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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78화 (78/1,007)
  • [78] 자이언트 킬러 ==============================

    #51-2

    7월이 되었다.

    미국에서 급한 보고는 아직 없었다. 대신 유재원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에서의 ID 오피스 판로 개척을 위해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원찮은 반응이었다.

    삼보와 미래 그룹은 인맥 덕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지만, 일성에선 만나주지도 않았다.

    대호 그룹과의 미팅은 성공했지만,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번들로 넣는 건 생각해볼 수 있지만, 회사 업무 처리를 ID 오피스로 바꾸는 건 프로그램에 대한 검증이 끝내봐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우려는 크게 두 가지에서 왔다.

    고사양, 그리고 안정성이다.

    최소 요구 사양인 386 SX라도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게다가 지금 사용 중인 사무용 프로그램을 갑자기 바꾸면 업무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나중에 다 바꿔야 하니 지금 바꾸는 게 비용적으로도, 안정적으로도 훨씬 나았다.

    90년대만 되어도 고객들의 데이터는 물론 성향까지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최적화된 개인화 마케팅이 이뤄진다. 자연스럽게 기업의 업무도 고도화되고 다뤄야 하는 데이터의 크기도 커진다.

    그런데도 낡은 프로그램을 고집하면 업무 성과가 바닥을 칠 테지만, 지금은 포트란으로 만든 걸 사용해도 충분한 상황이라고, 업그레이드를 유보하는 것이다.

    일성 그룹이야, 오너가 자신에게 사소한 감정이 있어서 그럴 수 있다지만, 대호나 금성은 아직도 옛날의 관성을 벗어 던지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국내에서의 보급은 삼보 컴퓨터의 이용권 부사장의 말대로 286시대가 끝난 다음에야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유재원에게 좋은 흐름은 분명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신의 윈도우와 윈도우용 오피스를 들고 나올 때 함께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잠잠 한 걸 보니 묻어놓은 지뢰는 아직 안 터진 모양인데.”

    지뢰라는 건 ID 오피스 테스트 버전에 이미 담아 놨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떤 방식으로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하는지 모르니 의도대로 잘 터질지는 확신이 없다.

    하여튼, 나중에 윈도우용 오피스와 경쟁하게 된다더라도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기업의 일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심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국내 기업들은 이미 끈끈한 관계였다. 기업들이 MS-DOS를 대량으로 구입하기 시작한지 몇 년이나 되었다.

    무시할 수 없는 수량이라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국 지사가 있을 정도다.  이러한 영향력을 지렛대로 삼아 ID 오피스보다 여러모로 부족할 MS 오피스를 억지로 우겨 넣을 수도 있다.

    어쩌면 해외시장은 선점했는데, 국내 시장은 지지부진한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ID 워드프로세서만이라도 286에서도 돌아가는 라이트 판을 내야 하나?”

    386으로 사양이 올라간 결정적인 이유는 스프레드시트 때문이다. 빠른 속도, 대량의 데이터 처리를 위해서 386의 처리 능력이 필요했다. 반면 워드프로세서는 복잡한 처리 능력을 요구하진 않는다.

    메모리에 접근하고 관리하는 소스코드를 조금 하향시키면 286 용으로도 만들 수 있다. 대신 286 버전은 ID 오피스가 강점으로 내세운 동적 오브젝트 관리 기능은 사용하지 못하고, 속도도 좀 느려질 거다.

    가장 큰 문제점은 호환성이다.

    286버전에서 만든 워드 파일은 ID 오피스에서 열 수 있는데, 반대로 ID 오피스로 만든 워드 파일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동적 오브젝트 관리자를 통해 링크가 걸린 파일은 스프레드시트나 프레젠테이션의 라이브러리를 공유하는데, 286의 성능으로는 라이브러리를 돌릴 수 없다.

    “그래도 시장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만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 해봐야지.”

    여러 가지를 따져 봤을 때, 워드만이라도 286용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결정하면 바로 행동하는 유재원이다.

    ID 워드프로세서의 소스코드를 불러와서 메모리 관련 부분을 띄워 놓고, 286에 맞게 고쳐 나가기 시작했다.

    메모리를 다루는 파트는 제법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하루 이틀 사이에 수정을 완료할 수는 없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니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첫날부터 최대한 작업을 해놓는 거다!

    따르릉.

    "응? 누구지?"

    막 기세를 올리려는데, 전화기가 눈치도 없이 울렸다. 괜히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받는 유재원이다.

    “여보세요? 네? 아! 장관님 오랜만이네요!”

    전화의 주인공은 눈치도 없이 산통을 깬 불청객에서, 귀한 손님으로 순식간에 격상되었다.

    바로 체신부의 오명 장관이 유재원에게 전화를 넣어준 것이었다. ID 오피스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이런 기쁜 소식은 왜 직접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타박하셨다.

