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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62화 (62/1,007)

[62] 자이언트 킬러 ==============================

#43-2

“대통령께서 널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하지 않았더냐?”

이유는 유재원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한국 재벌들 스타일이라면 가격은 그대로 받고, 나중에 페이백 같이 일부를 돌려받는 식으로 해달라고 할 줄 알았다. 물론 페이백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정식 마케팅기법이지만, 한국식 페이백이란 비자금을 만드는 기법의 하나였다.

“헤? 그거는 그냥 덕담으로 해주신 말 아닌가요?”

유재원의 물음에 전명헌 회장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허투루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우리 같은 경제인이라면 말이다. 지나가는 말이라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설마요.”

알 거 다 아는 유재원이지만, 지금은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라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에휴,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 하지만 나는 네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 업계에 있을 테니, 이야기해주마.”

덕분에 유재원은 한국 경제계의 거목 전명헌으로부터 매스컴에는 나오지 않는 은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에 경제인의 밤에서 네가 세금도 잘 내고, 고용도 많이 해서 함께 부자가 되겠다고 했던 말은 선하고 바른 말이었다. 분명 진심이었겠지?”

“그럼요!”

“나도 듣기 좋았단다. 특히 일성의 최현희 얼굴 앞에서 말해서 재미있었지. 네가 알고 그런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최현희는 세금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거든.”

“헤에. 그렇군요.”

알고 말했지만, 지금도 시치미를 떼는 유재원이었다.

“대통령도 좋아하셨지. 그런데 말이다. 대통령이 세금만 잘 내고, 고용만 잘하는 걸 진짜 좋아할까?”

“아니에요?”

“그렇고말고. 어린 너에게 정치헌금 요구하는 미친 녀석은 아직 없었겠지. 하지만 우리 같은 기성 경영인들에겐 그런 요구는 일상적이란다. 지금이야 국민 눈치를 좀 보고 있지만, 예전엔 말도 아니었단다. 회사들을 자기들 저금통이라고 생각한 작자들도 많았지.”

유재원은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뜯기기 시작하면,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도 어려워진다. 정치인들도 그걸 잘 알지. 덕분에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도, 그냥 넘어가 주는 게 많았다.”

“설마요.”

유재원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에잉, 내가 뭐하러 너에게 치부를 보이며 거짓말을 하겠느냐? 비단 돈만 요구하는 줄 아느냐? 취업 청탁도 엄청나게 온단다. 그러면 또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가 없지. 그나마 능력이 있는 사람을 청탁하면 괜찮은데, 함량 미달인 사람도 부지기수란다. 게다가 높으신 분이 직접 꽂으면 그 사람을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높은 자리에 써야 해.”

전명헌 회장은 진짜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다.

6학년짜리 국민학생을 앞에 앉혀 놓고 온갖 비사를 다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높으신 분이 꽂았고,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높은 자리에 앉혀줬다는 말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 혹시 그 사람, 미래건설 회장님 아니에요?”

긴말을 해서 목이 탄 전명헌이 냉수를 마시다 풉 하고 뿜었다.

“어, 어떻게 알았느냐?”

“능력이 모자란데, 울며 겨자 먹기로 올려주셨다면서요? 제가 사업 시작하면서 대기업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당연히 재계 1위 미래 그룹부터 시작했지요. 미래 그룹의 중심은 미래 건설이고요.”

“참말이냐?”

그럼 진짜다.

재벌들의 뒷이야기를 잘 아는 분에게 비싼 과외까지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다만 이번에 공부했다는 건 아니고, 전생에 회귀를 준비하면서 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미래건설의 최대 문제가 중동, 특히 이라크에 뿌려놓은 미수금이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가수주로 수익성도 적은데, 돈도 나중에 받기로 해서요. 그걸 멋대로 해놓은 게 지금 미래건설 회장이고요.”

왕회장 전명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래건설의 미수금 문제는 내부자들만 아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문제의 그 녀석이 자기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서 저가 수주를 남발했었는데, 당시엔 돈을 그저 잘 벌어오는 줄로만 알았다.

