 한 달 일찍 도달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목 좋은 땅을 선점한 다음, 유재원의 지시에 따라 협상에도 임하지 않고 계속 버티기를 하니, 보상 금액이 치솟는 속도가 한층 빨라진 것이다. 그래도 무지막지한 폭리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1차 신도시의 토지 보상 가격 역시 8~10배 수준이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원래 계획대로 11월까지 보유할까요?

유재원은 짧게 고민했다.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욕심을 부리면 보상 금액을 지금보다 더 받을 수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앞으로 유재원이 벌 돈에 비하면 그다지 큰돈은 아니다. 조만간 금융선물 시장에 큰 파도가 칠 텐데, 대충 타기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큰 폭의 수익을 낼 수 있다.

괜히 푼돈 좀 더 벌겠다고 계속 홀딩하고 있다가, 대통령 귀에 유재원의 이름이 들어가면 괜히 미운털이 박힐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덕담 한마디에 얻은 게 참 많았는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아? 지금 말씀이십니까?

황재홍은 11월까진 지켜보라는 지시가 내려올 거로 예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재원의 뜻은 확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돈 들어갈 곳이 좀 많이 생길 모양이었는데, 딱 때맞춰서 목돈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유재원이다.

“아참, 매각이 끝나면, 서울로 올라오세요. 저와 함께 보러 갈 땅이 있어요.”

-예? 서울에 살만한 땅이 있다고요? 알겠습니다!

또 다른 땅 이야기가 나오자 황재홍이 반색했다. 하지만 분당처럼 커다란 개발 계획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유재원이 말하는 땅이란 이미 오를 만큼 오른 강남이었고, 당장은 플래그쉽 스토어 하나를 열 정도의 땅만 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규모는 제법 있다. 지금은 스토어 하나 정도를 여는 데 충분하지만, 나중엔 10층이 넘어가는 빌딩도 지을 만큼 큰 땅을 살 계획이니 말이다.

미국에 2개나 개장한 플래그쉽 스토어가 본사가 있는 한국에는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참고로, 89년 서울의 중심은 명동과 종로다. 강남은 아파트가 막 들어서서 상권이 발전 중인 상태인데, 명동을 넘진 못했다. 하지만 미래에는 명동을 넘어선 최고의 상권을 이루는 곳이었으니, 지금 선점하는 게 좋다.

강남의 대로변에 커다란 플래그쉽 스토어를 열어서 ID 테크놀로지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등을 팔면 무척이나 보기 좋을 거다.

“아, 그러면 전명헌 회장님과 이야기를 해야겠네.”

강남에 큰 땅을 가지고 있는 분이 바로 전명헌 회장님이었다.

국내의 많은 재벌 중에서 유재원과 가장 가까운 분을 뽑자면 미래 그룹 왕회장 전명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기도 하는 사이지.”

그도 그럴 것이 큰 땅을 두고 내기까지 하는 사이였다.

유재원은 미래건설이 중동, 특히 이라크에 뿌려놓은 미수금을 손해를 봐서라도 회수하라고 조언을 했고, 그 이유를 중동 정세의 혼란함으로 들었다. 물론 정확히는 내년에 있을 큰 사건 때문이긴 했지만, 그건 회귀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흐름이다.

왕회장 전명헌이 보기에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오늘의 그를 만들어준 본능적인 감각에는 부합하는 이야기였기에, 내기가 성사되었다.

“도곡동 땅은 내기의 승리로 헐값으로 받고, 압구정 땅이나 먼저 팔아달라고 해야겠다.”

압구정에는 그 유명한 미래 아파트가 있다.

미래 아파트를 지으면서 주변 토지를 잔뜩 사들인 미래건설이었고, 아직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으니 유재원이 팔아달라고 하면 분명 적당한 가격에 주실 거다.

그런데 누구한테 전화하지?

땅을 가진 곳은 미래건설인데, 회장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었다. 전 회장이 경질된 건 작년인데도 아직까지 공석일 만큼, 미래 그룹의 후계자 선정은 난항이었다.

현재 미래건설은 월급 사장이 대신 경영 중이지만, 천단위 짜리 결재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사안은 죄다 왕회장 전명헌이 처리하고 있다는 풍문이다.

유재원이 노리는 압구정 로데오거리 땅은 최소 억단위 땅이었으니, 답은 나왔다.

“대석이 형, 현지 누나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생각을 정리한 유재원이 운전에 집중하던 김대석에게 말했다.

“헉! 갑자기 현지 씨는 왜 부르시는지?”

역시 현지라는 이름에 바로 반응하는 김대석이다.

“왕회장님과의 미팅 약속이요. 최대한 빨리 왕회장님 좀 봬야겠어요. 미래건설이 가진 압구정 땅 좀 사려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놀리기 위함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일환이라는 걸 알아차린 김대석은 안자동차를 길가에 세우고 카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에 다이얼을 눌렀다. 왕회장님 비서실 번호는 외우고 있나 보다.

“현지 씨? 저 김대석입니다.”

친근하게 시작한 김대석의 통화는 짧았다. 자신이 모시는 사장님이 왕회장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가장 빨리 약속을 잡아달라고 전했고, 기다려 보라는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그러고는 몇십 초 후에 짧은 대답을 받고는 전화를 끊었다.

“저기, 사장님. 전명헌 회장의 전언인데 볼 거면 지금 보자고 하는데요?”

지금?

역시 왕회장님이다. 참 화통하시다.

오후 일정은 서울지사에서 최강욱과 함께 이런저런 서류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최강욱 비서실장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충분히 뒤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왕회장님께 가죠.”

유재원의 자동차는 미래 그룹 본사로 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왕회장이 갑자기 지금 자신을 부르는 이유가 궁금해지는 유재원이다.

공식 스케줄이 하루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유재원과 달리 전명헌 회장의 하루 일정은 분 단위로 돌아간다고 했다. 거대한 그룹의 대소사는 다 관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1분, 1초가 부족하다고 하는 게 기사로 날 정도였다.

물론 이런 방식이 꼭 옳은 건 아니다.

꼼꼼하게 살펴도, 결국 누군가 만든 보고서를 읽고 판단하는 거다. 미래건설처럼 대놓고 분식회계를 해서 보고하면 껌벅 넘어가신다. 미래건설 사건으로 성격이 좀 바뀌나 싶었는데, 도로 돌아온 모양이다.

하여튼, 한가한 분이 절대 아닐 텐데, 갑자기 자신을 찾는 이유는 분명 친분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아, 혹시.”

잠깐 고민을 해 보니 짐작이 가는 건 있었다.

왕회장에게 가해진 변수는 방금 전 통화뿐이다. 강남땅에 관해서 뭔가 직접 말해야 할 사안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유재원의 추리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커져가는 유재원이다.

그나마 지금은 한가한 시간이라서 도로에 차가 막히지 않았다.

결과는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연말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오늘도 연참이 실패입니다.

개구리가 도약을 위해 몸을 움크리는 것처럼, 연말에는 힘을 모으고 새해에 터트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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