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자이언트 킬러 ==============================
#50-1
이용권 부사장과의 미팅 장소는 압구정에 있는 그의 아파트였다.
이름도 찬란한 압구정 현대의 65평형으로, 사회에서 성공한 그의 위치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다.
“와, 외제 자동차가 엄청나게 많네요.”
서울의 외제 차는 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의 주차장에 있는 것 같다.
쉽게 볼 수 없는 벤츠가 부지기수다. 아주 뜸하게 롤스로이스도 보인다.
그랜저는 숫자를 세지도 않았다. 사모님들 장보기 용도로 쓰는 모양인지 아파트 앞 주차장에 수도 없이 많았다. 오히려 포니 같은 차를 찾기 힘든 게 이곳의 주차장이다.
21세기엔 흔한 차들이지만, 지금은 89년이었다. 무척이나 희귀한 모습이다. 덕분에 차들이 죄다 클래식한 디자인이라서 그런지 자동차 박물관에 근현대 모델을 보는 것 같다.
확실히 부자가 사는 아파트답다.
주차장에서만 이런 감상을 받은 건 아니었다.
아파트에 입성할 때도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초대한 집주인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고 바리케이드를 내려놓고 쉽게 올려주지 않았다. 인터폰으로 확인 작업이 끝난 후에야 출입증이 나왔고, 어디에 주차해야 한다고 지정까지 해주었다.
“진짜 부자 동네답네요. 사장님도 이런 아파트에 사시고 싶지 않으세요?”
미국에서 한 번 대박을 터트리고, 분당에서도 대박이 예정된 유재원도 마음만 먹으면 입성할 수 있다. 하지만 매물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라서, 매각자가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전 별로네요.”
그렇다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생활은 내키지 않는다.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에서 사는 건 전생에 신물이 날 정도로 했다.
마을 앞엔 제법 큰 강이 지나고, 뒷산이 바치고 있는 덕진리가 최고다.
배산임수의 지형이라서 겨울에 찬 바람이 마을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여름엔 마을 앞 강에서 시원한 물놀이도 할 수 있다.
음, 수영은 취소. 아직 하천 정비 사업이 끝나지 않아서 좀 더러운 터라 들어갈 마음이 들진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마을 환경 개선 사업에 꾸준히 돈을 써서 개선하면 유럽의 멋진 시골 마을처럼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수경이 아버지처럼 마을 사람 중에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을 골라서, 미래 비전이 보이는 사업들을 추천해드리면, 여기 압구정 현대를 능가할 부자 마을로 거듭나는 거는 일도 아니겠는가.
유재원이 회귀했던 첫날 공표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에, 제가(齊家)의 범위를 마을 정도로 확대한다면 무리도 아니다.
김대석은 현대적인 아파트보다 시골 마을이 좋다는 유재원의 취향을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지정된 주차 장소에 도착했다.
“자, 같이 올라가죠.”
이번에도 차에 남으려던 김대석을 끌고 내리는 유재원이다.
아직 운전기사 할 때의 관성이 남아 있어서 이런 모양이다. 아직 정식 발령된 건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어서 와, 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지?”
이용권 부사장은 면바지에 피케셔츠라는 편안한 차림으로 직접 문을 열어주며 유재원을 맞이했다.
그런데 문 앞에 나와 있는 이들은 이용권뿐만이 아니었다. 이용권의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도 함께였고, 중학교 2, 3학년은 되어 보이는 아이가 같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ID 테크놀로지의 유재원입니다. 덕분에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집에서 보자고 할 때, 예상은 했기에 놀라진 않았다. 마중을 나와주신 분들께 정중히 배꼽 인사를 올리는 유재원이다.
이용권의 아내나 아들도 김대석을 보고 이상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용권으로부터 유재원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누누이 들어왔다. 다만 생각보다 어린 모습이 신기했을 따름이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은 유재원은 이용권을 따라 거실로 갔다.
“안녕? 난 이재형이야. 중학교 3학년이니,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거실에 앉자마자 이용권의 아들이 제일 먼저 말했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강압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친근하게 나와서 유재원이 어색할 지경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유재원입니다. 이쪽은 제 수행비서 김대석이고요.”
“응! 알고 있어. 그런데 진짜 국민학교 6학년 생이야?”
“네, 성적표 보여드려요?”
