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안드로이드 비긴즈 ==============================
#53-2
“음? 왜 이러지?”
세팅까지 수월했는데, 정작 전화 걸기를 시도해도 따르릉거리는 신호만 가고 연결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추명석이 한국통신 여주 지사에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지시를 하고서야 연결에 성공했다.
불통 원인은 간단했다.
한국통신 여주 지사의 전화교환기 장비에 추가로 설치했던 ISDN 중계기에 정작 교환기 회선과 연결하지 않고 있었다. 교환기와 ISDN 중계기가 연결되자, 유재원의 집에서도 연결이 되었다.
"됐다!"
ISDN 전용 전화번호로 케텔에 접속하니 화면에 문자들이 뜨는 속도부터 달랐다.
글자가 많은 화면이라도 1초도 안 돼서 폭발하듯 떠올랐다.
"자료를 받아 보자."
추명석은 곧바로 케텔 공개 자료실로 들어가서 무료로 공개된 파킹 프로그램을 받아 보았다.
“우와! 빠르다!”
초당 6kb라는 엄청난 속도가 나왔다. 빨라 봐야 초당 300바이트 정도 나왔던 어제와 비교하면 20배나 빨라진 속도였다.
이 속도 그대로 미국과 접속된다면 메신저를 통해 다중 채팅도 문제없고, 아주 조그만 화면이긴 해도 화상 통신도 가능할 것 같았다.
덕분에 두 연구원이 계면쩍게 내미는 장비 임대료, 설치비, 통신비 청구서도 기쁘게 받을 수 있었다.
오명 장관은 시범서비스라서 요금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특혜 시비가 붙었을 때 떳떳하기 위해서 꼼꼼하게 영수증까지 다 받았다.
설치를 다 끝내자 어머니가 과일을 가지고 오셨다. 사과부터 해서 바나나, 키위, 딸기 같은 과일이 풍성했다.
확 펴진 집안 사정이 간식의 구성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그렇지만 유재원이나 추명석, 이재정 두 연구원도 ISDN의 위력을 체감하느라 간식을 먹을 틈도 없었다.
“그럼 이제 인터넷을 해봅시다!”
유재원은 가장 중요한 인터넷에 접속했다.
케텔의 유료 서비스 항목으로 넘어가서 인터넷 접속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WWW 같은 서비스가 없을 때라서, 인터넷이라고 해봐야 숫자로 된 주소로 FTP 정도를 접속하는 수준이었다.
유재원은 이들에게 ID 테크놀로지의 FTP 서버를 보여줄 순 없었기에, 공개된 컴퓨서브의 FTP로 접속했다.
“오! 빠르다!”
접속한 FTP 서버가 보내주는 파일 목록이 표시되는 속도부터 달랐다. 케텔의 BBS 화면을 보는 것처럼 한 방에 수십 개의 목록이 떡하니 떠올랐다.
사용자가 많은 컴퓨서브였지만, ISDN 모뎀의 힘이 그것을 능가했다. 컴퓨서브 FTP 서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이 된 북미판 키보드 워리어, 일명 좀비 크러쉬 프리뷰 버전을 받아 보았다.
“아, 국내 통신망보단 느리네요.”
안타깝게도 속도가 반으로 떨어졌다. 초당 3KB의 속도였다. 그래도 국내 속도의 반이지 원래 유재원이 사용했던 2,400 bps보다는 12배 정도는 빠른 속도였다.
별도의 통신선과 고성능의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는 ID 테크놀로지의 FTP에 접속하면 분명 원래의 6KB 속도가 나올 거 같다.
여기에 ISDN을 듀얼 채널로 묶으면 초당 12KB라는 가공할 속도가 나온다. 이 정도 되면 고화질 화상통신이 가능하다.
며칠이 더 지났다.
ID 오피스 보호를 위해 부트로더도 만들고, 전용 도스도 만드는 데 정신이 없는 유재원이다.
유료 베타테스터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원래는 7월 중순에 출시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의 어깃장 때문에 출시일이 쭉 미뤄졌다. 그래도 무한정 미룰 수는 없었었다.
8월 15일!
광복절을 디데이로 잡고 ID 테크놀로지의 모든 개발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파이널 빌드를 마치고 휴가를 즐기던 개발팀도 다 복귀했고, 유재원도 매일 같이 쉬지 않고 터보 C의 편집 창을 보며 코드와 싸웠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듯한 일상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 건 7월 18일이었다.
아이들은 좋다고 노는 제헌절이었지만, 유재원은 하루를 다 프로그래밍에 집중했다. 그렇게 업무에 집중하던 유재원은 다음날 18일 출장길에 올랐다.
무단결석은 아니다.
