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2화 (72/1,007)
  • [72] 자이언트 킬러 ==============================

    #48-2

    1989년 6월 17일 토요일.

    이날은 덕진리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치킨이 덕진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전국에서 최초의 치킨은 아니다.

    86년에는 멕시칸치킨, 88년에는 처갓집 치킨과 같은 브랜드는 몇 년 전에 나왔으니까. 그런데 이들 지점은 덕진리는커녕 여주에도 들어오진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치킨의 맛도 좀 옛날 입맛에 맞춰져서 유재원 취향은 아니었다.

    입 맛에 맞는 치킨이 없으면? 이제는 만들면 된다!

    강찬호 지사장에게 특별한 치킨을 특식으로 부탁한 건 저번 주 토요일이었다.

    날짜만 봐도 알 수 있듯 강찬호 사장은 일주일이나 먼저 레시피를 받았지만, 즉각 메뉴를 완성하지 못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던 탓이다.

    생닭을 조각내서 염지를 한다는 것도 낯설었고, 치킨 파우더를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튀김기계가 없으니 적정 온도인 180도를 일정히 유지하는 것도 불조절 노하우기 필요했다. 물엿과 케첩, 고추장 등을 섞은 양념의 비율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오피스 완성 이후 한가해진 유재원이 방과 후 조리장을 찾아서 직접 맛을 보며 여러 조언도 주면서 일이 좀 풀렸다. 나중엔 아예 직접 조리도 하면서 치킨의 맛을 21세기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덕분에 시장 통닭이 아닌, 적당한 두께의 크리스피한 껍질에 짭짤한 속살을 가진 프라이드 치킨이 완성되었다.

    유재원은 프라이드 치킨만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프라이드 치킨에 특별한 비법을 담아 준비한 양념을 버무리면 또다른 풍미를 가진 양념치킨을 만들었고, 간장 소스를 발라서 간장 치킨까지 완성했다.

    이렇게 완벽한 치킨이 나오자, 조리사 분들에게 맛을 보여주었다. 다들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곤 곧장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시작은 수경이네 양계장에 생닭 652마리를 주문했다.

    무슨 수백 마리나 주문하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치킨이면 모름지기 1인 1닭 아니겠는가.

    그렇게 숫자가 많으니 필요한 일손도 많아졌다.

    준비된 생닭을 조각내 염지하고, 치킨 파우더를 입히는 건 죄다 손으로 해야 한다.

    결국, 임시로 추가 일손을 구해서 작업을 시작했다.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시식용 치킨을 맛보여주었기에, 자기 일처럼 열심히 준비해주었다.

    덕분에 17일 토요일에 드디어 특식 메뉴로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1인 1닭이라고 기분을 낸 유재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1인 1닭을 할 위대한 아이들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남을 걸 처리할 목적으로 여주 지사에 치킨 상자를 준비하도록 했다. 치킨 상자가 뭔지 모르는 강찬호 지사장을 위해서 유재원은 21세기 디자인을 그대로 옮겨 주었다.

    여기에 포장해서 선생님이나 급식실 직원들도 나눠주고, 동네에도 돌리기로 했다.

    그냥 나눠주면 아쉬우니 상자 겉에 ID 테크놀로지의 로고와 함께 신제품 ‘ID 오피스’ 완성 기념이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이 고소한 냄새라면 고구마튀김인가?”

    “아닌데! 이건 고기 튀길 때 나는 냄샌데?”

    덕분에 17일 오전부터 덕진 국민학교 주변으로 닭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막 배가 고파지려는 11시쯤에 기가 막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맡아봤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풍미를 담고 있었다.

    맛을 모르는 아이이지만 침이 꼴딱 넘어갔다.

    “히히, 난 알지. 다들 기대해도 좋아! 이제껏 나온 급식 중에 최고로 맛있을 거야!”

    수경이가 자긴 맛을 안다고 으스댔다. 양계장을 하는 덕에 먼저 치킨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맛을 아는 덕에 참기가 더욱 힘들었다. 치킨 경험자인 유재원도 마찬가지 이야기였다.

    -6학년 입장하세요!

    침만 삼키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향했다.

    식판을 내밀면 다리 하나가 포함된 6조각을 올려준다. 프라이드 2개 양념 2개, 간장 2개다.

