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1화 (61/1,007)

[61] 자이언트 킬러 ==============================

#43-1

-내일 밤은 나하고 우우 사랑할 끄~야

뭐지?

제법인데.

분명 저쪽에 보내준 건 반쪽짜리 데모 테이프였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했는지 완곡을 거의 비슷하게 복구해냈다.

절대음감은 아니라서 한 번 듣는 것으로 음표 하나까지 완벽하게 불렀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약간 다른 느낌도 난다. 그런데 곡의 흐름과 가사는 원래의 노래와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느낌이 왔다.

악보를 본다면 제대로 검사해볼 수 있을 거다. 아마도 싱크로율은 95% 이상일 것이다.

“이거 노래가 이상하네요.”

노래가 좋구나 싶었던 유재원이었는데, 김대식은 느낌이 좀 달랐던 모양이다.

“뭐가 이상한데요?”

“멜로디는 좋은데, 가사가 변태 같네요. 남자랑 데이트하는 데 화장도 안 하고 나온 여자가 좋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밤에는 사랑할 거라니. 사장님 들려드리기에 부끄러울 만큼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틀림없이 취향이 좀 변태적인 녀석이 가사를 썼을 겁니다.”

“헤, 그렇군요.”

신기한 느낌이었다.

전생에서 배워온 것이긴 해도 가사 중에 몇 줄은 유재원 본인이 썼던 것이니 말이다. 그걸 가지고 원곡과 거의 비슷한 가사를 완성했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와 비슷한 도진하의 흑역사가 몇 년 전에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대기업 사모님이랑 바람이 나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도진하 본인은 간통죄로 감옥에 잠깐 다녀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대기업이 오늘 만날 전명헌 회장이 거느리고 있는 미래 그룹의 계열사였다.

이름이 미래건설이었나.

한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전통의 기업이었다. 소양강 댐도 만들었고, 경부 고속도로도 만들었고, 7, 80년대엔 해외로 진출해서 중동 건설 붐을 일궈냈던 회사였다.

몇 년 전에 능력 좋은 인물이 미래건설의 사장이었는데 도진하의 불륜 사건과 휘말려서 사의를 표하고 내려왔고, 지금은 문제의 그분이 사장 명패를 달고 있을 것이다.

‘노래 하나로 거기까지 연결되네’

하여튼, 사람의 일은 이리저리 복잡하게 엮여 있다는 걸 실감했다.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고, 문제의 그분에 대해선 생각이 많아지는 유재원이었다.

명곡을 먹튀한 도진하도 곱게 보이진 않았다.

사실 그게 본인의 노래가 맞긴 하다. 하지만 원래보다 1년은 빨리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유재원의 공이었다.

원래 역사보다 1년 이른 공개가 과연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유재원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도진하에게는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는 마음은 확고해졌다.

‘도진하 말고도 아직 응답이 없는 사람이 둘 더 있지?’

그 사람들도 유념해서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한 유재원은 연습장에 시선을 돌렸다.

라디오를 이런저런 생각들을 끄적이던 연습장에 ‘도진하 ×’라는 글자를 굵게 박아 넣었다. 여기에 아직 응답이 없는 가수 둘의 이름을 더 적었다. 살생부 같은 건 아니지만, 여기 적힌 이름들은 앞으로 유재원의 호의는 절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대석이 모는 자동차는 서울에 입성했다. 톨게이트를 지나서 종로구로 향했다.

미래 그룹 본사는 종로구 계동에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목 좋은 곳에 큼직이 자리한 백색의 15층 건물이다. 89년만 하더라도 상당히 큰 명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입구에 들어서자 날 선 경비가 용무를 물어왔다.

“ID 테크놀로지 유재원 사장입니다. 회장님과 미팅 약속이 있습니다.”

1호 차 운전사로 제법 경험이 쌓인 김대석도 이젠 떨지 않고 응대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회장님이라니 살짝 고압적이던 경비들이 움찔했다.

이 맛에 1호 차 운전을 매일 해도 즐거운 김대석이었다.

미래 그룹의 왕회장님이 매일같이 걸어서 출근한다는 본사였다. 그러다 보니 경비들은 회장님이라는 단어에 끔뻑 죽는다.

