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6화 (46/1,007)

[46] 슈퍼 시너지 효과 ==============================

#35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쪽의 거대한 만의 끝에서 산호세까지를 요즘은 간편하게 실리콘밸리라고 부른다.

처음엔 실리콘 칩 제조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다 실리콘 칩을 사용하는 정보 통신 기술, 혹은 컴퓨터와 관련된 신생 산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나 스탠퍼드 등 명문대가 배출한 인재들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자, 최첨단 IT 회사가 난립하는 생태계가 되었고, 곧 실리콘밸리라 칭해졌다.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 시티에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제법 크게 성공한 기업이 자리하고 있으니, 일렉트로닉아츠였다.

일렉트로닉아츠 본사 한편에서는 오늘도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는 중이다.

다들 열심히 맡은 일을 하는 중이지만, 그중에서도 눈이 가는 곳이 있다면,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소포나 우편물 정리하는 파트였다.

일렉트로닉아츠는 게임 유통사였고, 액티비전과 함께 1, 2등을 다투는 잘 나가는 회사였다. 그렇기에 소규모, 혹은 개인 개발자들이 일렉트로닉아츠를 통해 자기의 게임을 유통하고 싶어, 투고를 보내오는 것이다.

다른 성격의 소포도 많다.

원본 디스크에 오류가 생겨서 교환을 신청하는 반갑지 않은 소포도 상당수였다. 소매점에서 바꿔주는 건 보증기간인 1년밖에 안 되고, 기간 안에서도 재고를 보유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면 본사에서 AS를 처리해주는 것이다.

간혹 악의적인, 혹은 경쟁사로 짐작되는 놈들이 바이러스를 담아 보내기도 하는데, 회사 초기에나 당황했지 체계가 잡힌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왔어요! 왔어!”

한참 분류를 하는 중에 직원 하나가 상자를 집어 들고 목소릴 높였다.

겉으로는 특별할 게 없는 소포 상자였다. 대신 상자에 붙어 있는 송장이 특별했다. 발송 지역은 한국이었고, 발송인이 ID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ID 테크놀로지라는 발신인이 붙은 상자를 발견하면 즉각 사장인 트랩 호킨스에게 가져다주라는 공지가 있었다.

직원은 곧장 사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자,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이제 개봉하겠습니다.”

트랩 호킨스는 커터칼을 들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포를 감싸고 있는 박스 테이프를 잘라냈다.

이런 일은 사장이 할 필요는 없지만, 소포를 개봉하는 기쁨이 각별하다는 걸 아는 호킨스 사장이었기에 직접 칼을 잡았다.

포장은 무척이나 잘 되어 있었다.

뽁뽁이라는 에어캡으로 상자 안이 가득했다. 웬만한 충격을 받아도 디스켓은 멀쩡할 것 같았다. 심지어 디스켓은 알루미늄 포일로 다시 한 번 감아져 있었다. 정전기에 타격을 받는 걸 방지하고 낱장으로 흩어지는 것도 막아주는 용도였다.

알루미늄 포일까지 제거하자 드디어 디스켓이 보였다.

제조사는 SKC, 용량은 2D, 360KB였고 평범한 검은색 디스켓이다. 라벨도 그저 손으로 쓴 것이다. 컴퓨터 가게에서 몇 달러면 살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디스켓이다. 그렇지만 호킨스 사장을 비롯한 일렉트로닉아츠 직원들에게 이 디스켓의 가격은 17만5천 달러짜리였다.

최고급 자동차인 벤츠 S클래스보다 더 비싼 녀석이라는 거다. 게다가 이놈이 일렉트로닉아츠에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그 몸값은 훨씬 비싸진다.

덕분에 디스켓을 다루는 호킨스 사장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8장이나 되는군.”

키보드 워리어 미국판이란 이름으로 #1부터 #8까지, 총 8장이 키보드 워리어 완전판 한 세트였다. 호킨스 사장으로부터 그레잇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볼륨이 크다는 건 세일즈 포인트로 삼기에 좋은 요소였다.

“아이고, 많기도 하네요. 패키지 찍을 때 디스켓 가격으로 돈 좀 나가겠네요. 게다가 에러가 나는 디스켓이 생길 가능성도 높고. 관리가 좀 힘들겠습니다.”

반면 생산을 담당하는 임원은 현실을 이야기했다. 디스켓 숫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불량이 나올 확률도 높다는 뜻이었다.

