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자이언트 킬러 ==============================
#45-2
프로그래머 구인 소동에서 확인했듯, 한국에서는 단순한 모집으론 좋은 인재를 얻는 건 어렵다는 것만 확인했다. 차라리 ID 테크놀로지의 든든한 기둥으로 쓸 인재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아이들의 인성은 그때 잘 확인했으니, 이젠 능력을 배양해주는 거다. 그런데 컴퓨터는 지금도 고가의 물건이라 쉽게 살 수 없으니 학교 컴퓨터라도 이용하기로 했다.
유재원이 방과 후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친구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것이다. 설사 ID 테크놀로지에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컴퓨터를 잘 배우면 대학교나 사회에서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여기에 덤으로 재학생 중에 컴퓨터를 잘하는 아이들이 나오면 방과 후 학습에 넣어주기로 했는데, 이걸 심화 학습반이라고 명명했다.
유재원의 컴퓨터 실력에 대해 의심하는 선생님과 학생은 없었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인 걸 보니 다 지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잘못 생각한 것이다. 컴퓨터 부라면 설렁설렁할 수 있겠지만, 심화반에선 어림없다.
스파르타 교육이 뭔지 확실히 알게 될 거다.
3월에 말에 접어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가끔 꽃샘추위가 찾아와서 몸이 움츠러들긴 했지만, 따스한 날이 많아지면서 활기를 띄웠다. 비단 학교나 동네의 일뿐만이 아니라, ID 테크놀로지에서 전력을 기울이는 오피스 프로그램 개발도 순항 중이었다.
실리콘밸리 팀의 팀워크는 기대 이상이었다.
유재원이 매일 이들이 작성한 소스코드를 확인하는데, 미리 내준 과제에 딱 맞는 완벽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원래는 20명쯤 고용하려던 것을 현재 수준인 12명에서 추가 고용은 하지 않았다. 팀워크도 안정적이었고, 오피스 프로그램 제작이 좀 커다란 제작이긴 해도 초판 버전이니 이 정도 인원으로 충분히 제작할 수 있었다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다.
유재원이 거대한 설계도를 꼼꼼히 그려 주었고, 동적 오브젝트 관리자(DOM)과 같은 며칠은 고민해도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어려운 기술도 이미 구현해놨기에, 프로그램 작업 완료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벌써 실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왔다.
VGA의 고해상도 모드인 640*480에 16컬러를 사용하는 기본 모드로 실행되고, 비디오 메모리가 많으면 보다 높은 해상도에 더 많은 컬러를 표현할 수 있다.
리본 인터페이스가 정교하게 가다듬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미 하나의 운영체제 같은 모습이다.
‘START’라는 실행 파일을 실행하면, 시작 버튼과 작업 표시 줄이 떴고, 바탕화면이 나타난다. 시작버튼 안에도 start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바탕화면에는 설치한 오피스 프로그램의 아이콘이 바로 보이는데, 4개를 모두 구매했다면 4개, 하나만 구매했다면 구매한 제품의 아이콘만 나타난다.
바탕화면에서 아이콘을 바로 실행해서 프로그램을 띄울 수 있고, 시작 버튼을 눌러서 실행할 수도 있다.
기능은 이뿐만이 아니다. 원하는 그림을 배경화면으로 삼을 수 있고, 바탕화면 아이콘도 사용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올려놓을 수 있다.
키보드 워리어처럼 ID 테크놀로지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라면 자동으로 인식해서 아이콘으로 만들어 주고, 다른 회사 제품은 아이콘 만들기를 통해 설정해 놓을 수 있다. 심지어 작업하는 파일을 올려놓을 수도 있다.
일일이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에 로드하는 게 아니라, 바탕화면 상태에서 바로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간단한 파일 관리자도 넣었다. 작업한 프로그램을 디스켓에 복사하거나, 디스켓에 든 파일을 하드 디스크로 복사해주기도 하고 삭제나 이름 바꾸기 등의 간단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쯤 되면 하나의 운영체제처럼 보이지만, 아직 그 수준은 아니다.
도스를 기반으로 실행하는 것이라서, 멀티테스킹 능력이 매우 떨어지고, 메모리 관리도 도스의 한계가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도 최소실행 사양도 높다.
CPU는 386에 램은 1메가 이상, VGA카드가 있어야 한다.
