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자이언트 킬러 ==============================
#42-2
“사장님, 사모님, 오르시지요!”
“대석 씨도 설날은 쇠야 하는데, 우리 때문에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 서울 출신 아닙니까. 우리 집은 신정을 보내서 문제없습니다.”
부모님이 그랜저에 오르기 전, 김대석에게 미안해하셨다. 김대석은 양손을 흔들면서 괜찮다고 했다.
아침엔 큰집을 들렀으니 이제는 어머니 김말숙의 친정집이자 유재원의 외갓집에 갈 채비를 하는 중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일찍 여읜 아버지와 달리, 외갓집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정정하게 계셨다. 그러니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완전 무장을 하기로 했다.
단적으로 서울에서 쉬고 있을 1호차 운전사인 김대석 내오마을까지 그랜저를 끌고 내려왔다.
아버지는 기성복이긴 해도 치수가 잘 맞는 양복을 입으셨고, 어머니는 투피스에 모직 코트를 걸치셨다.
아직 젊으신 부모님이었다. 여기에 어울리는 새 옷을 잘 차려입으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여기에 그랜저가 있으니 성공한 사업가 부부처럼 보이셨다. 유재원도 편안한 캐주얼 대신, 정장을 입었다.
그랜저 뒤쪽 트렁크에는 100년 정통의 정관장 마크가 선명한 홍삼과 유재원이 트렌드를 만들어낸 한우 선물세트도 있었고, 미국 공항 면세점에서, 최강욱에게 부탁해 기념품으로 샀던 양주도 실었다.
마치 비즈니스 전쟁을 치르러 가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유재원은 자신만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과 친척들까지도 함께 잘 되고 싶었다. 큰집을 비롯한 친가들은 전면적으로 협조하진 못했어도, 일부는 따라와서 그 수혜를 입는 중이었다.
외가는 아직 아니었다.
이유를 짐작해 보니 답은 간단히 나왔다.
유재원과 큰집은 한마을에 있었다. 다른 친척들도 덕진리 안에 있었다. 덕분에 유재원이 어떤 식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지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르신들 눈에는 위험한 투자도 할 수 있었다.
반면 외가는 아니었다.
여주를 중심에 놓고 덕진리가 동쪽에 있다면, 외가는 서쪽인 능서면이라는 곳에 있었다.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유재원이 잘 나간다고 해도 실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유재원은 외가 역시 자신의 성공과 괴리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특히 자본의 대폭발이 있는 89년이나 90년부터는 불과 몇 달 사이로 확 벌어질 수 있었다. 자본이 팽창하는 시기를 놓치면 순식간에 낙오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였기에, 특단의 대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꽃단장과 선물 폭탄이었다. 눈으로 보여주면 적어도 예전처럼 아예 참여를 거부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안전띠 잘 착용하셨습니까?”
부모님을 뒷자리에 오르셨고, 유재원은 조수석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 김대석이 안전띠까지 챙겼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다 착용한 걸 눈으로 확인한 그는 부드럽게 자동차를 몰기 시작했다.
김대석의 운전 솜씨가 빛났다.
능서면은 아직 신작로가 다 깔리지 못한 곳이었다. 신작로를 벗어나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길이 좁아졌다. 그런데도 능숙하게 차를 몰아 외갓집 마당 안까지 들어섰다.
멍멍멍!
가장 먼저 반기는 건, 누렁이었다. 작년에도 분명 보았고, 뼈다귀도 주면서 환심을 사놨던 것으로 기억했다. 온 몸을 꼬리처럼 흔들면서 좋아했던 녀석이 지금은 외부인 보듯 미친 듯 짖었다.
다행히 개가 짖는 소리에 안방 문이 열리고 이모들과 외삼촌이 모습을 드러내자, 누렁이가 짖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웬 자동차인가 싶던 차에, 문이 열리고 유재원 가족이 차에서 내리자, 다들 깜짝 놀랐다.
“엄니! 큰언니 왔어! 얼른 나와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모가 집 안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곧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나오셨다. 설날이라고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으신 모습이었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장인 어르신,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부모님의 인사와 함께 유재원도 외할머니에게 먼저 가서 푹 안겼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나!”
“유 서방 왔는가.”
왁자지껄한 인사였다.
곧이어 자동차 뒤에서 선물이 쏟아졌다. 김대석이 나르다가, 양이 많은 걸 본 외삼촌이 달라붙어서 몇 번 왕복했다.
외가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자동차부터 시작해서 선물 폭탄까지.
선물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이제까지 농사일만 하셨던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는 비로소 외손주 유재원의 성공을 일부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재원과 부모님의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성공이었다.
비록 ID 테크놀로지는 함께 하진 못했지만, 다음 사업은 꼭 함께하기로 했다. 심지어 이모들뿐만이 아니라,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던 외삼촌까지 최대한 투자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외가가 적극적으로 나온 건, 설날 보여준 물적인 증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 시작할 사업의 영역이 세대 변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어르신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부동산과 채권, 각종 금융 상품에 대한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설립을 할 것이라고 했다.
부동산!
외가 식구들이 꽂힌 건 부동산이었다.
어린아이가 겁도 없이 부동산 투자를 한다고 뭐라고 하는 식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유재원의 능력은 이미 객관적으로 증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서 밥을 얻어먹고 왔다. 그때 받아온 다기 세트 중에 하나를 외할아버지께 드리니 평생 가보로 삼으실 기세였다. 미국에서의 성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부동산 쪽도 그 능력이 증명 되었다.
이번에 큰집 선산의 일은 어머니를 통해 외가에도 자세히 알려졌다. 여기서 황재홍을 이용해 거래를 대리하게 했고, 그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했다는 실적이 있다. 이런 유재원에게 감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식구는 없었다.