작년에서야 남 좋은 일만 하고, 제대로 된 실적은 하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예 손해를 본 건 아니었고, 중동의 나라들이 약속한 날에 대금은 꼬박꼬박 입금했으니 불같이 화를 내고 넘겼다.

다만 미래 그룹의 심장과도 같은 미래건설의 건전성을 크게 해쳤으니, 기회를 봐서 쳐낼 작정이었다.

여기까지 말했던 유재원은 번뜩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잘하면 이번 기회를 통해 이름도 말하기 싫은 그 작자를 일찍 떨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뭐라고 했길래 미래 건설의 최고로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신 거예요?”

전명헌은 얘가 뭐 이런 것까지 물어보니 싶었다. 다른 이였다면 호통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전명헌에게 잘 보인 덕에 호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대통령이나 정치권에 대해 환상을 가진 녀석이니, 현실을 일찍 일깨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켜보라고 했단다.”

“에? 겨우 잘 지켜보라는 한 마디에 그렇게 해준 거예요?”

“겨우라니. 무려 5선 대통령의 하명이었다.”

“헤에, 제가 듣기엔 진짜 잘 지켜보라고 경고를 주신 거 같은데요. 건설회사 운영을 맡긴 결과도 별로잖아요."

"아니다. 별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다."

"그런데 미수금 말이에요. 조금 할인을 해줘서라도 일찍 회수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켜보라고 한 말이 뒤를 봐주라는 게 아니었냐는 물음에 그런가 싶기도 하는 전명헌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미수금이란 단어가 전명헌 회장의 귀에 콕 박혔다.

유재원의 말은 또 전명헌 회장이 이제껏 했던 고민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전명헌 회장의 성격은 손해를 보는 건 싫어한다.

100원 하나라도 아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아예 받지 못하게 되어 미수금이 손실금으로 변하면 더욱 속이 쓰릴 거다. 그래서 원래 받아야 할 돈을 할인을 해서 덜 받더라도 일찍 입금해달라고 할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건 전명헌 회장의 마음속 안에서만 있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고민이었다.

그건 본인 스스로 납득할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남들이 보기에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밀고 나갈 뚝심이 있었던 것은 본인의 판단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수금을 받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두고 보는 상태인 것이다.

“좀 더 설명해보려무나.”

“지금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의 조지 부시잖아요. 공화당 하면 전쟁이고, 지금 전쟁이 날 것 같은 지역은 중동이니 위험하다는 거예요.”

전문가가 들었다면 웃음을 칠 분석이었다.

어린아이 수준의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 결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만간 실제로 일어날 일이었다. 심지어 전명헌 회장의 마음에 울림까지 만들어 주었다.

“알겠다. 만약 네 말이 맞는다면 큰 선물 하나 해주마.”

“헤헤, 선물이요? 차라리 내기하는 게 어때요?”

“내기? 이 늙은이랑 말이냐?”

유재원은 속으로 제발 넘어오라고 빌었다.

고민하는 모습의 전명헌 회장을 보니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할 걸 그랬나 싶었을 정도다.

“좋다. 네 말이 3년 이내에 이뤄지면 소원을 들어주마. 대신 틀리면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물론 네가 이기더라도 무리한 소원은 빌지 말고.”

예에!

그야말로 무척이나 허접스러운 미끼였지만, 왕회장님이 덥석 물어주셨다.

“알겠어요! 그런데 제 소원은 이미 정해 놨어요.”

“뭐라? 그게 뭐냐?”

“나중에 제 회사가 잘 되면 서울에 커다란 본사 빌딩을 세울 거거든요. 큰 빌딩 세울만한 땅 좀 저렴하게 팔아주시라고 할 거예요.”

“땅?”

“네, 입지가 좋은 강남의 잠실이나 도곡동 같은 곳에 세우고 싶은데, 지금은 비싸서 못 사거든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살 테니, 다른 사람에겐 팔지 마세요.”

왕회장 전명헌은 유재원을 다시 보았다.

미래건설은 한국 제일의 건설회사인 만큼, 땅도 많이 가지고 있고, 유재원이 말한 잠실이나 도곡동에도 차명으로 소유한 땅이 있었다. 당연히 나중에 시세 차익을 거두기 위해서 보유한 것인데, 그중에서도 도곡동과 잠실은 입지가 제일 좋은 곳이었다.