대신 최소사양만 충족하면 하드웨어 스크롤, 스마트 캐시 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무척이나 매끄러운 화면으로 작업할 수 있다.
긴 문서를 스크롤할 때도 매끈매끈하게 움직이는 데, 기존의 업무용 프로그램과는 완벽히 대치되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나와있는 업무용 프로그램은 그림을 삽입하거나, 분량이 많은 문서를 다룰 땐, 화면 지연이 1초 이상 걸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남아있는 작업 분량과 수많은 하드웨어 제조사들과 호환성을 맞추는 작업까지 다 참작한다면, 한글과 영문판은 늦어도 초여름쯤이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사장님, 황재홍입니다.
방과 후,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던 건 황재홍의 전화였다.
선산 문제를 잘 해결한 황재홍은 ID 인베스트먼트의 현장매니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받았다. 토지 수용에 대한 대책도 훌륭했고, 선산에서 나는 고가의 버섯과 약초에 대한 처리도 훌륭했다.
산림조합에 채취권을 3년 임대했고, 마지막 해에 운영 결과를 평가해서 이어갈지 파기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채취권을 임대받은 산림조합은 인근 마을에서 버섯 채집을 잘하는 경력자들을 모집해서 수확하게 했다. 이렇게 얻은 송이는 일본에 먼저 팔았고, 다른 약초는 산림조합이 수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수익 분배는 4:3:3로 소작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너그러웠다.
황재홍의 수완이라면 유 씨 집안 몫으로 5나 6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통이 큰 큰아버지나 친척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유재원 덕에 집안으로 돈과 명예가 넝쿨째 굴러들어 오고 있는데, 괜히 욕심을 부려서 뒷말이 나오는 걸 삼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선산은 그저 차례만 지낼 때 방문하는 곳이었지, 그곳은 그냥 방치된 산이었다. 비싼 버섯들이 나는 줄 몰랐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산에서 4할만 받아도 충분히 만족할 비율이었다.
비록 출신이 좀 믿음직스럽진 않은 곳이었지만, 먹튀를 하지 않고 신용을 지킨 것으로 테스트는 끝이다.
쓰기로 했으면, 힘을 실어주는 게 유재원의 방식이었다.
황재홍에게 준 현장매니저라는 낯선 직책이었지만, 직접 발로 뛰면서 ID 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할 땅을 찾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기 상황은 어떤가요?”
다만 지금은 유재원이 콕 찍어준 지역에 가서 탐방 중이었다.
-소문은 활발한데, 거래는 얼마 없어서 시세가 뛸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남단 녹지에 묶인 농지를 가진 몇몇 분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묵은 땅을 팔 마음이 있는 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말씀하신 금액을 채우기엔 부족합니다.
황재홍의 상세한 보고였다.
유재원이 콕 찍어준 지역은 바로 분당이었다.
1대 신도시로 발표될 다섯 지역 중에 제일 성공한 지역이다.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의 자본금 45억 원을 전부 투자할 것이라 했고, 지침을 받은 황재홍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은행 계좌까지 보여주면서 진심이라는 걸 확인시켜준 다음에야, 분당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황재홍은 신바람이 났다.
현장매니저에 임명되면서, 일을 열심히 하라고 업무용 자동차도 받았다. 작년에 내오마을에 올 때 뽀대를 낸다고 무리해서 렌트했던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였다.
중고차도 아니고, 신차였다. 명의는 비록 ID 인베스트먼트였지만, 황재홍의 발이 되어 줄 자동차였고, 분당에서의 매입 작업이 끝나면 자기 일을 보조할 부하 직원도 뽑기로 했으니 신명 나게 움직였다.
ID 테크놀로지의 자본력은 크라운 자동차 한 대를 사는 건 부담도 아니었다. 더욱이 황재홍이 내오마을 방문할 때, 크라운을 타고 온 것처럼 땅을 팔 사람에게 돈을 지급할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쓰기 좋았다.
“좋네요. 일단 판매 의사가 있는 분들과 접촉해서 거래하세요. 거래 금액도 넉넉히 주시고요. 그러면 아직 결정을 못 한 분들도 마음이 동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계약서를 쓰는 날이 정해지면 보고하세요. 사인하는 건 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하실 거니까요.”
-예! 당연히 모시러 내려가겠습니다!