    적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수경이네 생닭이 워낙 커서 한 조각도 크다. 한 마리에 1.4~1.5kg씩 나가는 육계였으니 살도 통통하고 뼈도 컸다.

    밥 담는 칸에 3개나 4개를 넣으면 꽉 차서 다른 칸에다 받아야 했다. 여기에 콜라 캔 하나와 마요네즈와 케첩을 넣고 버무린 샐러드가 나온다.

    완벽한 치킨 세트다.

    돌멩이도 씹어 먹을 듯 혈기 왕성한 나이의 아이들은 맹렬히 치킨을 뼈만 남기고 다 먹어 치웠다.

    닭 다리를 크게 한 번 베어 먹은 유재원은 눈물이 찔끔 나온다.

    21세기의 딱 그 맛이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맛있는 것 같다.

    21세기엔 병아리가 막 닭으로 되었을 때 잡아서 치킨을 만들었다. 부드럽긴 한데 닭 자체의 풍미가 부족했다. 지금은 충분히 자란 어른 닭을 써서 쫄깃하고 맛있었다.

    “우냐?”

    유재원을 보고 친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유재원이 주민이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감동에 살짝 이슬이 맺힌 유재원과 달리 주민이 녀석은 또르륵하는 물방울이 맺힐 정도였다.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억울해서 그런다! 세상에! 무슨 닭튀김이 이리 맛있냐? 그것도 모르고 난 맨날 쇠고기만 먹었잖아! 이제는 무조건 통닭이다!”

    어이구.

    철없는 녀석. 배부른 소리도 갖가지구나.

    한우는 비싸서 못 먹는 고급육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치킨이 대중화된 것도 소고기가 비싼 게 분명 한몫할 거다. 저렴한 가격에 밥 대용으로도 되고, 간식으로도 되고, 술안주로도 된다. 그러니 치느님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한우는 항상 치킨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나도! 치킨만 먹으래.”

    차분한 성격의 영식이까지 반응할 정도였다. 하여간 치킨을 처음 영접한 녀석에겐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라서 반박은 하지 않는 유재원이다.

    “그렇게 좋으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치킨데이로 고정할까?”

    “치킨데이?”

    “이렇게 치킨이 나오는 날이지.”

    “우와! 대박!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은 너무하는 거 아니냐? 기왕 하는 거 일주일에 한 번씩 하자!”

    “그건 좀 무리다. 치킨 만드는 데 잔손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돈은 문제가 아닌데, 만드는데 조리사분들의 수고가 너무 많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이번에 준비한 650마리 치킨도 엊그제부터 준비해야 했다. 생닭 숫자를 좀 줄인다고, 일이 크게 주는 것도 아니다.

    “하여튼! 난 2탕째 간다!”

    순식간에 6조각을 다 해치운 주민이가 다시 한 번 배식을 받으러 갔고, 영식이도 뒤를 따랐다. 반면 유재원은 빨리 먹는 것보다는 꼭꼭 씹어 먹으면서 느릿하게 배를 채웠다.

    유재원은 아직도 180cm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빨리 먹으면 살이 옆으로 잘 찌는 것이고, 꼭꼭 씹어 먹으면 위로 자랄 거라는 믿음으로 식습관 자체를 바꿔버렸다. 이렇게 편식하지 않고 균형 잡힌 식사를 계속하니 진짜 희망이 보였다. 6학년이 되면서 160cm대에 오른 것이다.

    전생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지금 먹고 있는 치킨도 살 대신 키가 되길 바라면서 유재원은 천천히 먹는 중이다.

    즐거운 치킨 파티를 하고 집에 와 보니 팩스가 많이 쌓여 있었다.

    다행히 결정을 시급하게 바라는 건 거의 없었고, 회사 조직별로 진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한 보고서들이 많았다.

    “오? 좋았어.”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삼보 컴퓨터의 이용권 부사장님과의 미팅이 내일 오후로 잡혔다는 것이다.

    유재원은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좋다고 했는데, 이용권 부사장은 내일이 일요일이지만 보기로 했다.

    보통 높은 분들은 스케줄을 따지면서 휴일은 잡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행동력이 좋고 합리적인 성격의 이용권 부사장은 체면 같은 걸 챙기지 않았다.