학교에는 공문을 보냈다. 대통령 배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대전 참가를 위한 것이니, 참고해 달라는 공문이었다. 체신부로부터 날아온 참가 요청서를 첨부했기에, 결석으로 쳐주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18일 딱 하루만 학교를 안 나가는 건 아니다.
소프트웨어 대전은 18일부터 20일까지, 무려 3일간 이어지는 행사였다. 장소도 장충동 체육관으로 제법 규모가 컸다.
공무원이나 전문가 집단에만 공개하는 행사가 아니라, 일반인도 들어와서 볼 수 있는 행사였다. 오명 장관 말을 들어보니 일반인들의 참여율이 낮을 거 같으면 인근의 고등학교에서 견학을 올 거란다.
무조건 성대하게 치러지는 행사였다. 여기에서 제일 좋은 반응을 얻으면 대통령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도 받고, 정부 납품에서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미국 시장도 중요하지만, 안방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정부의 지정 조달품으로 ID 오피스가 지정되면, 최소한 반은 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모든 나라도 그렇겠지만, 정부 자체가 나라에서 제일 큰 사업체나 마찬가지였다. 공무원이라는 형태로 고용하고 있는 사람도 제일 크고, 쓰는 돈도 크다. 89년도 국가 예산은 23조 원 규모였다.
정부에서 ID 오피스를 사용하면, 정부가 주관하는 사업에 참여할 기업들 역시 ID 오피스를 쓰게 될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워드프로세서의 표준으로 확정되지 않겠는가.
무척이나 중요한 행사였기에, 유재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오죽하면 집에 애지중지하며 사용하던 486을 차에 실었다.
행사장의 부스는 체신부가 준비했다. 그런데 부스 안을 꾸미는 건 참가하는 기업들의 몫이었다. 디스플레이를 잘하고, 준비한 프로그램이 최고의 성능이 나오도록 해야 했으니, 컴퓨터는 제일 좋은 것으로 가져가는 게 최고였다.
특히나 유재원을 자극한 소문은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참전이었다.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MS 워드와 스프레드시트인 MS 엑셀은 물론이고, 막 출시했다는 맥 PC용 오피스까지 낼 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악연이 생긴 유재원은 자신의 앞마당에서 알랑거리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집안의 보물인 486 컴퓨터를 꺼내 들게 했다.
다만, 컴퓨터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으면, 유재원은 486을 트렁크에 싣지 않고 뒷좌석에 올려놓았다. 고속으로 달리다가 덜컹거리면 충격으로 부품이 고장이 날까 봐 푹신한 뒷자리에 올린 것이다. 심지어 충격에 민감한 하드디스크는 아예 분리해서 집안 금고에 넣어 놨다.
대신 486안에는 새 하드를 구매해서 부팅에 필요한 도스와 ID 오피스, 키보드 워리어 정도만 설치해서 디스플레이를 해놓을 작정이다.
“다 죽었어!”
486의 든든함은 마치 엑스칼리버를 얻은 아더왕의 마음과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서울에 올라오자 최강욱 실장과 법무팀장 로버트가 유재원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네,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아이고, 울 사장님 핼쑥해진 거 보소. 이럴 땐 보양식 좀 하셔야 하는데. 이따가 한 뚝배기 하실래예?”
“그래도 키는 컸죠?”
“아, 그러네예, 이제보니 한 3cm는 자란 거 같네예. 그래서 더 핼쑥해 보이는 갑네예.”
최강욱 실장은 진중하게, 로버트는 부산스럽게 유재원을 반겼다. 아직 점심밥 먹을 때는 아니라서 유재원은 이들을 이끌고 곧장 장충체육관으로 갔다.
내일이 행사 시작이라서 체육관 안은 각 업체에서 나온 이들로 가득했다. 유재원의 ID 테크놀로지 부스 역시 서울지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이것저것 장식을 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옛날 대한 뉴스를 볼 때 전해지는 것 같은 고전적인 느낌이 다분히 전해졌다. 하지만 그나마 현대적인 느낌을 내는 곳이 있다면 ID 테크놀로지의 부스였다.
보통 다른 회사들과의 구분은 임시로 친 비계에 하얀색 천을 둘러 만들어 구분했다. 유재원은 아예 나무판을 가지고 벽을 세워서 단단함을 더했다. 여기에 총천연색 출력이 되는 플로터를 이용해 ID 테크놀로지의 로고를 찍어내서 벽지처럼 둘렀다.
특히 이번 행사의 주인공인 ID 오피스는 어른 키만 한 크기의 대형 패키지 모형도 만들었고, 시연용 컴퓨터도 5대나 준비했다. 손때가 묻은 낡은 컴퓨터가 아니라 삼보 컴퓨터에서 어제 받은 따끈따끈한 신형 386 컴퓨터였다.
