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제국의 역습 ==============================
#57-2
오프닝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유재원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손님들을 이끌고 근처 레스토랑으로 갔다.
멀리서 오신 분, 공사가 다망하신 VIP들은 많이 빠져나갔지만, 근처 실리콘밸리에서 온 이들은 급할 일이 없었다. VIP용 초청장에는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명시해놨으니, 이때까지 남은 이들은 식사에 동의한 사람들이다.
동종 업계라 그런 것일까.
애그노스 시장과는 다르게 훨씬 편해진 유재원이다.
컴퓨터 기술이나 프로그래밍 등등, 밥을 함께 먹으면서 IT 관련 전문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유재원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던 이들도 프로그래밍이나 하드웨어 설계 같은 전문 영역에서도 자신들과 어울려 답도 하고, 질문도 하니 그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저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영어에는 존댓말은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처럼 존칭이나 ‘요’자를 확실하게 붙이는 식은 아니다. 대신 상대를 존중하는지는 말투와 제스처를 보면 딱 나온다.
“아무리 프로그램적으로 최적화를 잘해도 하드웨어가 지원하는 것만큼의 향상은 없지요.”
“물론, 하드웨어 지원이 중요하다는 건 우리도 이번에 확실히 느꼈네. 그래서 이방성 필터링 같은 기술을 신제품에 적용하기 위해서 정말 밤낮으로 노력했지. 물론 ID 테크놀로지의 기술 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고. 그때를 생각하면 다신 못할 짓이었네.”
시러스로직의 영업 이사가 유재원의 말에 호응했다. 그의 말투에서 대등한 실력자로 인정했다는 느낌이 확실히 풍겨진다.
“흐흐, 그래도 글라이드 X 인증 로고를 달 수 있었잖아요.”
“솔직히 처음엔 긴가민가 했다네. 로고 하나 다는 걸로 매출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어마어마하더라고. 만약 여름 신제품이 인증을 받지 못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네.”
시러스로직 이사가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리테일 부품 시장의 동향은 글라이드 X 호환 마크의 여부가 절대적이었다. 글라이드 X 마크가 달리면, 안 달린 것보다 훨씬 많은 판매량이 나온다. 그러나 아무나 글라이드 X 호환이라는 마크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ID 테크놀로지에 돈을 줘서 인증을 받는 게 아니라, 이방성 필터링처럼 글라이드 X의 중요한 기술을 하드웨어적으로 지원해야 받을 수 있다.
“이방성 필터링에 이어 미스터 유가 생각하는 신기술은 또 있습니까? 기왕이면 연산 장치에 관한 것이면 좋겠군요.”
이번엔 AMD 부사장의 말이었다.
“물론이죠.”
말을 받은 유재원에게선‘Sure!’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방성 필터링은 앞으로 만들 글라이드 X의 기초 기술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 게임의 기술 자체가 2D에서 3D로 바뀌는 대격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으로, 게임은 3D 방식이 대세를 이룰 겁니다. 그 시작은 울펜슈타인이 될 거고요. 문제는 정수연산으로도 충분했던 기존의 게임과 달리 3D 게임인지라 실수 연산, 그러니까 부동소수점 연산도 모두 사용한다는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방성 필터링의 경우, 두 픽셀 사이에 중간값을 임의로 생성해서 삽입하는 것으로 계단이 도드라지는 걸 최대한 막아준다. 그런데 두 값 사이가 정수로 딱 나뉘는 일은 별로 없다. 소수점 아래로도 계산을 해줘야 자연스러운 결과 나오는 거다.
당연히 부동소수점 연산 장치는 정수 연산보다 복잡한 회로를 가지고 있다. 복잡하면 비싸진다. 그래서 예전엔 값을 좀 낮추기 위해 코 프로세서라는 별도의 칩 형태로 발매하기도 했다.
“인텔의 486은 그래도 부동소수점 연산 유닛을 내장했고 정수 연산 유닛과 부동소수점 연산 유닛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유재원의 말을 반대로 말하면 386 이하 기종들은 정수 연산 중이면 부동소수점 연산은 못 하고, 부동소수점 연산을 하면, 정수 연산을 못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다.