다만 투자의 형태는 지분이 아니었다.
앞으로 유재원은 지분을 나눠주는 투자는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은 없었지만, 경영에 참견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꽤 껄끄러운 일이었다. 또한, 신규 사업과 같이 목돈이 필요한 경우, 배당이 강요된다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다.
ID 테크놀로지에서 그대로 돈을 내서 새로운 사업체를 꾸린다면, 그 사업체의 지분 역시 모기업의 주식 비중에 따라 나뉜다.
그렇기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배당을 통해 돈을 받은 후, 그 돈으로 설립해야 했다.
ID 테크놀로지 하나라면 약간 불편하긴 해도 감수할 만한데, 앞으로 생겨날 자회사들 모두 외부투자자를 받게 되면 복잡해지니 미리 방침을 정해둔 것이다.
더 나아가 ID 테크놀로지의 대주주님들 역시 배당액이 어느정도 쌓이면 조정을 할 작정이다.
하여튼, 지분 투자는 아닌 대신 투자 수익금은 확실히 정산해주기로 했다. 은행에 맡기거나, 채권을 사거나, 잘 모르는 주식을 사서 대박을 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투자가 될 거라 장담한다.
다음날.
“다녀오겠습니다.”
유재원이 회사 차에 오르면서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설날을 잘 보낸 유재원의 원래 계획은 며칠 집중해서 오피스 소스코드의 주석 번역과 최적화를 작정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진성 컴퓨터 매니아인 유재원에겐 매우 생산적이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유재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미래 그룹 왕회장 전명헌.
그가 유재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어떻게 유재원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를 해왔다. 처음엔 어머니가 받으시다가 장난 전화인 줄 아셨다. 미래 하면 일성과 더불어 국내 1, 2등을 다투는 대기업이고, 그 대기업의 왕회장 본인이 직접 전화를 할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일 시간 되나? 같이 등산이나 할까?
미래 그룹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유재원이었다.
전명헌이 유재원의 상사도 아니다. 그러니 한겨울에 웬 등산이냐며, 간단히 거절해도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직접 전화까지 주셨고, 번역 작업은 이제 겨우 하루 정도 남았기에 시간을 내는 건 문제없다.
서울에 올라간 김에 처리할 일도 몇 가지 있었다. 부동산을 비롯한 금융상품 투자를 위한 회사 창업과 황재홍과의 계약 등등의 일이었다.
진짜 등산이나 가자고 자신을 불러내는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왕회장 전명헌의 취미는 등산이라서 걱정은 되지만, 설마 노구를 이끌고 겨울 산에 올라가진 않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일을 겸사겸사 처리하는 김에 왕회장 전명헌도 보기로 하고 서울행을 선택했다. 게다가 운도 좋게 김대석은 어제 올라가지 않고, 시골 친구들과 만나 논다고 덕진리에서 쉬었던 터라 편안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아, 노트북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길, 멍하니 창밖을 보던 유재원이 푸념했다.
차 타고 이동하며 버려지는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라도 있었으면 자투리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이런 상상도 사치인 시대였다.
랩톱이라고 나와 있는 건 전에 흉기나 다름이 없는 덩치를 자랑했고, 성능이나 배터리도 문제였으니 말이다.“
“노트북 말씀이십니까? 조수석 뒤에 챙겨 놨습니다.”
운전 중이던 김대석이 유재원을 챙겼다.
뭔가 하고 봤더니, 연습장이었다. 유재원이 말하는 노트북과는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른 물건이다.
“고마워요.”
그래도 혹시나 챙겨 놓은 김대석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유재원이다. 연습장이라도 펼쳐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이면 시간이 잘 갈 것 같았다.
“아, 라디오도 좀 켜주세요. 음악 많이 나오는 거로.”
풀옵션 자동차라서 카세트플레이어도 달려 있다. 그런데 미처 생각을 못 해 테이프를 따로 준비하진 못했던 유재원인지라, 라디오를 켜달라고 요구했다.
“예, 사장님.”
치지직 소리와 함께 곧 주파수가 잡혔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김대석에겐 최신가요겠지만, 유재원에겐 89년도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대중가요였다. 노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낯은 익은 그런 노래다.
‘그러고 보니 이성희에게 곡을 준 게 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네.’
이성희 말고도 변진석과 남희에게도 곡을 팔았다.
그런데 다들 아직 신곡발표 소식이 없다. 정규 앨범은 12곡 정도가 들어가니, 그 곡을 다 만들 때까지는 발표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다고 앨범을 만든다며 텔레비전에서 한동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앨범 만든다고 푹 쉬러 들어가는 건 아직 음악계의 트렌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음악 방송을 보면 이성희나 변진석은 종종 출연했다.
한참 뒤에 서태지가 나온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풍토였으니, 가수의 활동을 보며 언제쯤 신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흘러나오던 이름 모를 곡이 끝나고 DJ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트로트계의 신성 도진하가 신곡 ‘화장도 안 하는 여자’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봤는데요. 아우! 트로트 선배님들 긴장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내줍니다. 자, 한 번 들어 보시죠! 신곡 화장도 안 하는 여자!
도진하?
신곡?
유재원이 데모 테이프를 도진하에게 보내긴 했다. 하지만 도진하 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거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거절이 아니라 먹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데모 테이프는 완곡이 담긴 게 아니었다. 먹튀 방지를 위해 딱 반만 담아 보냈었다.
반쪽짜릴 가지고 과연 그걸로 제대로 된 곡을 만들었을까?
의구심이 가득한 유재원은 낙서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네요. 이번에도 힘차게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