행사를 치르고 난 후에 서울 지사나 여주 지사에 보내서 업무용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돈 낭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최신 컴퓨터로 다 도배한 건 아니다. 서울 지사에서 사용하던 286 컴퓨터도 2대 있다. 286 전용으로 만든 라이트판 ID 워드프로세서 시연을 위해서 준비했다.
ID 오피스의 여러 기능을 설명해줄 도우미도 대학생들로 섭외했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모도 알뜰히 챙긴 섭외였다.
심지어 이 당시엔 엄청나게 비싼 장비인 프로젝터를 빌려와서 시연용 화면을 부스 중앙 화면에 커다랗게 띄워 놓기도 했다. 램프 프로젝터라서 주변이 밝으면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마지막으로 사은품도 있다.
ID 테크놀로지 로고가 박힌 공 디스켓이다. 2D 디스켓이지만, 한 장에 1천 원씩 하는 비싼 물건이라서 나눠주면 좋아할 거다. 여기에 커다란 종이가방도 있다. 사은품인 디스켓보다 몇 배는 커다란 종이가방 역시 ID 테크놀로지의 로고가 박혀 있다. 사은품을 받고 종이가방도 받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돌아다니면 무척이나 볼만한 그림이 나올 거다.
“좋군요.”
유재원은 행사장 준비 상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스들은 그야말로 80년대 스타일인데, ID 테크놀로지만 21세기 스타일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유재원이 집에서 가져온 486 컴퓨터를 설치했다. 시연용 컴퓨터와는 분리된 자리에 놓았다.
바로 프로젝터와 연결하는 자리에 486을 놓았다.
486의 놀라운 속도로 돌아가는 ID 오피스의 퍼포먼스를 유감없이 보여줄 준비가 끝났다. 일반 손님들을 상대로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뽑은 시연 도우미가 자리할 테지만, 바이어나 기업 사장들,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면 유재원 본인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가져온 486이 제 자리에 안착해서 잘 작동한 걸 확인한 유재원은 ID 테크놀로지 부스를 나섰다.
“그럼 저는 잠깐 구경 좀 하고 올게요.”
“안내해드릴까요?”
“괜찮아요. 설마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겠어요?”
최강욱이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유재원이 막았다.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번 행사에 무슨 기업들이 참가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장충체육관이 좀 큰 체육관이긴 해도, 부스가 세워질 실내운동장 넓이는 작았다. 몇 분 돌아보면 다 본다.
대신 수행비서로 전직한 김대석이 유재원을 말없이 뒤따랐다.
막 걸음을 옮겼을 때는 흥미가 가득했던 유재원의 눈빛은 잠시 후,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열악한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여러 회사가 내놓은 제품은 무척이나 부실했다.
컴퓨터에서 한글 카드 없이 한글을 사용하게 해준다는 프로그램은 메모리 상주 용량이 너무 크다. 국산 기술로 만들었다는 VGA 카드도 있었는데, 중요한 부품은 모두 미국산이었다. 특히 색감이 정확하지 않은 게 문제다.
부스를 돌아보기 시작한 유재원의 눈에는 흥미라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눈이 번뜩 뜨이는 게 나왔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부스였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스 3.3 버전도 진열대에 놓여있긴 했지만, 가장 전면에 나온 건 도스 4.0이었다.
프리뷰 버전을 구해온 모양인지 4.0a라는 버전을 띄워 놓고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것저것을 해보고 있었다. DIR이나 복사 명령인 COPY 등의 내부 명령어가 모두 한글로 나왔다. 그러다가 유재원이 구경하는 걸 보더니 도스 셸을 띄워 보이는 게 아닌가.
텍스트 상태로 구성된 박스형 레이아웃을 통해 파일 리스트나 디렉터리 리스트를 띄워 놓고 커서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디렉터리를 오고 가거나, 파일을 실행할 수 있었다.
역시나 원래의 모습 그대로의 도스 셸이었다.
보기엔 그럴듯해도 실용성은 없었다.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은 키보드를 잡고 명령어를 직접 입력하는 게 빠르고, 지식이 별로 없는 초보는 눈이 어지러워서 원하는 기능을 찾기 힘들었다.
대충 구경을 마친 유재원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있다!”
그러다가 유재원의 관심을 끈 건 행사장 제일 구석에 있는 1칸짜리 작은 부스였다. 작은 부스라서 컴퓨터도 한 대뿐이었지만, 준비하는 이들은 젊기도 하고 열정도 넘쳤다. 곧이어 A4 용지에 한 글자씩 크게 인쇄한 것을 간판처럼 부스 상단에 걸기 시작했다.
-아래아 한글 1.0
행사장에서 가장 작은 부스였지만, 유재원에겐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부스보다 더 큰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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