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자이언트 킬러 ==============================
#47-1
-신도시 지정된 분당·일산의 상황 과열.
-신도시로 몰리는 사람들. 명절 때와 같은 긴 정체 발생
-정보 새나갔나? 땅 투기 이미 과열.
신도시 발표 이후로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분당과 일산의 뉴스가 빠지지 않았다.
급기야 추석 연휴 때 고속도로에 자동차로 가득해져 정체가 일어났던 것처럼, 분당과 일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사람들로 가득한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언론의 경마식 보도로 분당으로 가서 땅 한 평만 얻으면 부자가 될 것처럼 부추김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귀가 얇은 사람들은 늦었다는 만류에도 분당과 일산을 향해 열심히 이동했다.
당연히 땅 한 평만 사서는 부자가 될 순 없다. 하지만 분당의 땅값은 하루가 멀다고 뛰고 있었다.
-탄천 근처의 땅들은 호가가 2만 원까지 올랐습니다. 탄전에서 좀 떨어져 있더라도, 이번 신도시 발표 지역에 들어간 땅들도 3배 이상은 올랐습니다.
분당의 상황을 전화로 보고하는 황재홍이었다.
구리선 전화에 전화기의 품질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잡음이 반쯤 잠겨 있지만, 그래도 수화기 너머 상대의 표정이 그대로 그려질 만큼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재홍의 전직은 기획부동산업자.
도로와 한참 떨어진 땅, 용도 변경이 될 것 같진 않은 산지 등등의 땅을 비싼 값에 팔아 치우는 업자였다.
그렇게 업자 일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단기간에 몇 배로 땅값이 뛰는 건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땅이 작으냐? 절대 아니다. 무려 45억을 풀어 땅을 샀다. 분당에서 신도시로 지정된 면적이 555만 평인데, ID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땅은 70만 평에 이른다.
심지어 땅값이 모두 뛰고 있는 분당 전체에서도 ID 인베스트먼트가 사들인 땅들이 높은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황재홍은 발표 전에도 비싸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보다 몇 배는 오른 지금은 모든 게 비정상 같았다.
“진짜요? 발표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게 뛰죠? 너무 빠르네요?”
흥분한 황재홍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유재원이다.
-사장님이 찍어주신 지역의 입지가 매우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더러운 물이 흐르는 탄천이지만, 깨끗하게 정비가 되면 아파트나 상업시설이 들어서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되는 겁니다.
분명 비정상이다. 하지만 이번 신도시 발표는 땅 거래 경험이 많은 자신도 처음 겪은 일이었다.
지금 비싸다는 느낌은 과거 녹지(그린벨트)에 묶여 있던 때의 기준이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녹지가 풀리고 빌딩과 아파트가 올라갈 땅이니, 나중엔 이 가격 이상으로 더 오를 가능성은 무한하다.
-오늘도 저를 찾는 사람들이 수십 명은 넘었습니다. 건설사가 보낸 사람도 있고, 서울에서 내려온 큰 손도 있습니다.
황재홍은 유재원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유재원의 명령으로 ID 인베스트먼트의 자본금 전액 45억을 분당에만 투자했다.
그 정도 큰돈이 움직였다면 분명 사장님은 채무성의 말 대로 높으신 분들에게 귀띔을 받은 게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떤가.
온갖 협잡이 판을 치는 곳이 부동산 시장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신도시로 지정되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 희한한 일이 마구 일어난다. 이런 복마전에서 강력한 뒷배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다. 그리고 그런 뒷배를 얻는 것도 능력이었다.
피땀 흘려 번 돈이 귀하다는 건 황재홍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피땀으로 번 돈이라고 더 높게 쳐주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쉽게 번 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세상에선 그 가치를 헐값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세상은 두 가지 종류의 돈 모두 1원 하나의 차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기회가 온다면 따지지 말고 최대한 벌자!
이것이 황재홍의 생각이었다. 유재원은 그러한 생각에 완벽히 부흥하는 존재였기에, 존경심이 절로 뿜어져 나오는 황재홍이었다.
“실제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예, 어중이떠중이들은 절대 아닙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재벌 건설사 간부도 있었고, 대기업을 상대로 거래한다는 명동의 현금 부자도 있었습니다. 다만 토지개발공사는 아직 접촉해오진 않았습니다. 지침을 주시면 대응하겠습니다.
지침이라.
지금 파느냐, 더 붙잡고 있느냐 물어보는 것일 테지?
“일단 겨울까지는 관망하겠습니다. 황재홍 님도 명함 뿌리는 작업이 끝나면 서울로 복귀하세요.”
-아? 아! 홀딩이군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황재홍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는지,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그가 보기에 이번 신도시의 땅값 변동은 초기엔 뻥튀기처럼 터졌다가, 겨울이나 내년이 되면 많이 식을 것 같았던 탓이다. 게다가 정부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을 후려칠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기억의 궁전에 넣어놓은 아카이브를 통해 신도시의 돈 잔치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11월까지만 목 좋은 땅의 땅값은 평당 10만 원까지 오른다.
신도시 발표 전, 평당 5천 원에서 1만 원짜리 땅들이 거의 10~15배 가까이 뛰는 것이다.
유재원의 45억 원이 11월이 되면 450억, 어쩌면 500억 원이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단기간에 10배 상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때는 말이 된다. 내년 6월경까지 신도시 개발을 위해 정부가 내놓는 보상금은 무려 3조5천억 원이고, 그중에 분당이 1조 원가량이니 충분하다.
대기업 건설사나 땅 놀이를 하는 큰손에게 팔 것도 없다. 그냥 기다렸다가 토지개발공사에 정가를 받고 넘기는 게 제일 깔끔하다.
