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6화 (76/1,007)
  • [76] 자이언트 킬러 ==============================

    #50-2

    지금 삼보컴퓨터는 컴퓨터 제조만으로 먹고 산다.

    주요 부품의 최신 동향에 대해 항상 연구하는 곳이었고, 당연히 인텔의 486 출시 소식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열심히 구하려고 하고 있지만, 아직 입수하진 못했다.

    미국의 거대 컴퓨터 업체가 대량의 물량을 예약해놓고 싹슬이 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산 중에 불량이 많은 지, 생산 물량 자체도 작았다. 오죽하면 미국 소매점에도 물건을 구경한 사람이 얼마 없을 정도다.

    반면 삼보는 한 달에 컴퓨터 4, 5천 대를 파는 동방의 조그만 회사였다. 그것도 최신의 칩이 아니라 XT나 286과 같은 구형 모델을 파는 건데, 이래서야 인텔과 같은 거대 기업이 우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일성이나 미래, 대호 같은 대기업도 삼보처럼 찬밥 신세라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제조사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유재원에게 486 샘플을 인텔이 먼저 챙겨서 보내줬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 구경하러 내려가도 되지?"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유재원에 대한 존재감은 나날이 커 나가는 중인데, 인텔이 적극적으로 챙기는 모습을 보니 이것도 과소평가였던 것 같다.

    “이제, 실행할게요.”

    설명을 마친 유재원은 ID 오피스를 실행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인텔이 왜 너희 회사를 우대하는지 알 것 같다.”

    이용권 부사장은 ID 오피스를 통해 유재원의 능력과 ID 테크놀로지의 존재감을 새롭게 인정했다.

    1시간으로 ID 오피스의 모든 기능을 살펴보기엔 짧은 시간이다. 그저 겉핥기만 해보고 마는 것이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삼보 컴퓨터에서 열심히 만들고 있던 보석글2나 다른 대기업의 자체 개발 워드 프로세서는 당장 엎어야 할 거라고 장담했다. ID 오피스에 포함된 ID 워드와 비교하면 너무도 초라해진다.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보는 대로 얻는다")를 이렇게 완벽히 구현한 워드 프로세서는 없었다.

    사용자를 위한 인터페이스도 훌륭하다. 기능도 넘치면 넘쳤지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한글 입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조합형이니, 완성형이니 싸울 필요도 없고, 두벌식 자판이니 세벌식 자판이니 고민할 이유도 없다. 완성형의 미려한 글꼴에, 조합형처럼 한글의 모든 글자를 다 사용할 수 있고, 자판은 설정에 들어가서 바꿔주기만 하면 바로 적용된다.

    “글자 크기를 키워도 깨지지 않는구나. 이걸 무슨 기능이라고 하지?”

    “윤곽선 글꼴입니다. 지금은 명조체 하나만 지원하는데, 앞으로 다양한 글꼴을 지원할 겁니다. 게다가 글꼴을 만드는 툴을 포함했으니,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글꼴을 만들어서 배포하거나 유료로 판매할 수도 있지요.”

    윤곽선 글꼴은 실리콘밸리 팀과의 시너지 효과로 탄생했다.

    유재원이 방향을 정해주면 그들은 무섭게 이뤄냈다. 덕분에 차기 버전에 들어갈 기능도 초회 버전에 넣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윤곽선 글꼴이다. 이것 말고도 추가로 수록된 유용한 기능이 많다.

    이를테면 표 만들기였다.

    시간표, 간단한 데이타 정리, 통계 등에 표는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것도 2.0에 들어갈 기능이었는데, 실리콘밸리 팀의 무서운 집중력으로 후딱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표에 간단한 계산 기능도 넣었다. 스프레드시트에 갈 것 없이 표 자체에서 4칙 연상은 물론 합산이나 평균값을 내는 게 가능하다.

    “한자 폰트도 좋구나.”

    “역시 부사장님은 알아봐 주시네요.”

    실리콘밸리 팀이 미치자, 유재원도 따라 텐션이 올라갔다. 그래서 한 일이 상용한자 1,800개를 폰트로 만드는 것이었다. 심지어 글자가 작으면 가독성이 떨어지는 윤곽선 글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12포인트짜리 비트맵 글꼴도 넣었다. 하루에 최소 30개의 한자를 작업했지만, 장장 60일 정도 걸린 대작업이었다.

    “한자가 여기 떡하니 보이는데 모를 수가 있나?”

    ID 워드를 실행하고, 그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프로그램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법률적 효과가 있는 약관이 담긴 리드미 파일이다. ID 워드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 파일과 표 등을 삽입해 놨고, 중요한 단어는 한자도 함께 적었다.

