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슈퍼 시너지 효과 ==============================
#41-2
차를 타고 오며 일렉트로닉아츠와의 미팅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고스란히 동료들에게 발표한 것이다.
우와아악!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의 반응도 격했다. 흥분하기 쉬운 성격인지 로메로는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이들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ID 소프트웨어 같은 신생 게임사가 겪은 문제는 수도 없이 많다.
게임을 잘 만드는 것도 큰일인데, 완성한 게임을 팔만한 곳을 찾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주변 잘 아는 컴퓨터 가게에 걸어 놓기도 하고, 인터넷에 데모판을 올리기도 한다. 제일 좋은 건 대형 유통사를 잡는 것이다.
전국에 유통하기 위해서 찍어내는 기본 수량이 있었기에, 망해도 어느 정도 수익이 나는 형식이다.
그런 면에서 일렉트로닉아츠나 액티비전과 같은 유통사를 잡는 건 신생 개발사의 꿈이었다. ID 소프트웨어 역시 그랬다. 그런데 유재원을 통해 가장 어려운 일을 풀어버렸으니, 더는 바랄 게 없는 ID 소프트웨어의 직원들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죠!”
여기서 제일 어린 유재원이지만, 사장이라는 특권을 통해 최강욱과 ID 소프트웨어의 직원들을 이끌고 댈러스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평일에도 쉽게 자리가 나지 않는 곳이었지만, 미국 입성 첫날에 예약해 두었기에, 존과 그의 동료들에게 질 좋은 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여 줄 수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기능이라고 했지?”
“이미지 보간법(補間法) 인마.”
“정확히는 이방성 텍스처 필터링이란다.”
유재원이 앉은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존을 비롯한 ID 소프트웨어 동료들이 중구난방 떠들고 있다.
댈러스 시내의 좋은 식당에서 거나한 점심을 대접받고 온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은 곧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비록 20대 초반에 젊은 청년들이지만, 본인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재원도 동참했다.
ID 소프트웨어에 직접 방문한 것은 존 카멕과의 친분을 쌓는 것도 있었지만, 개발 중에 만난 난관을 돌파해주기 위해서도 있었다.
존이 쓰던 컴퓨터에 앉아서 코드를 살펴봤고, 그중에 나온 버그나 개선점을 지적해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존은 아직 천재성이 확 깨어나지 못해서 어렵게 느끼고 있었던 것뿐이다.
지금 ID 소프트웨어에서 가장 애를 먹는 문제가 이미지의 확대와 축소였다.
현재 개발 중인 울펜슈타인의 스테이지는 3D 던전이었고 그 안에서 주인공인 슈퍼 솔저를 플레이어가 조종해 마음대로 움직이며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폴리곤을 가지고 만든 3D 던전이 아니었고, 오브젝트 역시 3D 모델링이 아닌 이미지였다.
현재 컴퓨터로는 많은 폴리곤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실리콘그래픽스의 전용 워크스테이션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지의 문제는 가까이 다가갔을 때, 픽셀이 대문짝만하게 커져서 품질이 확 떨어진다는 점이다.
유재원이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한 이미지 처리 기법이다. 픽셀과 픽셀 사이에 중간값을 넣어주는 간단한 방식으로 모니터가 모자이크 세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바닥과 천장, 벽 등등.
가까이 다가가면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이미지 처리를 해주자 훨씬 보기가 좋았다. 다만 CPU의 처리능력을 많이 요구하는 만큼 286에서는 프레임이 조금 많이 떨어졌다.
유재원이 선보인 신기술은 이뿐만이 아니다.
비디오카드의 독특한 메모리 구조를 이용하는 이미지 압축기법으로, 화질과 로딩 속도를 잡는 방법과 게임의 상황에 따라 배경 음악이 달라지는 기술도 선보였다. 이전까지 스테이지 하나에 배경음악 하나였는데, 적들이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음악이 격해졌다가 위기를 벗어나면 다시 잔잔해지는 것이다.
하드웨어 스크롤부터 해서 89년도 게임 업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비법을 보여주었다.
비기가 나올 때마다 존과 동료들은 껌뻑 넘어갔다. 다만 도스의 기본 메모리 640kb를 뛰어넘어 액세스 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선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640kb로도 충분하고 1메가 이상 메모리가 달린 컴퓨터는 정말 희귀한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픽의 질이 올라가고 스케일이 커지면 640kb 크기의 메모리로는 턱도 없는 걸 잘 아는 유재원이었다. 나중엔 EMS니 XMS니 DOS4GW니 하는 별의별 기법이 다 나올 정도로 문제가 심했다.