그 땅이 어떻게 자신에게 있는지 아는 것도 신기했고, 저만한 나이에 커다란 본사를 지어 올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좋다. 대신 너희 본사는 내가 지어주마.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럼 소원이 아니라, 거래인 거잖아요……. 뭐, 그래도 좋아요. 국내 최고의 건설회사니까 다른 데 맡길 수도 없지요. 게다가 오늘 금과 같은 조언도 주셨으니 미래 건설에 기꺼이 맡기겠어요. 대신 감리는 빡빡한 곳에 의뢰할 테니,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세요.”

요 맹랑한 녀석을 보았나.

버릇이 좀 없게 느껴지다가도, 대견하기도 했다. 하여튼 키우는 맛이 있는 녀석이라고 유재원을 다시금 높게 평가하는 전명헌 회장이었다.

이렇게 서로간의 할 말은 다 했기에,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아참! 세배받으셔야죠!”

그 미묘한 틈새를 놓치지 않는 유재원이다. 설날은 어제였지만, 끝까지 뽑을 건 뽑는다!

전명헌 회장도 사양하지 않았다. 세배 한 번 하고 10만 원짜리 수표를 받은 유재원은 다음에 또 뵙자는 말로 작별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올라올 땐 전명헌 회장이 함께했지만, 내려갈 땐 비서만 배웅했다.

예쁜 누나라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허허, 저 녀석. 중동에 가서 굴러도 굶어 죽진 않겠군.”

세뱃돈을 받아들고 희희낙락거리며 유재원이 나간 문을 잠깐 보며 중얼거리던 전명헌 회장은 곧 인터폰을 누르며 말했다.

“그 녀석 인사자료랑 건설부문 최근 5년간 결산 보고서 가지고 당장 올라와.”

-예, 회장님.

‘그 녀석’이라고 말했지만, 인터폰 너머에선 어떤 반문도 없었다. 이미 회장 비서실 안에서는 미래건설 회장이 왕회장에게 찍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녀석하고 부르면 미래건설 회장이 딱 나오는 거다.

“그리고 강남에 보유한 땅 리스트 정리해서 올려보내. 특히 잠실하고 도곡동 말이야.”

-알겠습니다.

왕회장의 지엄하신 명령은 빠릿빠릿한 비서들을 통해 순식간에 수행되었다.

회장 사무실에 서류들이 곧 올라왔고, 자세한 설명을 위해 미래건설 임원들도 소환되었다.

예쁜 비서 누나의 안내를 따라 로비로 내려오니 김대석이 차를 딱 대놓았다.

바람처럼 내려서 뒷문을 열어주려고 했는데, 유재원과 같이 내려온 사람을 보더니 딱 굳어버렸다.

“두, 두 분? 어, 어디로 모실까요?”

멋진 모습은 다 사라지고 말까지 더듬었다.

“두 분? 이 누나는 절 배웅하려고 내려오신 비서님이에요.”

“어? 어? 그렇습니까?”

무슨 이상한 상상을 했던 건지, 유재원의 말에 더 당황하는 김대석이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올라가세요.”

유재원이 비서에게 꾸뻑 인사를 하자, 비서도 배시시 웃으면서 인사했다. 유재원은 곧 차에 올랐고, 김대석도 비서에게 눈인사하고는 후다닥 운전석에 올라, 자동차를 몰았다.

“한눈에 반했죠? 연락처 알아봐 드려요?”

“헉? 진짜로?”

“헤헤, 하는 거 봐서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김대석은 그 비서를 몇 초 봤다고 이렇게 열을 올리나 모르겠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언제쯤 자신도 가슴 뜨거워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전생에는 일에 치어 독신으로 살았는데, 이번 생은 분명 다를 거라고 믿는 유재원이다.

“당연히 서울 지사로 가야죠.”

“예!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짝을 찾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결정적으로 지금은 나이가 문제이지 않은가.

오피스 프로그램과 차세대 운영체제로 열심히 빈집털이하고, 이런저런 사업에도 집중하다 보면 나이도 절로 먹을 테고, 적당한 여유도 생길 거 같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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