딱히 멋지다거나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경비를 서 봐야 들어올 사람은 다 들어갈 수 있다.

보안을 유지하려면 빌딩 전체에 인텔리전트 시스템을 깔아 놓고 신분과 보안등급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지정해주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ID 그룹의 본사를 만들 때는 인텔리전트 시스템에 자체 보안 장치까지 만들어서 산업 스파이 놈들이 절대 침입할 수 없도록 할 거다.

“네, 확인되었습니다. 곧장 로비로 가시면 됩니다.”

경비의 말에 김대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액셀러레이터를 살짝 밟아 로비까지 서행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 로비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왔다.

왕회장 전명헌이었다.

소탈함 그 자체인 전명헌이다.

회사에 출근할 때도 근처의 자택에서 아들들과 함께 10여 분을 걸어오는 게 전통으로 만들어질 정도다. 일성이 재벌의 화려함을 상징한다면, 미래는 대기업답지 않은 짠돌이 기질이 특징이었다.

다른 말로 일성은 계산기 두드리다 뒤돌아 버리는데, 미래는 해보지도 않은 일을 벌여놓고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임자 해봤나?’

전명헌 회장이 조선업, 자동차업을 시작할 때 만류하는 임원들에게 했던 이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오, 우리 미래자동차로군.”

덕분에 전명헌 회장도 차에서 내리는 유재원보다 자동차를 먼저 반겼다.

그랜저는 미래 자동차의 첫 번째 플래그쉽 세단이었다. 그만큼 그랜저를 준비하면서 했던 고생은 그대로 전명헌 회장의 추억이 되었다. 최고의 지위에 있으니 미래 자동차의 실무진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미쓰비시 자동차와의 공동 개발을 추진하면서 일어난 온갖 문제는 골치 아픈 것들이었다.

“국내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그랜저만큼 편안하고 듬직한 발이 되어줄 차는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면 모두가 이 차를 찾을 거예요.”

중고차 시장에서 싼값에 주워 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유재원이다. 제값을 주고 샀더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외제 차 말고는 견줄만한 차는 아직 없다.

“흐흐, 그러니까 너도 이제 성공했다는 말이구나.”

“헤,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나요?”

“배고프지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운전기사도 오라고 해.”

전명헌은 확실히 격을 따지는 분은 아니다.

유재원의 운전기사 김대석까지 챙기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설마 미래 그룹 구내식당으로 가려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대신 미래 그룹 본사로부터 7분쯤 거리에 있는 만수옥이라는 설렁탕 집으로 이끌었다.

전명헌 회장, 수행비서 하나. 그리고 유재원과 김대석 이렇게 넷이 움직이는 단출한 일행이었다.

만수옥을 자주 찾는 모양인지, 고정석이 있을 정도였다. 따로 주문도 받지 않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설렁탕이 턱턱 나왔다.

“여기 수육 둘.”

평소엔 설렁탕만 딱 먹고 가는 전명헌이었지만, 유재원이 왔다고 수육까지 시켜 주셨다. 아마 다 본인 취향의 음식일 것이다. 유재원이 어른 입맛을 가져서 다행이지, 평범한 꼬맹이였다면 이런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테니.

물론 지금은 어른 입맛을 가진 유재원에겐 딱 맞는 음식이었다.

유재원은 깍두기 국물과 다대기를 풀은 다음 밥까지 한 번에 말아서 크게 떠먹었다.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몸속까지 파고든 찬바람이 따끈한 설렁탕 국물에 사르르 녹았다.

“자네, 설렁탕 먹을 줄 아는구먼.”

유재원이 먹는 모습을 본 전명헌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숟가락을 놀렸다.

점심을 푸짐하게 먹은 유재원과 전명헌 회장은 다시 계동 미래 그룹 본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눈발이 날리며 서울을 새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날이 이래서 북악산 등산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구먼.”

전명헌 회장은 눈을 쏟아내는 하늘을 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이 양반. 진짜 등산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북한산은 아니고, 북악산이었던 모양인데, 북악산 코스도 무척이나 힘든 곳이었다.

하늘이 도운 덕에 유재원은 북악산 정상이 아닌, 따듯한 회장실에서 전명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 자네를 부른 건 뭐 소소하게 주문도 하고, 조언도 해주려고 했던 거야.”