    뭔가 성과도 없이 찾아뵙기 민망했다는 것이 첫째다. 두 번째는 자신에 대한 호감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나 확신이 없었다.

    비록 오명 장관은 정보통신 기술을 잘 아는 관료였지만, 일단은 정치에 발을 담근 사람이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으니 맹목적인 신용은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정부는 한창 공안 몰이 중이었고, 그전엔 신도시 이야기로 떠들썩했었다. 지금도 분당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위험한 시절에 오명 장관을 자주 만나면 색안경을 끼고 볼 사람들이 많았다.

    -좋은 일이 있는데, 한 번 올라올 테냐?

    “그럼요! 부르시면 가야죠!”

    좋은 일?

    뭘까? 설마 정부가 ID 오피스를 전격적으로 채용해주겠다고 하는 걸까? 하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XT가 다수였고, 286도 이제 보급되는 중이었다.

    그러면 뭘까?

    좋은 일에 대해 궁금해진 유재원은 최대한 빨리 서울행을 준비했다.

    좋은 일이라는 건 바로 다음 날 확인할 수 있었다.

    체신부 장관실에서 만난 오명 장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ID 오피스 테스트판도 하나 드린 후에야 본론이 나왔다.

    “ISDN이요? 벌써요?”

    오명 장관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ISDN 망의 설치가 끝났고, ISDN과 해저광케이블과도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래, 시범 서비스가 7월쯤에 시작할 거다. 시범 서비스 대상 업체에 ID 테크놀로지와 유재원 너도 넣었단다. 조만간에 한국통신에서 연락이 올 거다.”

    “우와!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2,400 bps 모뎀으로 미국에 있는 실리콘밸리 팀과 소통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완성된 소스코드를 주고받으려면 압축을 해도 한세월이 걸렸다. 천천히 차오르는 막대 그래프를 보면서 인내심 수련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ISDN이라면 2,400 bps 모뎀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를 뿜어줄 것이다. 그러다가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 바로 ADSL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고, 국가의 경제력이 커지면 전국에 광케이블을 깔아서 진정한 기가비트 인터넷 시대로 가는 거다!

    하여튼 ISDN을 통해 미국과 빠른 속도로 연결되면, 다양한 업무가 가능해진다. 사내 인트라넷을 만들고, 메신저도 만들 수 있다.

    메신저 기능을 통해 문자는 물론 온갖 파일을 주고받으면서 훨씬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게다가 미리 만들어둔 메신저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것이 오명 장관의 마지막 사업이라는 것이다.

    “후, 재원이 너 같은 영재을 열심히 지원해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구나.”

    오명 장관은 내달부터 세계 박람회 조직위원장으로 영전하는 게 확정이 되었다.

    “아닙니다. 이제껏 받은 것도 큽니다. 열심히 일해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기업을 만들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말년에 재원 군과 같은 바른 인재를 만나서 다행이야. 체신부 일 중에 제일 보람이 있는 일이었어. 내 후임이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잘해놓으마.”

    “아이고, 그렇게까지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회귀 전에 마스터플랜을 설계할 때 노태우 정부 관료를 통해 이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민선이긴 해도 마지막 군사 정부였으니 말이다.

    진짜 마음 같아선 전별금이라도 두둑이 드리고 싶다. 하지만 어린 게 문제다. 봉투를 드리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다. 나중에 오명 장관님이 먹고 살 걱정을 하게 될 때 회사 고문으로 불러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참, 내가 주관하는 행사도 하나 남아 있다.”

    “행사라니요?”

    “대통령 배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대전(大戰)이다. 개최 날짜는 7월 중순 즈음으로 잡고 있다.”

    말 그대로 한국의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만든 제품을 초청해 소개하고, 전문가와 일반인 사용자들이 사용해보고 평가를 해서 순위를 다투는 대회라고 한다.

    기획자는 유재원과도 인연이 있는 김원중 부장이다.

    그분은 공무원답지 않게 의욕과 행동력이 넘치는 분인가 보다.

    학교에 1만 대가 넘는 컴퓨터를 보급하느라 바쁘실 텐데, 이런 행사를 또 기획했다.

    그렇지만 간단히 해주시는 설명만 들어 봐도 뭔가 급조된 티가 역력한 대회다.

    장소 섭외도 아직 진행 중이고, 프로그램을 보여줄 컴퓨터도 참가할 회사에서 다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다.

    어떻게 보면 대회의 개최가 무척이나 공교롭다.

    마치 유재원이 ID 오피스라는 신제품을 딱 완성한 시점에서 이런 대회가 떡하니 생겼다. 자신을 밀어 주려고 만든 것 같기도 하고 빡빡한 공안정국 때문에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대통령 배라는 이름이 걸린 만큼, 행사 중에 대통령이 한 번은 방문할 거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ID 테크놀로지도 최대 규모로 참가하겠습니다.”