집에 갑자기 배고픈 친구 놈들이 우르르 들이 닥쳐 대량의 음식을 해야 할 상황이다. 다행히 집 앞에는 즉석식품 자판기가 두 개 있다. 주문 받은 할 음식도 두 자판기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면 가까운 것에 먼저 돈을 넣어 주문한 다음, 바로 옆에 자판기로 이동해 주문하는 게 최선의 방식이다. 그런데 386 이하 기종은 자판기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CPU였다. 심지어 부동소수점 연산 칩이 장착되지 않은 염가형 모델은 기본연산 유닛으로 일일이 계산해야 하는 기종도 많았다.
486은 코프로세서를 기본 내장했고,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덕분에 386보다 몇 배는 빨라졌다고 광고할 수 있는 거다.
“제가 생각하는 미래형 칩이란 이러한 연산 유닛을 복수로 두고, 유닛들이 병렬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1 클럭당 처리 능력이 몇 배는 더 나아질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연산 능력을 통해 화려하고 복잡한 3D 화면도 매끄럽게 그려낼 수 있지요.”
유재원이 말하는 건 슈퍼스칼라라는 기술이었다.
“CPU뿐만이 아니라 VGA 유닛에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방성 필터링처럼 그래픽에 관한 처리는 그래픽 유닛에서 처리하면 그만큼 컴퓨터가 빨라지니까요. 게다가 그래픽 데이터는 병렬 처리에 적합한 형태잖아요.”
유재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호오, 과연 그렇군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미스터 유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병렬 연산이 많아지면 프로그래밍이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니겠습니다.”
대신 시러스로직의 이사가 문제점을 제기했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뜻밖의 기회를 잘 포착해서 매출 증가라는 성과를 낸 것도 저렇게 기본이 탄탄했기 때문일 거다.
“물론 그렇지요. 그 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조만간 글라이드 X 라이브러리의 버전업을 통해 어느 정도 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병렬 연산?
그건 전생의 유재원이 열심히 다뤘던 분야였다. 인공지능을 위한 신경망은 병렬 연산 구조가 기본이다. 어마어마한 연산량을 수많은 단일 프로세서로 처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여튼 대단합니다. 우리는 따라가기도 바쁜데 ID 테크놀로지는 차기 버전을 준비하고 계시군요?”
“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ID 오피스를 만든다고 글라이드 X는 ID 소프트웨어가 전담하고 있거든요. 여기 계신 귀한 분들이 도와주시면 그 시간이 단축될 거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올바른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엉뚱한 방향을 찍었다가 이 산이 아닌데 하고 돌아오면 대참사다. 낭비한 시간과 돈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투입된 자원이 아깝다고 계속 투자를 하면, 더 큰 참사가 일어난다.
이런 면에서 유재원은 엄청난 어드벤테이지를 갖고 있다.
무려 2040년까지 컴퓨터 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확장했는지 몸소 체험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회귀를 준비하면서 관련 기술은 죄다 기억의 궁전 속에 저장해 두었다. 이를테면 지금 유재원이 말한 방향도 그중 하나다.
여러 연산 유닛을 병렬로 사용하도록 해주는 기술을 슈퍼스칼라라고 하는데, 유재원의 머릿속에는 x86 호환 CPU를 위한 슈퍼스칼라 논리회로 설계도도 들어 있다.
여기 와주신 분들은 ID 테크놀로지와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기술을 주고받을 만큼 깊은 협력 관계가 있는 회사는 없었다.
더욱이 레밍턴의 정보팀이 잡아온 풍문에 의하면 글라이드 X가 돈이 될 것 같으니, 이에 대응하는 라이브러리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이 자리에 사람을 파견한 회사 중에서도 그런 움직임에 참여하려는 제조사도 있다.
지금 자리에서 글라이드 X가 차후 버전에서 훨씬 강력한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확인하고, 이후 버전에서 실제 구현되는 걸 본다면 한눈 파는 회사들은 훨씬 줄어들 거라고 장담한다.
하여튼, 보통 사람들이 봤으면 농담 하나 나오지 않는 딱딱한 자리라고 여길 만큼, 기술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자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컴퓨터 관련 전공이라는 것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각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집중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사장님.”
한창 컴퓨터 이야기에 빠져 있던 유재원을 현실로 데려온 것은 레밍턴 부사장이었다.
"예?"
레밍턴에게 귓속말을 들은 유재원의 눈이 커진 것도 그때였다. 일단 표정을 관리하면서 함께 자리한 동석자들에게 잠깐 다녀올 테니 식사를 즐기시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재원이다.
“FBI라고요? 진짜요?”