“올라가시면, 최강욱 실장에게 ID 인베스트먼트 사무실을 구해달라고 하세요. 사무실이 구해지면 추가로 직원들을 모집하겠습니다.”
-예? 직원들 말씀이십니까?
“네, 대한민국 좋은 땅이 어디 분당에만 있습니까? 앞으로 신도시는 계속 생겨날 것이고, 포화하였다는 서울도 재개발에 들어가는 지역이 많겠지요. 그걸 모두 황재홍 매니저님 혼자서 감당하기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투자 상품이 땅만 있는 게 아니고, 증권이나 선물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문화 산업도 좋은 투자처이고요. 구인에 대해서도 최강욱 실장과 논의하세요.”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의 비전을 살짝 보여줬다.
땅 놀이만 하는 회사에는 인베스트먼트라는 단어를 쓸 이유가 없다. 금융상품은 물론이고 영화, 음반, 게임 등등 문화 상품에도 투자할 계획이기에 인베스트먼트라는 거창한 단어를 달아 준 것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사장님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네. 급하게 올라간다고 과속은 하지 마세요. 황재홍 님은 우리 회사의 귀중한 인재니까요. 하여튼, 준비되면 보고하세요. 그리고 분당에서의 성과는 완벽했습니다. 다음 달 성과급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재홍은 한 번 더 감동하였다.
무척이나 사소한 말이었지만, 이렇게 자길 챙겨주는 건 작고하신 부모님 말고는 처음이었다. 채무성 패거리만 해도 시다바리 취급이었지, 사람 취급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마웠다.
그런 개 같은 대접 받기 싫어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고, 덕분에 좋은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폭이 어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가 어리기에 성인이 되었을 때 더 기대되는 사장님이다.
유재원의 정신적 나이가 60이 넘었다는 걸 모르는 황재홍의 평가였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유재원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며칠 후.
“신기하네?”
유재원은 배달 온 아침 신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을 땅 투기의 열기로 태워버릴 듯 타올랐던 신도시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며칠간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신도시 이야기 대신 올라온 건 문익환 목사님의 무단 방북 사건이었다.
방북 이슈는 3월쯤에 시작되었는데, 5월 중순인 지금 갑자기 큰 사건으로 터졌다.
자세한 기사를 보니 문 목사의 배후에 유력 야당 정치인들이 있고, 방북의 실무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던 북한 공작원의 금전적 지원이 있다는 안기부의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공작원의 금전이 야당에게 흘러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난리가 났다.
신도시 이야기는 깔끔하게 사라졌다.
공작원으로 지목된 이는 절대 간첩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었고, 간첩들과 손을 잡은 것처럼 된 야당 유력 인사들은 인위적인 공안 사건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공안 정국이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러한 이슈 전환은 유재원에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의 거물, 대기업들이 미리 신도시의 정보를 알고 땅을 선점해서 큰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점점 날카로워지던 언론의 비판이 단번에 공안 정국으로 전환되면서 해소되었다.
언론의 비판이 완전 허구였던 것도 아니었다.
황재홍을 통해 매수 작업을 할 때, 이미 상당수 토지는 원주인이 아니라 서울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다.
문 목사를 시작으로 공안 정국이 터지고, 전국 대학교에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이어면서 신도시에 대한 언론의 주목도는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분당의 땅값은 여전히 고공 행진 중이고, 금싸라기 땅을 가진 ID 인베스트먼트에 문의도 빗발치고 있다.
심지어 억지로 땅을 받아내려는 세력으로부터 압력이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나 유재원의 지침을 받은 황재홍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압력이 실력행사로 바뀐다면, 왕회장님이나 대통령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볼 참이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진 않았다.
황재홍은 분당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 버리고 강남의 2층짜리 상가 건물을 사무실로 잡았다.
아직 강남이 뜨기 전이라서 무리하면 건물 자체를 살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전세로 들어갔다.
1층에 번듯한 간판도 달았고, 20명 정도 근무할 수 있는 사무용 가구와 용품도 준비했다. 전화와 팩스도 놓으면서 만반의 준비와 함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구인 작업이 쉽지 않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게 어려웠던 21세기 사람인 유재원이다. 그 반대인 구인이 쉽지 않다는 보고는 언뜻 실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재원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황재홍이 엉터리 보고서를 올린 건 절대 아니다.
이 당시 대학생들은 회사를 골라서 갔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졸업 시즌이 되면 회사에서는 입사 원서를 들고 학교를 방문해서 신입 직원들을 모집했다는 이야기다.
서울대 같은 명문대학이라면 중소기업은 명함도 못 내민다. 일성과 미래 같은 대기업부터 원서를 들고 취업설명회를 개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워도, 경제적으로는 폭풍 성장을 하는 시기였고, 늘 사람이 부족했었다. 그러니 좋은 인재를 선점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눈물겨운 시절이다.
막 태어난 회사인지라 ID 인베스트먼트는 이름값은 하나 없으니 그저 파격적인 월급과 복지정책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집해야 했다.
그나마 분당의 일로 인해서 부동산 업계에선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덕분에 대졸 신입사원들을 모집하는 것보다는 경력직 몇 명을 스카우트하는 작업은 훨씬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약진하는 동안, ID 테크놀로지도 가만히 멈춰있지 않았다.
거대해진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다들 정신이 없는 중이지만, 중요한 사업들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여주 사무실은 대기업들이 주문한 물량을 만드는 데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 올해 초에 미래 그룹 회장님의 이름으로 단체 주문했던 수량 말고도, 삼보를 비롯한 중견 컴퓨터 기업에서도 추가 주문이 들어왔다.
MS-DOS처럼 완제품 컴퓨터에는 무조건 들어가는 필수 타이틀이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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