    “그런데 한자로는 어떻게 바꾸는 거니?”

    이용권의 물음에 유재원은 키보드의 오른쪽 알트키와 컨트롤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영 변환 키나 한자 키는 아직 부여되지 않아서 이걸 한영키, 한자키로 지정해 놨어요. 특히 한영 변환은 시프트키와 스페이스 바를 동시에 누르는 방법도 있고요.”

    유재원은 시범을 보였다.

    백이라는 단어를 치고 오른쪽 컨트롤키를 누르자 백이란 음을 가진 한자들이 쫘르륵 나왔다. 마우스 커서나 화살표 키로 원하는 한자를 골라 클릭이나 엔터키를 치면 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커서가 놓인 한자에 뜻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용자라도 쉽게 원하는 한자를 찾을 수 있게 넣은 툴팁 기능이다.

    “이런 거 있으면 정말 편하겠다! 한자 안 외워도 되겠어!”

    이재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프로그래밍에 대해 좀 더 전문적 지식이 있는 이용권은 그저 입이 떡 벌어졌다. 저런 걸 다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덕이다.

    “기본 기능도 중요하지만,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법이죠.”

    비단 ID 워드프로세서만 훌륭한 게 아니다. ID 스프레드시트도 워드만큼이나 혁신적이었다. 그래픽 모드로 작동되면서도 가벼웠다. 수식과 수식을 연동해서 복잡한 연산을 할 때도 빨랐다.

    무엇보다 오피스 프로그램 안에 든 프로그램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데, 이를 잘 이용하면 기업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딱 들었다.

    “이건 뭐, 어마어마하구나. 번들로 제공할 게 아니라, 우리 삼보 컴퓨터가 업무용으로 써야겠구나. 한 카피에 얼마니?”

    “음, 프로그램마다 4만 원씩 받으려고 합니다.”

    “오피스는 4개 프로그램을 모은 세트니끼 16만 원이겠구나. 저렴한 가격은 아니네. 하긴 이걸 미국의 개발팀과 함께 만들었다고 했지? 개발비용도 엄청나게 들었을 테고, 하나 사면 오래 사용할 수 있으니 게임처럼 싸게 팔순 없겠지.”

    유재원에 대한 호감 때문일까.

    제작자인 유재원이 해야 할 말을 먼저 꺼내주시는 이용권 부사장이었다. 그의 말은 모두 정답이었다.

    키보드 워리어 같은 건 개인 사용자가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피스는 기업이나 관공서, 학교 등에서 사용할 전문 프로그램이다. 많이 팔리진 않을 테니, 가격을 높인 것이다. 하지만 16만 원이란 가격은 무척이나 저렴한 거라고 자부할 수 있다.

    전생의 공룡기업인 MS의 오피스 제품군은 웬만해선 20만 원 아래로는 살 수 없었다. 대학생 프로모션을 받으면 좀 저렴한데, 대학교에 다닌다는 증명을 하고서야 저렴한 가격이 적용된다. 게다가 기업에서처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거라면 무조건 정가다.

    “삼보 컴퓨터는 ID 테크놀로지의 파트너 회사니까 정가보다는 저렴하게 공급해드리겠습니다. 전처럼 20% 정도 할인해서 12만8천 원에 드릴게요.”

    “하하, 고맙구나. 일단 내일 회사에 가서 회장님께 보여드린 후에 정확한 구매 수량은 나올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숫자가 많진 않을 거야. 이유는 알고 있겠지?”

    “386 이상이라는 사양 때문이죠?”

    “그래. 지금 한국은 286시대란다. 우리 회사의 사무직원들이 사용하는 업무용 컴퓨터도 XT나 286이거든. ID 오피스를 돌릴만한 컴퓨터는 몇 대 없어. 게다가 아래하 한글이라는 워드가 286이나 XT에선 잘 돌아가거든.”

    아, 한글!

    서울대생 이찬진이 동료 몇을 모아 만든 아래하 한글이 정식 출시된 지 두 달 정도 지났다. 삼보컴퓨터도 구해서 사용해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스프레드시트를 써야 하는 경리나 회계용 컴퓨터는 386으로 교체해서 ID 오피스를 쓰는 게 좋겠지. 그리고 개인용으로 파는 386 모델에 ID 워드프로세서 단품 정도는 기본 번들로 넣을 수 있을 거다.”

    “헤헤, 고맙습니다.”

    유재원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다.

    이번에도 이용권 부사장은 유재원의 작품을 무난하게 사주었다. 회사 사무용으로 쓴다고 했으니, 삼보 컴퓨터와 협력하는 부품 회사들도 자연스럽게 ID 오피스를 쓰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기업 본사에서 ID 오피스를 사용하면 종속 관계에 있는 하청업체나 협력업체들도 자연스럽게 ID 오피스를 쓸 것이다.

