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자이언트 킬러 ==============================
#44-1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최강욱 실장은 수출입은행 통장을 받아들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껏 찍혔던 숫자와는 차원이 다른 숫자가 맨 마지막 줄에 추가되었던 탓이다.
입금 일렉트로닉아츠 $13,672,937.
그러니까 일렉트로닉아츠에서 1천3백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한 방에 입금해준 것이다. 입금 명목은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 100만 장 매출에 대한 중간 결산이다.
호킨스 사장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찍 정산해주겠다던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현재 환율인 689원으로 계산하면 94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한국과 미국을 포함하면 소프트웨어 하나로 100억을 넘게 번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대기업들만 해도 신발, 텔레비전, 자동차 등등 거대한 공장과 노동력을 투사해서 만든 제품을 팔아서 매출을 올리는데, ID 테크놀로지는 디스켓 몇 장에 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프트웨어로 순식간에 올린 금액이었다.
“고객님, 더 도와드릴 건 없으십니까?”
이런 숫자라면 수출입 은행에서 깜짝 놀라서 사무실로 전화할 만했다. 지점장까지 나와서 굽실거리는 데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어색하기만 한 최강욱이었다.
“아, 네.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 돈의 용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회사의 유일한 결정권자이자 핵심 인재인 유재원은 요즘 두문불출하면서 신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집중해야 할 일이라서 웬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기에, 이번 일도 팩스 한 장으로 보고하고 말아야 하나 고민이 생길 정도다. 그래도 이제껏 내렸던 지시를 돌아보면 대충 방향은 그릴 수 있다.
증권과 부동산 투자겠지?
유재원이 찍어준 대신 증권과 대우 증권의 상승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올림픽이 끝난 다음 겨울까지는 쭉 하락하다가 12월 말부터는 무섭게 오르는 중이었다.
대신 증권을 처음 샀을 때 주당 1만2천 원이었는데, 새해가 들면서 2만 원을 넘었고, 지금은 2만5천 원을 향해 돌격 중이었다. 대우 증권의 상승 폭도 비슷했다.
총 3억 원을 투자했으니, 벌써 2배로 늘어나 6억 원이 된 상황이다.
최강욱은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성공하자 살짝 무서워졌고, 불안해졌다.
회사 임원으로서는 성공이 좋지만, 어른으로서는 실패 없는 성공은 자만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기에, 증권 투자에서 살짝 쓴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보란 듯 성공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때문에 최강욱이 직접 챙기진 못했지만, 소식은 늘 듣고 있었다. 유 씨 집안의 선산 일부가 터널을 뚫는다고 수용되었다는데, 부동산 거래에 도가 튼 사람을 대리인으로 세워서 훨씬 좋은 가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아주 그냥 성공의 황금 고속도로를 무섭게 달리고 있는 유재원이었다.
그렇다고 성공이 계속되면서 유재원의 인격이 점점 변하는 거냐?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중소기업 사장들이나, 번듯한 사업가들을 많이 만났던 최강욱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사람부터 나이 지긋한 양반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의 길은 자기가 성공했던 방식 딱 하나만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옆에서 조언을 해줘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참지 못했다.
그들이 사고를 쳐서 변호사를 찾게 되는 것도 다 고정된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재원이 그런 사람들과 같으냐 하고 물으면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최강욱이었다.
업무를 처리할 때, 아니면 다른 일에 대해 조언을 해주면 대부분 군말 없이 수용했다. 너무 잘 받아주니, 오히려 조언하는 최강욱이 몇 번이고 고심해서 해야 할 정도다.
직원을 대할 때의 태도는 또 어떤가?
최강욱 본인부터 운전기사를 하는 김대석, 심지어 여주에서 부업으로 연결된 아주머니들까지도 어른을 대하듯 공손했다.
빨리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안하무인은 아직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인정?
진심으로 인정이다. 동시에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사장님이 곧 도착하신대요.”
“곧? 지금 서울이란 말입니까?”
“네. 미래 그룹 계동 본사에서 방금 출발했대요.”
때마침, 사무실로 돌아오니 경리 업무를 맡은 직원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맞다.
“벌써 입금해줬어요?“
유재원은 수출입은행 통장을 받고 헤벌쭉 웃었다.
13,672,937!
원이라고 해도 상당히 큰 숫자인데, 숫자 앞에 붙은 기호는 무려 달러($)였다. 아쉬운 점은 딱 하나다. 지금은 환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원화로 환전하면 액수가 생각보다 작아진다.
“그런데 1,499만 달러가 아니라, 이상한 숫자네요?”
소매상에 공급하는 가격이 29.99달러였고, 여기서 반이 ID 테크놀로지의 몫이었다. 그러니 개당 14.995달러를 받아야 하고, 100만 개 판매분의 정산이니 1천4백99만 달러가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캘리포니아는 매출세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에 원전징수 되는 세금까지 다 합치면 매출액의 8.25%가 나가는 겁니다.”
아, 세금.
미국은 주마다 세금 구조가 달랐다.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는 매출세가 높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회사를 세울 때부터 세금은 정확히 내기로 했으니,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유재원이다.
“이 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강욱 실장의 물음이 이어졌다.
유재원은 2월 1일부로 최강욱을 법무팀장에서 비서실장으로 승진시켰다. 빈 법무팀장 자리는 로버트 하일이 안착했다.