“흠, 그건 그렇지. 하지만 2HD 디스켓이나 3.5인치 1.44메가짜리 디스켓을 이용하면 두 장으로 끝이지 않나.”

“사장님, 그런 고급형 디스켓 드라이브가 달린 컴퓨터가 뭐 얼마나 많다고요? 고급형 드라이브가 대중화 되려면 적어도 1, 2년은 더 지나야 할 겁니다.”

반박이 바로 들어온다.

사장이 한 말을 반박하는 것이라도, 합리적인 의견이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게 미국 기업의 풍토였고, 실리콘밸리에서는 더욱 강했다. 일렉트로닉아츠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하여튼, 일단 실행해보는 게 먼저겠지.”

호킨스 사장과 임원들은 회사에서 제일 좋은 테스트용 PC 앞으로 갔다.

키보드 워리어를 위해 미리 준비한 시스템으로, CPU부터 키보드까지 모두 최고의 제품으로 조립했다. 사운드 체크를 위해서 미디 모듈과 PCM 처리를 위한 사운드 카드, 앰프에 오디오 스피커까지 완비된 시스템이다.

1번 디스켓을 넣고 인스톨을 입력했다.

“오우.”

키보드 워리어 완전판은 인스톨부터 본격적이었다. 보통은 안시(ANSI)코드를 이용해 간단하게 꾸민 텍스트 화면이었지만, 키보드 워리어는 인스톨 화면까지도 그래픽 모드로 진행되었다. 더구나 컴퓨터의 장치를 스스로 검색해 설정해주는 터라, 사용자가 할 일은 게임이 설치될 하드디스크 경로를 지정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호킨스 사장은 물론 냉소적인 성격의 임원들까지도 기대감이 한층 드높아졌다. 게다가 인스톨 화면에서 보였던 키보드 워리어는 프리뷰 버전보다 한층 더 세련된 모습이었다.

“오오! 에러 없이 끝났다!”

다행히 인스톨이 끝날때까지 오류가 나온 디스켓은 한 장도 없었다. 차례대로 디스켓을 번갈아 끼우면서 노심초사했던 호킨스 사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금 1번 디스켓을 넣으라는 메시지가 나왔고, 지시에 따르자 인스톨 컴플리트라는 메시지가 나오면서 화면이 종료되었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다.

호킨스 사장은 지체하지 않고 설치된 디렉터리로 가서 KWZC라는 실행파일을 실행했다. 키보드 워리어 좀비 크러쉬라는 게임 제목의 약자였다.

-부우우웅!

화면이 검게 바뀌더니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E! A! It's in the game!

PCM을 통해 깔끔하게 녹음된 일렉트로닉아츠의 캐치 프라이즈가 재생되었다.

쿵쿵하는 효과음과 함께 빨간 원에 EA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화면에 떠오른 것도 동시였다. 짧은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움직임도 너무나 부드러웠다.

일렉트로닉아츠의 로고가 지나간 다음 ID 테크놀로지의 로고가 나왔고, 곧 좀비 크러쉬라는 타이틀 화면이 나왔다.

호킨스 사장은 감동이었다.

돈을 주고 제일 먼저 나오게 만들었던 로고였지만, 그 완성도는 대단했다.

일렉트로닉아츠 자체적으로 만든 로고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하이톤의 어린 목소리로 나온 일렉트로닉아츠의 캐치프라이즈도 무척이나 고음질이었다.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나 생각해 보니 ID 테크놀로지의 미국 대리인 레밍턴 스팅의 사무실에서 최종 협상을 할 때, 스피커폰으로 들었던 목소리다. 그때도 젊다 못해 좀 어리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음질이 나빠서 확신은 없었다. 헌데, 좋은 스피커로 들어보니 확실히 어린 목소리였다.

일렉트로닉아츠의 로고와도 너무 잘 맞았다.

ID 테크놀로지와 잘 협상해서 키보드 워리어 하나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일렉트로닉 아츠에서 내는 모든 게임에 다 사용하고 싶을 지경이다.

“사장님, 얼른 게임을 해보시죠? 시간은 금 아닙니까.”

감동할 때, 꼭 초를 치는 녀석이 나온다.