“헤, 성적표를 들고 다니는 거야? 공부도 잘하나 보네?”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말입니다. 뭐, 공부도 자신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복습해서 이제는 국민학교 과정이나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도 문제없다.
기억의 궁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평균 95점 이상의 고득점에 자신이 있다. 수능이라면 살짝 긴장해야겠지만, 지금 수능을 보더라도 서울 소재의 좋은 대학에 들어갈 점수는 딸 수 있을 것이다.
뭐, 지금은 수능체계가 아니라 학력고사 시대라서 훨씬 못 나올 수도 있지만, 유재원은 한국 대학교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찜 해놓은 학교는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실리콘밸리가 꾸준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인재를 수급해주는 학교가 스탠퍼드였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도 있고 MIT도 있긴 하지만, 유재원이 보기에 스탠퍼드만큼은 아니었다.
정보통신업계에서 성공한 기업들의 오너나 경영자, 핵심 개발자의 비중을 보면 스탠퍼드가 압도적이다.
이미 실리콘밸리에 사업장도 있는 마당이니, 이미 유재원의 진로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한 가지 고민이라면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다 거치고 스탠퍼드에 가느냐? 아니면 검정고시 같은 제도를 이용해 일찍 가느냐 정도뿐이다.
“하여튼, 신기해서 그래. 네가 진짜 키보드 워리어 만든 사람 맞지? 나 그거 죽어라 하고 있는데도 파이널 스테이를 못 깼거든. 그런데 넌 쉽게 깨더라? 오늘 보여줄 수 있지? 하여튼 고마워. 네 덕분에 내 영타 속도가 400타 정도로 올라갔거든. 손이 정확하고 빨라지니 피아노 연습하는 데도 도움도 되었어.”
자신에 대한 이재형의 친근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다.
효자 상품이자 히트 상품인 키보드 워리어였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파이널 스테이지를 쉽게 깬 걸 알고 있지? 설마 PBS의 컴퓨터 클로니클 같은 걸 챙겨 보나?
이재형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마침 안주인께서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내놓으셔서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커피도 믹스 커피가 아니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한 것에 적당량의 물을 탄 아메리카노여서 유재원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유재원이었다.
어떻게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는지, 미국 진출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면서 감탄하셨다. 전명헌 회장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라서 살짝 지겹긴 했지만, 이분들 반응은 또 처음이라서 원하는 대로 설명을 했다.
대신 미국의 성공 신화를 다 이야기 하고, 질의 응답 시간을 갖고 나서야 제대로 된 세일즈를시작할 수 있었다.
“벌써 신제품을 완성했다고?”
이용권이 깜짝 놀랐다.
“네, ‘벌써’는 아닙니다. 작년 11월쯤에 시작해서 6월 초에 테스트 판을 완성한 거니까요. 지금은 공개 테스트 중인데, 여기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리테일판으로 확정이 될 겁니다.”
유재원이 김대석을 슬쩍 보았다.
미국 이야기는 김대석도 처음 듣는 거라서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그러다 유재원과 눈빛이 맞자 아차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두툼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디스켓 케이스가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테스트용 오피스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무슨 용량이 그렇게 크지? 2HD 디스켓으로 일곱 장이네?”
이용권은 케이스를 열어보고 더 놀랐다.
2D 디스켓으로 생각했던 게 2HD 디스켓이었다. 정확한 용량은 2D가 360KB였고, 2HD는 1.2MB였다.
압축된 상태였으니 하드디스크에 풀어 보면 용량은 배로 늘어나서 15MB 정도 나간다.
“권장사양이 386, VGA, 15MB의 하드디스크 공간이거든요. 고해상도 리소스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최신의 기술을 모두 다 넣다 보니 이렇게 용량이 커졌네요. 대신 설치할 때 옵션으로 부가 기능을 포함하거나 제외할 수 있어요. 게다가 필요한 프로그램만 설치하면 요구하는 용량이 많이 줄어들어요.”
컴퓨터의 장점이 커스터마이징이다.
필요한 프로그램만 설치하고, 부가기능을 과감히 빼버리면 용량이 많이 줄어든다. 하지만 권장하진 않는다. 비싸게 산 프로그램이니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일단 한 번 보자.”
남자들이 컴퓨터 앞으로 모였다.