    뭐 어떤가.

    유재원이 전생에 후회하는 것 하나가 줘도 못 먹었던 일이었다.

    이유도, 근거도 없는 그저 막연한 망설임 때문에 엄청난 기회를 앞두고 놓지 쳤다. 오랜만에 나타난 인연이 좋아하는 티를 내는 걸 보고도, 자기가 본 게 진짜 맞나 싶어서 망설이다가 떠나버렸다.

    그런 경험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일단 기회가 있으면 부딪쳐 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면 된다.

    유재원과 오명 장관의 환담은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며칠 후.

    “하암…, 여보세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 유재원이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부모님의 단잠이 깨기 전에 유재원이 먼저 받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를 겨우 넘긴 시간이었다.

    -보스, 접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역시 레밍턴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유재원은 고개를 흔들며 잠을 쫓아냈다.

    레밍턴과의 통화는 보통 유재원이 미국으로 전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현재 고착화된 업무의 방식이 유재원이 전화로 지시하고, 레밍턴은 인터넷 FTP 서버에 보고서를 올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레밍턴이 유재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건, 큰일이 생겼을 때뿐이다.

    -방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역시 큰일 맞다.

    “무슨 일인데요?”

    -우리의 ID 오피스가 MS-DOS의 기본 메모리 주소 할당 정책을 크게 어기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랍니다. DOS의 다음 버전인 4.0이 곧 나오는데, 여기선 안전성을 위해 메모리 정책이 더 깐깐해져서, 우리 ID 오피스가 정상 작동이 힘들 거라고 합니다.

    잠이 확 깨는 유재원이다.

    뭐라고? 메모리 주소 정책?

    웃겨서 말이 안 나오는 유재원이다. DOS에 메모리 정책 같은 게 어디 있나. 메모리 관리 기능이 없어서 EMS니 XMS같은 확장 메모리 유틸리티가 나왔던 거다. 덕분에 ID 오피스도 자체적이 메모리 관리 유틸리티를 내장하고 있다.

    기왕 메모리 관리 유틸리티를 내장하는 김에, 여러 가지 튜닝을 적용했다. 이러한 요소는 리버스엔지니어링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든 것이다. 그러니까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요?”

    -자기들이 그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신 기술유출이 염려되니 끈끈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네요.

    “협력 관계요?”

    -네, 기술 지원과 함께 우리 회사에 투자하겠다는군요. 보스의 경영권을 보장해 줄 테니 지분의 49%를 달라고 합니다. 투자금은 500만 달러를 주겠다는군요. 49%에 500만 달러니까 우리 ID 테크놀로지의 가치를 1천20만 달러로 계산한 것이지요.

    ID 오피스를 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이 발생할 거라는 예측은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올지는 몰랐다.

    ID 테크놀로지의 작년 매출은 1,400만 달러다. 89년의 반이 지난 지금에도 좀비 크러쉬는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었고, 곧 ID 오피스가 정식 발표된다. 예상 매출액은 최소 2천만 달러 이상이다.

    이런 회사의 가치를 1천만 달러로 치는 건 헐값 정도가 아니다. 기만이자 모욕이었다. 무엇보다 안정성이 불안정하다는 말도 거짓이다.

    유료 베타테스터는 수백 명이 모집되었고, 미국 명문대 대상으로 하는 공개 테스트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불안정하다는 보고는 정말 드물었다. 그것도 ID 오피스의 문제가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의 연락은 경고였다. 협조 하지 않으면 다음 버전 도스에서 ID 오피스에 불리한 코드를 집어 넣겠다는 거다.

    땡볕이 작렬하는 시간도 아닌데 열이 확 올라오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이건 마이크로소프트가 평소 하던 짓을 그대로 자신에게 하는 것 뿐이니 말이다.

    아마 지금껏 마이크로소프트가 상대한 회사들은 이렇게 나오면 한 발 뒤로 물러섰겠지. 마이크로소프트의 악명은 이미 자자하니 말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아니다.

    “이렇게 답변해 주세요. 메모리 문제는 우리 ID 오피스의 문제가 아니라 도스의 문제라고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해결하지 못할 거면, 우리가 해결해주겠다고 해요. 하지만 우린 MS의 지분 따윈 필요 없고, 4달러, 아니 4달러도 많네요. 1달러로 충분하다고 전해줘요.”

    설마 1달러에 의뢰를 주진 않겠지.

    마이크로소프트가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도스의 메모리 문제를 유재원은 1달러라는 헐값만 받고고 풀 수 있다는 거다. 다른 말로는 너네들 실력이 1달러짜리도 아니라는 조롱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보스답군요! 알겠습니다. 저들의 반응이 기대되는군요.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 엄청나게 감사합니다~~!!

    우와~!

    이번주도 5연속 연참 성공이네요. 모두 다 독자 님의 응원 덕입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 자정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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