하여튼, 유재원이 전수한 기법을 통해서 울펜슈타인의 비주얼과 게임성은 전생의 것보다 몇 배는 뛰어나게 될 것이다.
“컴퓨터의 성능만 보면 아케이드 오락실의 기판보다 몇 배는 뛰어나지만, 컴퓨터 게임의 비주얼이 아케이드를 따라가지 못한 건 이러한 기술의 표준화가 덜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런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혼자만 알고 있으니 쉽게 퍼지지 못했죠. 그래서 우리가 한 번 바꿔보려고요.”
ID 소프트웨어를 방문한 진짜 목적이 여기에 있다.
“설마?”
“하드웨어 스크롤부터, 비디오 메모리 압축 기법, 사운드 제어법 등을 하나의 라이브러리로 묶어서 공개하면 어떨까요?”
1989년도에 컴퓨터 하드웨어 제조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사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드웨어 제조사마다 드라이버의 형식도 다 달랐고, 지원되는 기술도 개성적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제조사마다 각기 다른 드라이버를 가지고 세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비인기 하드웨어는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했고, 일부 기능은 호환성의 문제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당장 키보드 워리어만 보더라도 하드웨어 스크롤의 활성화 혹은 비활성화는 비디오 카드 제조사 특성에 달렸다.
“라이브러리라니.”
존에겐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선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가지고 자신의 게임을 돋보이는 데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키보드 워리어가 대히트를 친 이유도 매끄러운 스크롤 때문이 아니던가.
“그렇게 하면 남 좋은 일 시켜주는 거 같은데요?”
하드웨어 스크롤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주는 온갖 기법을 다 공개하는 건 자신이라면 절대 못 할 일이었다.
유재원은 존의 반응에 씩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언뜻 보기에 그런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알려드릴 비기는 기술이 발전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가면 새로운 하드웨어가 나오고, 새로운 운영체제가 나오니 다 따로 맞춰야 하는 겁니다.”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프트디스크 시절에 애플 ][용 게임을 개발할 때부터 시스템이 달라질 때마다 호환성 문제를 많이 겪었던 존이었다.
“반면 표준화된 게임 개발용 라이브러리가 있다면,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그 라이브러리에 맞춰 하드웨어를 제작하면 됩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라이브러리를 통해 더욱 나은 퍼포먼스를 뿜어내는 게임을 만들겠지요. 그러면 컴퓨터 유저들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모일 겁니다. 부품 제조사, 게임 개발자 모두 행복해질 거예요.”
“그렇군요.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결국, 존은 표준화된 라이브러리의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게 있었다.
“다만, 이걸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뭔가요? 오히려 우리 비밀 기술만 공개하고, 라이브러리 만든다고 시간까지 소비하면서 남 좋은 일만 해주는 거 같은데요.”
존의 물음에 유재원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컴퓨터 기술이 1년 후, 2년 후에도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일까요? 새로운 기술은 꾸준히 나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진 비기도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라이브러리로 공개한다고 해도 기술 발전에 맞게 주기적으로 갱신해 줘야 하죠.”
“헐, 훨씬 귀찮아지겠네요.”
“대신 라이브러리의 저작권이나 표준화는 우리가 가지는 겁니다. 즉 라이브러리에 포함될 기술과 도태시킬 기술을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우리가 만든 라이브러리를 꼭 지원할 것이고, 소프트웨어 개발사도 라이브러리를 사용하겠지요.”
이미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유재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키보드 워리어에 들어간 기술을 자신들의 하드웨어에 맞게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면 반대로 유재원이 먼저 나서서 저들에게 기술을 요구할 수 있다.
단적으로 이방성 텍스처 필터링도 VGA가 처리하게 하면 CPU의 부하를 한층 줄어들게 해줄 수 있다. 이미지 압축 기술이나 터보 메모리 구조 역시 하드웨어에 적용하면서 기술 발전을 이끌 수 있다.
두둥 하는 소리가 난 건 아니지만, 유재원의 말은 ID 소프트웨어 존과 동료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하지만 유재원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렇게 완성된 라이브러리를 공짜로 공개할 것이고, 차후에는 DOS 시대를 끝낼 차세대 GUI 운영체제에도 탑재할 겁니다.”