유재원은 아직도 미성년자였고, 거래는 대리인이 해야 한다. 이제까진 최강욱이었는데, ID 인베스트먼트는 부모님이 나가신다.
부동산 거래에 대한 것이나, 자동차 운전 등을 배우시는 부모님도 활동적인 성격이 있으셨는지, 땅을 보러 다니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땅을 좀 보러 다니다가, 근처의 맛집에 들러 맛있는 걸 먹고 오는 코스는 마치 식도락 여행 같았다. 아직 부동산 거래라는 게 낯설기도 하고, 땅을 사서 큰 이익을 내 본 일이 없으니, 설렁설렁 다니시는 것이겠지만, 대박 한 번 맛보면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확신한다.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학교에 있는 동안 계속 쌓였던 팩스 더미를 들고 라디오 앞에 앉았다. 라디오를 켜서 볼륨을 높이곤, 팩스로 온 서류를 살피는 게 최근 방과 후에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엔 모르고 텔레비전을 켰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당황했었다. 89년도만 해도 오후 방송은 5시쯤에나 시작하기 때문이다. 올림픽처럼 뭔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방송을 하지 않으니 찌지직거리는 잡음만 나온다.
다행히 라디오는 오후에도 방송이 나왔다. 켜 놓고 있으면 뉴스와 노래를 들려주니 텔레비전보다 더 좋았다.
-미래 그룹 소식입니다. 전명헌 미래 그룹 총회장이 실적 부진을 이유로 미래건설 경영진 전체를 경질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속사정도 흘러나왔는데요, 실적 부진도 부진이지만, 해외 영업에서 일어난 손실을 장기간 은폐한 것에 대해 진노가 터졌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횡령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포착했고 합니다. 과연 검찰 고소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한참 팩스를 검토하면서 지침을 내려줄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특종이 터졌다.
“와, 전 회장님 화끈하시네.”
미래건설에 대한 언질을 준 지 한 달쯤 됐나?
경영진을 죄다 날려버리는 화끈함을 몸소 보여주신다. 아무리 회장이라고 거들먹거려도 로열패밀리가 아니라면 하루살이 목숨이다. 그것도 모르고 위세를 떨던 인간들이 후두두 떨어져 나갔다.
횡령에 대한 정황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도곡동 땅을 그분(?)이 빼돌린 걸 포착하신 모양이다. 하긴 내기를 하면서 대놓고 언급을 했는데, 누가 조사했더라도 횡령의 정황은 밝혀냈을 것이다.
저렇게 추잡한 죄목으로 잘려나갔으니, 샐러리맨의 신화 같은 타이틀은 다른 사람에게 갈 거다.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하니 기억의 궁전에서 한 드라마가 떠오른다.
“어? 그러면 그 드라마는 안 나오는 건가?”
영웅시대라는 제목의 주말 연속극이었다.
일성과 미래의 기업 전쟁 속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룩한 미래건설 회장의 영웅담이 드라마의 줄거리였다.
과장과 비약으로 점철된 내용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참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였다. 그런데 작가에게 모티브를 줄 주인공이 저렇게 추락했으니, 과연 드라마가 제대로 나올지 걱정이다.
"뭐, 비슷한 이야기로 나오겠지."
걱정은 딱 거기가지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는 거지, 그분을 존경하는 건 아니었다. 7, 80년대 경제계 거물들의 이야기를 뒤져보면 비슷한 성공신화는 많이 찾을 수 있으니, 다른 인물을 모티브로 해서 나올 거라고 확신하는 유재원이다.
아참, 그분과 같이 썰려 나간 임원들도 유감이다. 그래도 스리쿠션 기법이 이 정도면 깔끔한 거 먹힌 것 아니겠는가?
-또한, 미래그룹과 제계는 공석이 된 미래건설 회장에 누가 오를 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응?
미래 그룹 뉴스가 아직 끝난게 아니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글 안에서 2000년대 쯤, 맨 몸으로 시작해 대업을 이룬 기업인의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로 쓰는 작가가 있다면??
유재원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네요.
더 무서운건??
2000년대 후반이라도 유재원의 성공 신화는 현재 진행 중이라는 거!
주인공이긴 하지만, 유재원이란 존재는 생각해볼 수록 어마어마합니다.
잘 버는 것도 중요한데, 잘 쓰는 법은 더 중요하겠네요.
아, 그리고 벌써 2017년의 마지막 달이네요. 시간 참 빠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