    지금의 유재원을 만들어 준 단초를 제공한 분이었기에, 유재원 역시나 호감이 있었다. 그러니 삼보 컴퓨터가 ID 오피스도 공급받겠다고 한다면 다른 회사보다 나은 가격으로 우대해줄 생각이었다.

    미래 그룹 왕회장님과는 아직 약속이 잡히진 않았단다. 비서실에 연락은 했는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하긴, 미래 그룹 내부 사정이 좀 복잡하긴 하지.”

    얼마나 복잡하냐면, 아직도 차기 미래건설 회장이 지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남부터 막내까지 다들 왕회장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서 경쟁 중이었고, 이들이 가진 세력들도 거의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다른 쪽 세력을 특출나게 압도하지 못하니, 대신 미래건설 회장 자리에 앉는 걸 방해할 수는 있으니, 인사 공백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왕회장님은 무슨 생각일까?”

    이러한 왕자들의 다툼에는 왕회장 전명헌의 침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왕회장이 왜 왕회장인가. 미래 그룹 회장진 중에 제일 높은 회장이라는 뜻도 있지만, 전명헌의 말은 내부에선 왕명처럼 통용되었기에 왕회장이라는 것이었다.

    전명헌의 말 한마디면 미래건설 회장은 막내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인선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었다.

    보통은 제 자식들이 재산을 놓고 위아래도 없이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재원이 아는 전명헌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외려 이런 모습을 보며 냉정히 평가해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라? 레밍턴 씨도 보내주셨네?”

    컴퓨터 박람회를 알아봐 달라고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간단히 정리된 문서를 보내주셨다.

    문서를 보니 실리콘밸리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제법 많았다.

    정리된 행사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유재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리스트 하단에 있는 ‘컴덱스(COMDEX, Computer Dealer's Exhibition).’라는 행사였다.

    개최 장소는 라스베이거스였다.

    단어 풀이에서 알 수 있듯 컴퓨터 관련 제조사와 딜러, 그리고 바이어들이 모이는 세계 최대의 컴퓨터 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덱스 행사는 21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으니, 전통과 규모를 동시에 잡는 행사였다.

    당연히 유재원의 선택은 컴덱스였다. 행사가 개시되는 일이 11월이라서 앞으로 4개월은 기다려야 했지만, ID 오피스의 데뷔 쇼라면 컴덱스만큼 적당한 건 없다.

    유재원은 곧장 ID 워드로 컴덱스를 선택했고, 부스를 메이저업체 부럽지 않을 만큼 크게 잡으라는 지침을 담은 문서를 작성했고, 프린터로 출력했다. 그리곤 곧장 실리콘밸리에 팩스를 넣어주려고 했다.

    따르릉.

    “응?”

    막 팩스를 넣기 전에 전화벨이 한 발 더 빨랐다.

    “여보세요? 유재원입니다.”

    곧바로 전화를 받는 유재원이다.

    긴 통화는 아니었다. 예? 물론입니다! 네! 하고 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를 건 사람이 뜻밖이긴 해도, 내용은 간단했기 때문이다.

    수경이네 아버지가 내일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유재원은 물론이라고 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지?”

    유재원은 수경이도 아니고 수경이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오죽하면 예전에 설치해 준 울펜슈타인 알파 버전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수경이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호감이 듬뿍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치킨파티 때문일 것 같다. 이번에 무려 650마리를 주문했으니, 상당한 수량이었다. 게다가 매월 한 번씩 치킨 파티를 한다고 했으니, 이걸 다 합치면 제법 커다란 매출이 나올 거다.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하실 확률이 높다.

    유재원은 기왕이면 수경이네 아버지가 치킨의 위력을 제대로 알아보시고 자신을 부르는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치킨의 위력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회귀자인 유재원 마져도 영혼에 새겨진 금단 증상 때문에 야단법석을 치르며 치킨을 만들 정도다. 치킨 맛을 본 아이들 심지어 선생님들까지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수경이 아버지가 치킨 관련 사업을 한다면 힘껏 도와줄 수도 있다. 업계가 달라도 우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다는 건 전생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어디서 들어 봤는데, 올해 우리나라의 닭 소비량이 10억 마리라네요.

    어마어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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