주문과 조언?

“키보드 워리어라는 타자 연습기 말이야. 시장에서 꽤 좋은 반응이 오고 있다더군. 조만간 추가 주문이 갈 거야. 흠, 다 합치면 1만2천 장쯤 되려나?”

순간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유재원이다.

미국판과 비교하면 비주얼과 게임성이 많이 떨어지는 한글판 키보드 워리어 1.0이었다. 대신 교육용으로는 아주 좋고, 사양이 낮은 컴퓨터에서도 잘 돌아가서 가정이나 학교에선 필수 구매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그걸 1만2천 장이나 산다는 건 놀라운 이야기였다. 미래정보통신이 한 달에 파는 컴퓨터 숫자는 대충 1, 2천 대 수준이다.

삼보컴퓨터보다 숫자가 작다. 전자사업을 맨 나중에 시작한 후발주자라서 그렇다. 이런 미래정보통신이 1만2천 장을 소화하려면 1년으론 부족하다.

“아, 우리만 쓰려고 사는 건 아니란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올해 체신부의 컴퓨터 보급 사업이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이야기다. 상반기에만 무려 1만 대 규모라고 한다. 컴퓨터반 하나에 보통 40대가 들어가니 250개 학교에 보급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전과 달리 컴퓨터의 스펙이 매우 올라갔다고 한다.

사실 교육용 컴퓨터는 상당히 낮은 사양이었다. CPU는 8086 XT가 대세였고, 모니터는 녹색 흑백 모니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286급 컴퓨터에 VGA 카드와 컬러 모니터가 기본이고 일부 고 사양은 사운드카드와 스피커도 장착할 거라고 했다.

고급 부품을 사용하니 대당 가격이 올라가는 것도 당연한 일. XT 컴퓨터가 100만 원 선이었다면, 컬러 모니터에 286 컴퓨터는 최소 250만 원 이상이다.

마진율은 그대로이지만, 가격이 오르면 그만큼 남는 것도 많다. 컴퓨터 업체들은 체신부 보급사업에 참가하기 위해 한창 견적을 짜고, 여기저기 선을 대보느라 정신이 없다는 설명까지 해주었다.

“숫자가 이만큼 늘어난 것도 다 네 덕분이지.”

그러니까 유재원이 작년 기업인의 밤 행사에서 대통령에게 컴퓨터 스펙이 떨어진다고 하소연했던 게 받아들여진 것이란다. 게다가 교육용 컴퓨터였으니, 기본으로 탑재되는 프로그램에서 무척이나 교육적인 키보드 워리어가 빠지면 안 되는 법.

MS-DOS와 함께 기본 번들로 키보드 워리어를 지정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니 체신부 보급 사업에 입찰하려면 타자 연습기 키보드 워리어를 사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 컴퓨터 업계는 네 녀석의 회사에 공동으로 구매하기로 했다. 그게 1만2천 장이다. 하반기에는 몇 장 주문하게 될지 모르지.”

“고맙습니다!”

판매량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미국에서 150만 장쯤 팔아치우긴 했지만, 그건 미국이라 가능한 숫자다. 한국에서 1만2천 장은 상당한 숫자였다. 적어도 90년대 중반은 가야 10만 장 타이틀이 나오는 게 한국의 현실이었다.

겨울 방학 내내 박스접기 부업으로 여주의 아주머니들이 쏠쏠한 용돈 벌이를 하셨는데, 당분간 일감이 끊길 일은 없을 거 같다.

“어, 그럼 대량 구매를 하시니 할인을 해드려야겠네요?”

얼마나 해드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전명헌 회장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예? 왜요?”

‘왜요’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미래 그룹 전명헌 회장의 짠돌이 정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죽했으면 전명헌 회장의 사모님은 아직도 재래시장에서 장을 봐 오시고, 손수 밥을 지으신다. 심지어 집 안에서는 몸뻬를 입으시고, 욕실에는 깨진 타일이 그대로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요식행위가 아니라 이제껏 그렇게 살아오신 탓에, 그대로 굳어진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이런 전명헌 회장이 깎아주겠다는 걸 거절하는 건 처음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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