    학교나 관공서도 마찬가지다. 위에서부터 물꼬를 트면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낙수효과 아니겠는가.

    물론, 유재원은 낙수효과만 기대하진 않는다. 밑에서부터의 공략하는 전술도 빼먹지 않았다. 곧 사회의 초년생이 될 대학생이 일찌감치 ID 오피스에 익숙해지도록 대학교는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풀 작정이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이나 유럽 등등, 전 세계 공통이다.

    나중에 가면 반칙이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지금은 그저 첨단 마케팅 기법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시대였다.

    “아빠! 이제 일 다 본 거죠? 그러면 이제 키보드 워리어 좀 해요!”

    유재원과 이용권이 ID 오피스를 만지는 걸 한참이나 보고 있던 이재형이 기다렸다는 듯 키보드 워리어를 언급했다.

    보기보다 끈기가 있는 성격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또 한 번 막판 보스를 때려잡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죠.”

    우두둑 손을 꺾으며 시동을 건 유재원은 바탕화면의 키보드 워리어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시작 메뉴에서 파이널 스테이지로 직행하는 코드를 집어넣는 것으로 단번에 보스전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각.

    시애틀 레드먼드, 마이크로소프트 헤드쿼터는 불야성이었다.

    미국은 근무 시간을 칼 같이 지킨다고 하는데, 그건 전통의 굴뚝기업이나 소비자와 바로 만나는 서비스 업종의 이야기였다.

    IT 기업의 대표격인 마이크로소프트의 현재 상황은 출시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한국의 게임개발사 상황과 비슷했다. 차세대 운영체제인 윈도우의 3.0 버전 출시가 이제 1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없던 야근도 점점 늘고 있다.

    발매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 핵심 인재들은 밤늦도록, 심지어 회사에서 지내면서 개발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이크로소프트도 자신들의 그래픽 운영체제인 윈도우가 2.0 버전까지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모드로 작동하는데, 도스의 텍스트 모드와 다를 게 하나 없었고, 제대로 된 응용 프로그램도 자체 개발한 제품 말고는 얼마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요구 사양은 높았으니 성공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번 윈도우 3.0은 정말 칼을 갈고 제작 중이었다.

    맥 PC와 동급의 그래픽 인터페이스에 가상 메모리를 사용해서 멀티태스킹 능력을 강화하고, 멀티미디어까지도 지원하는 그런 운영체제였다.

    다만 구현해야 할 기술의 난이도가 높아서 벌써 개발 일정에 착오가 하나, 둘 생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경영자인 게이츠도 밤늦은 이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키가 무려 196cm나 되는 덩치를 자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발머였다.

    “무슨 일이야?”

    게이츠는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한 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자신의 사무실을 벌컥 열고 들어올 사람은 회사에서 스티브 발머뿐이었다.

    “빌, 내가 재미있는 걸 하나 주워왔어. 한 번 보라고.”

    “뭐? 신작 게임이라도 되나?”

    “이봐, 빌, 내가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자네도 알잖나. 이건 그보다 훨씬 흥미로는 거라고. 오피스 프로그램이야.”

    오피스라는 이야기에 빌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스티브를 보았다. 스티브 발머의 손에는 라벨이 붙어있지 않은 디스켓 7장이 들려 있었다.

    “이름이 ID 오피스라는군. 유료 베타테스트 중이라는 데 반응이 화끈해.”

    “ID라니. 많이 들어 본 단어로군.”

    “그래, 타자 게임으로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떠들썩했던 바로 그 ID 테크야. 거기서 내놓은 신제품이라는 거지.”

    “게임이나 계속 만들지, 하필 오피스를 선택했군. 수준은 어떻지? 쓰레기인가?”

    개발 일정 차질로 스트레스를 받은 게이츠는 띠꺼운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작은 업체라도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까칠해지는 법이다.

    “나도 모르지. 실리콘밸리 사무실에서 소포로 보내준 걸 이제 확인한 것이라서 말이야.”

    저렇게 말하니 게이츠도 궁금증이 일어났다.

    결국,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해 보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스티브는 1번 디스켓을 넣고 설치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테스트용 시리얼 키도 스티브 발머가 어떻게 구한 모양인지, 문제없이 마무리했다.

    설치는 문제 없었다. 셋업도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 게이츠와 발머에게 덕진리 뒷산의 모습이 담긴 초록빛 바탕화면과 유려한 모양의 리본인터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스로 PC운영체제를 선점한 뒤로 기고만장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드디어 자신의 대적자를 인식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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