제임스라는 직원이다. 하지만 지적한 녀석은 회사에서 손에 꼽을 만큼 유능한 녀석이기도 하고,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코앞인데 감동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시작 버튼을 눌러 뉴 게임을 선택해 게임으로 들어가는 호킨스 사장이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그러더니 점심시간도 홀라당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테스트용 PC 앞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으아! 한 타 남았는데!”

스테이지4의 보스가 만든 벽을 넘지 못한 테스터가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호킨스 사장을 비롯한 구경꾼들도 아쉬운 탄성을 냈다.

게임의 완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네트워크 협동 플레이가 아닌, 그냥 싱글 플레이였지만 스테이지의 구성이나 보스의 구성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정식판의 난이도도 적당했다.

분당 200타수면 스테이지2까지는 무난했고, 300이면 스테이지3까지 올 수 있다. 스테이지4부터는 최소 450타는 되어야 했다.

처음 시작했던 호킨스는 260타 정도라서, 몇 번의 시도 끝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속도만 빠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스가 시시때때로 사용하는 범위 공격이나, 속성 공격 같은 건 3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퍼즐 같은 걸 풀어야 하는 수준이라서 게임적인 센스가 뛰어나야 했다.

총 5개 스테이지라고 했으니, 볼륨 역시나 적절하다 못해 풍부했다.

심지어 프리뷰 버전에서 보여준 스테이지는 튜토리얼로 빠져서, 정식판 구매자들은 식상함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기세로 네트워크 게임도 테스트해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게임이 딸랑 1세트밖에 없어서 네트워크 멤버를 구성할 수 없었던 탓이다.

“사장님, 게임 완성도 체크는 테스터에게 맡기고 이제 불법복제 방어 장치에 대해 시험해 봅시다.”

“아, 그것도 있었지? 이지스 쉴드라던가?”

유재원이 인터넷 대신 디스켓을 항공운송으로 보낸 이유가 있다.

이지스 쉴드를 일렉트로닉아츠가 한번 깨 보라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팩스로 주고받은 공문을 통해 내기 계약은 훨씬 구체적으로 확정되었다.

이지스 쉴드의 능력을 일렉트로닉아츠가 인정한다면, 원본을 양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물론 그럴 경우 일렉트로닉아츠가 계약으로 걸었던 1만 달러를 먼저 송금하고, 회사가 출시하는 제품에 이지스 쉴드를 채용한다고 확정을 해줘야 한다.

만에 하나 이지스 쉴드가 깨지면 일렉트로닉아츠가 성공리에 만든 불법복사본을 유재원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다운로드를 통해 이지스 쉴드가 깨진 게 확인되면 일렉트로닉아츠가 1만 달러를 돌려받는 거다.

“좋아, 이제 1만 달러짜리 내기를 제대로 해보자. 아, 그리고 이 자리에서 상금을 걸지. 우리 직원 중에 이지스 쉴드를 깨는 사람이 나오면 ID 테크놀로지 측에게 받을 돈 중에 반을 주겠어!”

오오!

무려 5천 달러짜리 포상이다. 기세가 오르는 게 당연했다.

“최선을 다해주게.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디스켓이 손상되게 하진 말고. 그리고 못 깰 것 같은데 억지로 붙잡아 놓지도 말게. 크리스마스 시즌은 꼭 키보드 워리어로 압도해야 하니 말이야.”

호킨스 사장은 당부의 말을 남기면서도 선뜻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임이 좋아서 게임 회사를 차린 양반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을 두고 그냥 떠나려니 발걸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복제방지 장치가 없는 것이었으면, 자신의 컴퓨터로 복사해서 계속할 수 있었지만, 1번 디스켓이 없으면 다른 컴퓨터에서 구동되지 않았다.

그래도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인지라, 개인의 욕심보다는 회사가 먼저였다. 이지스 쉴드라는 복제방지 장치에 대한 검증을 해봐야 했기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와 더불어 1만 달러를 ID 테크놀로지에 지급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제대로 된 복제방지 기법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법복제로 인한 손실만 없다면 당장 매출이 50% 아니 100%가 오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88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되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한다고 회사가 다들 바빠졌다.

이번 크리스마스에서 일렉트로닉아츠가 선택한 주포는 키보드 워리어였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다른 소프트웨어 출시도 준비 중이다.

다 모아놓고 보니 일이 참 많았다.

특히 키보드 워리어의 경우 패키지 디자인, 포스터, 메뉴얼까지 일렉트로닉아츠가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건 원래 개발사가 해야 할 일인데, 유재원은 일렉트로닉아츠에 맡겨버렸다.