삼보 컴퓨터 부사장님이라서 컴퓨터도 삼보 컴퓨터였고, 부품도 좋았다. 유재원처럼 486을 먼저 받아본 건 아니지만, 386중에서 제일 좋은 모델을 사용했고, 하드디스크의 공간도 넉넉했다.
일단 인스톨을 실행해서 하드 디스크에 설치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인스톨 프로그램도 무척이나 세련된 모습이다. 초보자를 위해 한방에 설치하는 기능도 있고, 전문가를 위한 옵션을 통해 사용자가 관여할 수 있는 항목이 많았다.
물론 다 한글로 나온다.
인스톨을 실행하면 물어보는 게 사용하는 언어를 영어와 한글 중에 고를 수 있게 해두었기 때문이다.
“시리얼 번호?”
이것저것 다 설정하니, 제품 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온다. 이용권 부자는 디스켓 케이스에서 시리얼 번호를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애초에 적어두지 않았으니 나올 일이 없다.
유재원은 영문과 숫자가 혼합된 16자리 난수를 빠르게 적어 넣었다.
“이걸 다 외우고 다니니?”
“암기하는 건 자신 있습니다!”
기억의 궁전 덕에 두꺼운 책도 억지로 외울 수 있는 능력자가 유재원이다.
절대 기억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의 궁전에 적어 놓은 걸 다시 꺼내 보는 건,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해서 반쪽짜리였다.
시리얼 번호를 넣자 인스톨이 시작되었다.
디스켓 읽는 속도도 느리고, 장수도 7장이나 되어서 완료하기까지 조금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완료 후에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 설정에 맞는 셋업을 해줘야 해요.”
SETUP이라는 파일을 실행했다.
이번에도 딱히 어려운 건 아니다.
화면의 모든 글자는 한글이었고, 엔터키만 몇 번 누르면 설정이 끝이다. 하드웨어의 ID를 읽어서 드라이버를 자동으로 잡아주는 기능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특이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잡아낼 수 있다.
이용권 부사장의 컴퓨터도 그랬다.
인텔 CPU, 일성전자 메모리, ATI 윈더라는 VGA카드, 국산 마우스, 101키 한글 키보드, 80MB 하드디스크, 엡손 24핀 프린터, 사운드블라스터 카드와 롤랜드 MT-32 미디 모듈 등등.
모두 다 유명한 제조사의 제품이라서 딱딱 나왔다.
이렇게 장치 설정이 끝나자 벤치마크가 시작되었다.
화면에 온갖 문자가 와르르 올라오기도 하고, 도형이 빠르게 그려졌다가 지워지기도 했다. 10초로 짧긴 해도 동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어라? 이건 뭐지?”
“키보드 워리어에 있는 벤치마크처럼, 컴퓨터 성능이 사무용 작업에 적합한지 체크하는 거예요. 종합 점수로 1,000점 이상 나오면 S급이죠.”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수가 892점이라는 점수가 나왔다. B급이다. 자신의 시스템에 적잖이 자신감이 있었던 이용권은 B급 점수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CPU 속도는 386 DX-33MHz로 훌륭하다. 그런데 메모리 용량은 4메가나 되는데 작동 속도가 좀 느리고, 2차 캐시 메모리도 32KB로 작은 편이다. 하드디스크도 좀 구형이다. ATI VGA 카드도 초창기에 나온 VGA 카드라서 썩 훌륭한 부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 기업에 하청을 줘서 만든 마우스였다. 삼보 컴퓨터 로고가 박혀 있는 건 좋은데, 마우스 커서의 갱신 속도가 고속모드인 85Hz를 지원하지 못한다.
“500점만 넘으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거 1,000점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위로를 해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용권 부사장이다. 컴퓨터 업체의 임원인데 B등급을 받은 건 수치로 느끼는 모양이다.
“486 CPU, 2MB 이상의 메모리, 글라이드 X를 지원하는 최신 VGA, 로지텍 마우스를 쓰시면 1,000점을 넘으실 수 있습니다.”
“486? 지금 그걸 입수한 사람이 있다는 거니?”
“네, 우리 집에 있어요. 인텔에서 먼저 사용해 보라고 본체를 보내줬거든요.”
“컥! 재원이 너희 집에 486이 있다고?”
이용권은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으로 가시기 전에 추천 버튼!
연참 기록을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