인성과 능력에서도 최강욱과 비교하면 떨어지지 않았고, 외국어 능력은 오히려 더 좋았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어 소통도 문제없으니 안성맞춤이다.
최강욱이 비서실장으로 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ID 테크놀로지 이인자 대우를 확실히 해주기 위함이고, 동시에 ID 테크놀로지가 그룹으로 성장했을 때, 그 지위에 변함이 없이 다른 계열사에 관리할 수 있도록 유재원의 바로 아래인 비서실장으로 만들어 둔 것이다.
그룹이라고 하니 먼 이야기 같지만, 가까이 있었다.
“새로운 회사를 만들려고 해요. 금융상품과 부동산 투자전문회사죠.”
사업체 두 개를 묶으면 그룹 아니겠는가.
물론 진짜 대기업들이 보기엔 실소가 나올 수준이겠지만, 몇 년만 지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역시. 예상했던 바입니다.”
최강욱이 예상했던 선택지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이었다.
“이름은 생각하셨습니까?”
“ID 인베스트먼트에요.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놀아보려고요.”
세계적이라.
88올림픽과 함께 유행한 단어였다. 그렇다고 허세처럼 들리진 않았다. 이미 ID 테크놀로지는 협력사를 통해서지만, 미국과 유럽에 진출했다. 게다가 진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1천3백만 달러나 벌어들였다.
“ID 인베스트먼트에 이번 수익금을 다 투자하는 겁니까?”
최강욱의 물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액 배당 후에 제 돈만으로 출자해서 만들 거예요.”
그러니까 100% 개인회사로 만들겠다는 말이었다.
개인 회사라고 하면 작아 보이지만, 자본금의 크기는 엄청났다. 거의 50억에 가까운 돈이다. 최강욱이 상상하기에 재벌들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이렇게 큰 투자금을 현금으로 운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려고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부동산은 무척이나 덩치가 큰 투자처였다. 50억이 아니라 500억이라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매물이 있었다. 그러니 자본금은 많을수록 좋은데, 배당금을 받아 순수한 개인 회사로 만들려는 이유는 짐작할 수 없는 최강욱이다.
“저번 증권 투자도 그렇지만, 저는 괜찮은데 남들이 보기엔 너무 위험한 투자가 많거든요. 주주님들 보기에 너무 불안해할 거 아니에요? 대신 제 방식을 존중하는 분들에게서는 투자를 받을 거예요.”
최강욱은 유재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긴 대신 증권과 대우 증권 투자에 대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강욱도 간담이 쫄깃해질 정도였다. 여주의 주주들에겐 별다른 통보 없이 진행했으니, 별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투자 정보를 제공했었다면, 분명 무슨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확실히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12월에 이어 이번 달에도 특별 배당을 하면 주주님들이 꽤 놀라겠네요.”
최강욱은 ID 테크놀로지의 주주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덕진 국민학교 교장, 교감 선생님. 덕진 공단의 현미유 공장 박 사장님. 그리고 유재원의 부모님.
현미유 박 사장님을 제외한다면 다들 순박하신 분들이었다. 12월에 배당 작업을 준비하면서 만났을 때는 이렇게 큰돈을 받아도 되는 거냐? 큰돈이 빠져나가면 회사의 부담이 되는 거 아니냐며 부담스러워하셨다.
사실 그분들은 유재원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재능과 삼보 컴퓨터라는 확실한 거래처를 보고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투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겨우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돈으로 돌아오니 부담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배당은 12월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에서 들어온 1,300만 달러, 그러니까 94억을 배당하는 겁니까?”
“증권에 투자한 돈 있지요? 그게 지금 얼마죠?”
“6억3천만 원 정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식도에서도 빼서 100억에 맞춰 배당하지요.”
억 단위 돈이 놀이용 가짜 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틀림없는 진짜 돈이었다.
작년 12월에 결정한 배당금은 1억 원이었다. 이번엔 그 100배인 100억 원이다. 주주들의 몫을 계산하는 것도 간편하다. 12월에 받은 돈에 100배씩 하면 끝이다.
“12월에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셨는데, 이번엔 100배라니, 그분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
ID 인베스트먼트는 그 특성 때문이라도 100% 지분을 자신이 가진 회사로 설립해야 한다. 그런데 돈이 나올 구석은 배당밖에 없다. 유재원은 배당을 받는데, 다른 주주들이 못 받으면 그건 또 이상한 그림이지 않은가.
“그러면 대략 50억으로 ID 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하는 것이군요.”
“시작할 자본금은 45억 정도만 투자할 거예요. 남은 돈으로는 기부 좀 하려고요.”
“기부?”
유재원의 말을 수첩에 적던 최강욱이 순간 멈칫했다.
기부라는 말이 여기서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강욱이었다.
“구세군이나 적십자 같은 곳 말씀이십니까?”
최강욱의 물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8, 90년대 대표적인 자선단체였지만, 유재원이 보기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5억을 기부한다면 그중에 얼마나 실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갈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에요. 일단 제 주변부터 돌아보려고 해요. 내오마을은 마을 입구까진 신작로가 깔렸는데, 마을 안은 아직도 흙길이거든요. 비나 눈이 오면 순식간에 진창으로 변해버려요. 배수로도 없어서 쉽게 마르지도 않고요.”
거창한 기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깎아내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유재원의 일가친척들 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용 도로를 좋게 닦는 일도 분명한 기부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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