드디어 유재원의 큰 그림이 나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존과 그의 동료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아시다시피, 도스는 무척이나 불편한 운영체제입니다. 게다가 컴퓨터의 능력을 100% 끌어낼 수도 없지요. 조금 있으면 486 컴퓨터가 출시될 텐데, 도스로 그 능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MS에서 도스를 대체할 운영체제를 낼 기미도 없고요. 우리 ID 테크놀로지가 그 틈을 노려보려고 합니다.”
그제야 존은 유재원의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라이브러리로 단지 게임을 쉽게 개발하고,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호환성을 쉽게 얻을 수 있겠지만, 정작 자신이나 유재원은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차세대 GUI 운영체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운영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호환성이었다.
막 나왔으니 운영체제와 맞는 하드웨어도 없고, 소프트웨어도 없다. 그러니 DOS의 견고한 벽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라이브러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발사들도 운영체제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쉽게 개발할 수 있고, 부품 제조사들도 간단히 대응할 수 있다.
유재원의 준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기업 쪽으로 킬러 타이틀이 되어줄 오피스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었고, 키보드 워리어를 통해 공개한 리본 인터페이스를 차세대 GUI에 적용할 것이다.
“GUI 운영체제라니. 혹시 윈도우나 아미가 OS 같은 겁니까?”
도스에 텍스트 모드의 파일 관리자 같은 걸 올려놓은 윈도우나 전용 머신에서만 구동되는 아미가 OS랑 비교는 거부한다!
“설마요. 커널은 유닉스를 계승할 것이고, GUI는 키보드 워리어에서 보여준 리본 인터페이스로 결정했어요. 운영체제의 코드명은 안드로이드이고 라이브러리는 글라이드 X라고 명명했습니다.”
존은 경악 그 자체였다.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들어가는 안배였다. 키보드 워리어의 인터페이스는 자신도 직접 사용해 보면서 나름대로 참신하고 편리하다고 평가했던 것이었다. 그게 운영체제의 GUI가 된다면 아무리 초보라도 쉽게 컴퓨터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응? 그러면! 지금 키보드 워리어가 몇 장 나갔더라?”
“150만 장이요.”
“세상에.”
리본 인터페이스를 사용한 사람이 150만 명이라면, 단순 계산으로 안드로이드의 잠재적 사용자를 그만큼이나 확보한 것이다. 게다가 그 숫자는 앞으로 계속 늘어난다.
라이브러리부터 리본인터페이스, 오피스 프로그램과 차세대 운영체제까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동반하고 있다.
보통 시너지 효과가 아니니 슈퍼 시너지 효과라고 해야 한다. 이대로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MS는 속절없이 PC 운영체제 시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을 거다.
“여러분이 글라이드 X도 맡아 주실 거죠?”
존 카멕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맡겨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넘치는 존 카멕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소프트디스크에서 만든 게임 몇 개가 이력의 전부였다. 그럴듯한 성과 하나 없는 자신에게 이렇게 큰 중책을 맡겨주는 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광입니다.”
존 카멕은 물론이고 그의 동료들까지 한목소리로 답했다.
이후 유재원은 이틀을 텍사스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팁과 노하우를 전수했다. 말로만 설명했던 글라이드 X의 기능 중 몇 개를 직접 구현해 보여주기도 했다.
최강욱과 로버트 하일이 옆에서 문서 작업을 도왔다. 비밀 엄수 계약서도 만들어서 존을 비롯한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의 사인도 받았고, 글라이드 X의 개발 방향과 공개 방법 등의 로드맵을 그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유재원은 다시금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PBS의 컴퓨터 클로니클에 출연해 전미에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ID 테크놀로지와 키보드워리어도 열심히 광고했다. 덤으로 악몽이라 일컬어지는 키보드 워리어 파이널 스테이지도 가뿐하게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에 귀국 길에 올랐다.
89년도를 집어삼킬 세팅을 완벽히 끝냈기에 귀국길은 미국행을 시작할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이제 남은 건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터지도록 작품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된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금빛 세계가 마치 손만 내밀면 자신의 것이 될 것 같았다.
'할 수 있다.'
유재원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황금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움큼 쥐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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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의 폭풍 추천 덕에 주5일 연속 연참 연재에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하루에 글을 2개씩 올린 덕분에 89, 90년을 석권할 세팅 이야기도 한 주에 끝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벌려 놓은 게 많으니, 다음 주부터는 좀 더 빠르게 진행해보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 밤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