유재원은 본인이 비록 전생에 열심히 공부해 왔다지만, 88년도 미국인 감성은 미국인이 잘 아는 것 아니겠는가. 일렉트로닉아츠 측에서도 동양식 감성이 담긴 건, 아직 평이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하고 있어서 바로 수락했다.

“음, 제임스가 잘하고 있나? 아니, 이지스 쉴드가 잘 방어하고 있는 건가?”

패키지 시안, 메뉴얼 시안, 양산을 위한 예산 집행 등등.

여러 가지 결재서류에 사인하는 호킨스 사장은 일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올해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줄 물건은 누가 뭐라고 해도 키보드 워리어였다.

데드라인보다 한참 앞선 시간에 물건을 받았고, 분석을 해보라고 일렉트로닉아츠의 최고 괴짜이자 최고의 컴퓨터 엔지니어인 제임스에게 맡긴 게 일주일 전이다.

뭔가 보고를 해줘야 하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연구실로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마음은 엊그제부터 들었다. 이제는 참지 못할 지경이다.

쾅쾅쾅!

막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로 가보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쾅쾅 났다.

“제임스? 들어와!”

쾅쾅쾅은 제임스의 시그니처 사운드였다. 평소엔 얌전한 직원인데, 하나 꽂히는 게 있으면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온다. 전통적인 회사였다면, 진작 잘렸을 테지만, 여긴 자유분방한 실리콘밸리, 그것도 최신의 게임을 유통하거나 자체 제작하는 회사였다.

결과만 좋다면 뭐든 허용된다.

호킨스 사장의 말에 문이 벌컥 열리고, 펑퍼짐한 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밖을 빼입은 남자가 성큼 들어왔다.

수석 엔지니어 제임스였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덥수룩한 털이었다. 원래 제임스는 머리숱도 많은데, 턱수염도 많은 사내였다. 그런데 면도도 며칠 동안 안 했던 모양인지, 그것들이 마음껏 자라나면서 이목구비를 가려놓고 있는 거다.

땀과 체취가 섞인 시큼한 냄새도 확 풍겼다. 며칠 동안 세수도 않고, 샤워도 안 했던 모양이다.

호킨스 사장은 그런 걸 탓하지 않았다.

이게 다 열정의 흔적이지 않겠는가.

퇴근도 마다하고 회사 일에 열심히 집중했다는 증거였으니, 흡족하면 했지, 불쾌하게 여기진 않았다.

“파괴했나? 아니면 포기했나?”

호킨스 사장은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후욱후욱 숨을 들이쉰 제임스는 결국 푸욱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뚫지는 못했습니다.”

오우!

제임스의 대답에 호킨스 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최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임스의 전직은 해커였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공중전화를 해킹해서 멋대로 사용한 이력이 있을 정도였다.

공중전화와 연결된 교환기는 특별한 음역의 신호에 따라 작동을 하는데, 교환기가 반응하는 음역대 소리를 내는 휘슬을 만들어서 요금이 많이 부과되는 장거리 전화를 일반 요금, 더 나아가 공짜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고안한 능력자였다.

컴퓨터가 대중화된 후로 컴퓨터를 집중해서 파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특히 게임이나 프로그램에 걸린 락을 깨는 걸 낙으로 삼던 제임스였다.

그런 제임스가 일렉트로닉아츠에 들어오게 된 건 전적으로 호킨스 사장의 포용 덕이었다.

크랙으로 회사에 손해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걸 보고 경찰에 고소했다. 워낙 잡기 힘드니 기대는 없었는데, 불법복제 업자와 만나는 순간 딱 걸러버렸다.

제임스를 고소한 기업이 여러 곳이어서, 일렉트로닉아츠만 합의 한다고 감옥에 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대신 민사 소송 중 가장 덩치가 큰 곳은 일렉트로닉아츠였기에 그의 재능을 높이산 호킨스가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호킨스의 호의에 제임스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렉트로닉아츠에서 염가에 봉사하기로 했다.

더욱이 일렉트로닉아츠에 들어온 다음, 회사에 다니면서도 정식으로 대학의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서 제임스의 능력은 한층 더 올라갔다.