레밍턴이 전한 귓속말은 자신을 찾아온 FBI 간부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미국에서 불법을 저지른 적도 없는 유재원이었지만, FBI라고 하니 깜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예, 제가 그들의 신분은 철저히 확인했습니다. FBI가 맞습니다.”
그들?
하나도 아니고 두 명이나 왔다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유재원이 플래그쉽 스토어에서의 행사 일정을 마치고 VIP들과 레스토랑으로 가고 나서 30분쯤 뒤에 FBI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월터 스키너, 안나 모랄레스라고 했습니다.”
40대 남자와 30대 여자 요원이었다. 영화에서 범죄 현장에 출동할 때 입는 FBI라고 크게 박힌 자켓을 입은 건 아니었다. 그걸 입고 나타났으면 스토어에 가득 있는 손님들이 깜짝 놀랐을 텐데, 둘 다 번듯한 양복 차림이다.
레밍턴이 FBI 요원을 설명할 때의 말투는 무척이나 사무적이다.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유 재원은 다 알고 있다. LAPD에서 수사관으로 일할 때, 사건 처리에 관해 FBI와 몇 번 충돌이 있었고, 번번이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전생에서 레밍턴이 풀어 놓는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레밍턴은 이들을 스토어 뒤쪽 사무실로 안내하고, 용무를 물었다고 한다. 물론 마음에 준비하면서 말이다. 애어른 같은 보스가 FBI가 달려올 정도의 사고를 친 거라면, 보통 큰일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FBI 요원의 용무는 유재원 때문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레밍턴은 직원 하나를 불러 커피를 대접하게 하게 하고, 유재원을 데리러 왔던 거다.
유재원이 플래그쉽 스토어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과연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둘은 레밍턴과 유재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의 말에 둘의 표정이 볼만했다.
이와 똑같은 모습을 1시간쯤 전 아트 애그노스 사장으로부터 봤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유재원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서도 많이 봤다. 사회 활동을 유재원처럼 이른 나이에 하는 사람은 없으니, 낯섦에서 오는 당황은 유재원이 다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이젠 이력이 났다.
“제게 도움을 청할 게 있으시다고요? 최대한 짧게 말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지금 귀빈들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이럴 땐 그냥 강하게 나가면 알아서 풀린다.
“알겠소. LA에서 최근 6개월간 노숙자 7명이 죽은 살인 사건이 있었소. 우리는 이걸 연쇄 살인으로 판단하고 수사했고, 프로파일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성공해서 현재 강제연행 중이요.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그가 가진 단서를 분석하던 중인데, 한 가지 난관에 부딪혔소.”
월터 스키너의 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으면서 뜨겁지도 않은 그런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난관이라니?
그런데 스키너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FBI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자인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대신 안나 모랄레스라는 요원이 설명을 이었다.
“귀사가 제작한 키보드 워리어입니다.”
잉?
키보드 워리어? 갑자기 이 대목에서 키보드 워리어가 왜 나오지?
의문 가득한 유재원의 눈빛에 안나 모랄레스 요원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유재원을 향해서가 아니라 레밍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키보드 워리어의 기능 중엔 다이어리 기능이 있죠? 그리고 암호를 걸어 놓을 수도 있고요. 용의자가 작년 12월부터 키보드 워리어 다이어리 기능을 이용해 매일 일기를 작성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암호 해제를 위해 FBI의 암호 전문가들이 노력하고 있고, 조만간 풀릴 거라고 기대합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우리 전문가들은 강제연행 만료 시각 전에 해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귀사는 문제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으니, 분명 암호를 해제하는 법도 알고 있으리라 믿소. 협조 부탁하오.”
안나의 말이 끝나자 스키너 요원의 말도 이어졌다. 물론 유재원보단 레밍턴을 향해서 말했다.
하긴 인사 몇 마디로 유재원의 존재감을 아직 실감하는 건 아직 어려운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원의 고민은 이어졌다. 정보통신업을 하다 보면 언제고 정부의 협조 요청이 올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유재원이었다. 게다가 문제의 소프트웨어가 키보드 워리어 때문이라니?
유재원은 미국으로부터 협조 요청이 온다면 보안성이 한층 강화된 ID 오피스 버전 3.0 정도가 되었을 때나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국 FBI는 키보드 워리어의 암호도 못 뚫었다는 이야기다.
이거 계산기 좀 다시 두드려 봐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연류된 사건의 무거움을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사안도 아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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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막판까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