자랑할만한 미담이지만, 냉소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 제임스는 무일푼이라서 민사를 걸어 봤자 변호사비만 나가고, 받아낼 수 있는 돈은 땡전 한 푼도 없어서 노동력으로 대신 갚는 면도 있다.

물론 공짜로 일하는 건 아니고, 고급 엔지니어 대우를 확실히 해주고 있다.

하여튼, 컴퓨터에 관해 고급 능력자인 제임스가 일주일을 매달려 뚫지 못한다는 건, 밖에 있는 평범한 해커들은 3개월은 걸려도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어쩌면 ID 테크놀로지가 장담했던 것처럼 1년이 넘게 방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시면 반드시 뚫어내겠습니다!”

제임스는 이지스 쉴드를 깨지 못한 것 때문에 회사가 1만 달러를 손해 보게 생겼다고 울상이다. 게다가 자신을 믿어준 호킨스 사장의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한 것도 심적인 부담이 컸다.

“이 친구야! 자네 역할은 충분히 했어. 이지스 쉴드의 능력이 확실하다면 1만 달러 퍼주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반면 호킨스 사장은 만세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지스 쉴드는 호킨스 사장 입장에서는 꿈에 그리던 기술이었다.

불법 복제품만 쓰던 자들이 갑자기 정품을 사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진 않겠지만, 중간쯤있던 유저들을 압박해 매출 증대 효과로 이어질 것은 확실했다.

이날 일렉트로닉아츠는 한국의 ID 테크놀로지 계좌에 1만 달러를 입금했다. ID 테크놀로지 역시 입금을 확인하자마자 정품 양산을 위한 특수한 포맷 파일과 데이터를 인터넷으로 보내주었다.

덕분에 출시일도 즉각 확정할 수 있었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이브 전날로,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키보드 워리어 패키지를 한 번에 깔아 출시하는 와이드 방식을 쓰기로 했다.

후방 지원도 화끈했다.

미디어에 광고도 공격적으로 뿌렸다. 매주 전국 서점에 쫙 깔리는 게임 잡지사에 상세한 리뷰도 의뢰했다. 크리스마스를 딱 한 주 앞둔 시점에서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네트워크 플레이 기능도 강조해 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호킨스 사장은 키보드 워리어의 게임성과 교육성, 그리고 이지스 쉴드의 견고함에 회사의 사운을 걸었다. 임원 중엔 도박이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호킨스 사장이 보기에 이건 돈을 넣은 만큼, 몇 배로 튀어나오는 자판기였다.

이건 예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호킨스 사장의 확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건, 패키지 주문 물량이었다.

50만 장.

하프 밀리언!

확신을 바탕으로 호킨스 사장은 회사의 현실적인 여력을 고려해 숫자를 산출한 것이 50만 장이었다.

D-day를 향해 시간은 총알처럼 흘렀다.

호킨스 사장의 선택은 옳았다.

안타까운 점은 만점짜리 선택은 아니라는 거다. 점수를 주자면 80점 정도로 우수하다고는 해도 탁월하다고는 할 수없다.

만점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놈의 상식 때문이었다.

그때는 50만 장이 위험을 최대한 감수한 숫자라고 판단했다. 이게 호킨스 사장이 게임 사업을 하며 쌓인 최대 상식 선이었다.

50만 장을 다 팔면 미국 PC게임 역사에 신기원을 쓰는 것이니, 도전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런데 실제 시장에서 확인한 키보드 워리어 완전판의 파괴력이란 호킨스 사장의 상식을 무참히 파괴하는 수준이었다.

상식도 다 놓아버리고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면 일렉트로닉아츠 역사상 최대의 대박을 올릴 수 있었다.

88년 미국 크리스마스 시즌의 승자는 닌텐도도 아니었고 양배추 인형도 아닌, 키보드 워리어였기 때문이다.

레밍턴 스팅이 프리뷰 버전을 가지고 핵폭탄에 비유한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핵폭탄이라고 해도 급이 있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프리뷰버전이 리틀보이였다면, 완전판은 캐슬 브라보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분량이 딱 3킬로바이트가 부족해서 연참이 행진이 끊겼네요.

참고로 리틀보이의 위력은 16킬로톤, 캐슬 브라보의 위력은 16메가톤입니다. 그리고 핵폭탄의 끝판왕은 차르 봄버지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재원이가 차르 봄버를 소환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요. 앞으로 신기술과 자본을 축적해 차르 봄버를 소환할 재원이에게 꾸준한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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