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돈이 열리는 나무 ==============================
#31-1
선택의 기준은 실리다. 하지만 돈이 저기 있다고 바로 움직이진 않았다. 미팅날짜를 뒤로 잡아야 할 만큼 갑작스럽게 일이 쏟아져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란 쏟아지는 키보드 워리어 주문이었다.
어제는 미래정보통신으로부터 3천 장, 오늘은 대호 전자로부터 5천 장씩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재원은 전문가를 고용했기에 주문 물량 처리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바로 전 광고 가게 사장님, 현 ID테크놀로지 제1 협력사인 강찬호가 유재원을 대신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해야 했다.
주문 전화를 받고, 계약금 입금이 확인되면 생산 물량을 더 늘리는 것이다. 물론 실제 패키지를 만드는 실무 역시 그가 책임지고 진행해야 했다.
가게의 인쇄기는 쉬지 않고 돌았고, 인쇄기에서 나온 종이를 즉각 조립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자동화라는 개념조차 없는 시대였기에, 인쇄기에서 나온 출력물은 죄다 손으로 조립해야 했다.
일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그러니 사람을 고용해야 했는데, 직원으로 채용했다가 일감이 떨어지면 회사에 부담된다. 비정규직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되려면 몇 년은 남았기에, 직원의 고용은 무조건 정규직이었다.
물론 유재원은 비정규직 체제를 선호하지 않는다.
자신도 전생에 지겹게 당해 본 게 비정규직의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직원을 고용할 때는 회사에 일감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잘 가늠하려고 했다.
그런데 강찬호는 새로운 방법으로 가볍게 해결했다.
부업이었다.
종이접기 부업으로 집에 계시는 어머니들을 끌어모았다. 아직은 외벌이가 대세이던 시절이다. 어머니가 주부 판매사원을 하는 유재원의 집이 특이한 것이고, 대부분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놓으면 집안일, 혹은 농사일을 하시는데 지금은 농한기인지라 딱히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사용했던 번들용 봉투도 다 접어서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는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조립한 메뉴얼과 디스켓을 동봉해서 봉투에 집어넣고 봉인했는데, 인제 보니 이것도 부업으로 만든 것이었다.
ID 테크놀로지 덕분에 여주에 부업이 큰 유행이 되었다.
번들용 봉투는 하나에 30원, 부피가 크고 시간이 좀 걸리는 풀패키지는 50원,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걸리는 메뉴얼은 100원이다. 가장 간단한 등록번호 스티커 붙이기는 10원으로 책정했다.
번들 봉투 100개만 접어도 3천 원이나 받다.
88년도 물가를 고려한다면, 부업치고는 엄청난 고소득이었다. 게다가 물량은 만 단위였으니, 11월과 12월의 여주시 어머니들 쌈짓돈이 풍성해질 것이다. 동시에 ID 테크놀로지라는 이름도 널리 퍼질 거라고 기대했다.
물론 ID 테크놀로지가 무조건 퍼주는 건 아니었다. 주문 물량의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서, 어머니들의 욕심을 좀 자극한 측면도 있다.
ID 테크놀로지는 아침엔 어머니들께 재료를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회수하는 작업을 할 직원 둘 만 고용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강찬호는 인쇄와 포장의 전문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생산 작업에서 손을 놓을 수 있었던 유재원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미국의 유통사들, 그리고 수십, 어쩌면 수백만에 달하는 유저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키보드 워리어 풀버전 제작이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건 없었다.
4인 코옵 플레이를 TCP/IP를 이용한 네트워크 기능으로 구현하는 것도 유재원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은 그저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그래픽 리소스를 그리는 것뿐이다. 그래픽 전문가가 있으면 좋은데, 컴퓨터 생태계가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서 그런 인재가 존재할 일은 없다.
순전히 유재원 혼자 다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반복 작업을 하는 게 지루하다는 것 말고는 어려움은 없었다.
이처럼 회사에 일이 많아지자, 유재원은 학교에 나가는 게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수업을 빼먹진 않았다.
학교에 뭘 배우러 가는 것보다는 평생을 갈 우정을 쌓으러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민이, 수경이는 물론 고사리손으로 함께 가내수공업에 참여했던 아이들과도 두루 친해졌다. 이들이 나중에 커서 어떤 자리에 있을지는 천하의 유재원도 예상은 못 하지만, 삭막했던 전생의 인간관계에 비하면 확실히 지금이 좋았다.
게임 제작, 학교 다니기 말고도 유재원이 한 일은 또 있다.
자동차 구매다.
언제까지 현미유 사장님께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문도 쏟아지고, 납품할 곳도 많아졌다.
유재원도 미팅 약속이 많아졌고, 법무팀으로 들어온 최강욱 변호사 역시 출장 다닐 곳이 많은데 택시만 타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자동차 두 대를 샀다.
하나는 짐칸이 박스카 형태인 1톤짜리 화물차였고, 다른 하나는 승용차다.
둘 다 신차는 아니었다. 현미유 공장 소속으로 종종 유재원을 도와주었던 직원은 그야말로 자동차 전문가였다.
현미유 공장 짐차가 퍼지면 공업사를 가는 게 아니라, 부품을 사 와서 스스로 고칠 줄 아는 능력자였던 거다. 서울 중고차 매매단지로 가서 중고차 딜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 가장 상태가 좋은 차를 사 왔다.
짐차는 짐차 세계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포터였다. 그리고 승용차는 성공의 상징인 그랜저 3.0 V6였다.
특히 그랜저 3.0 V6는 믿지 못할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88년형 최신 모델이었고, 주행 거리도 1,000km 이하인 신차였는데 가격은 300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고 기록도 없었다.
그런데 딜러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극구 숨기는 게 아닌가. 딱 짐작이 되는 건 하나 있다.
-혹시 자살 사고 난 차인가요?
동행했던 형님이 물어보자 딜러는 한숨을 푹 쉬면서 실토했다.
부도로 인해 쫄딱 망한 회사 사장이 자동차 안에서 번개탄을 켜놓고 자살했고, 자동차는 채권자들에게 넘겨져 중고차 매매단지까지 오게 된 것이다.
차 안에서 번개탄 냄새나 다른 악취가 배이진 않았다. 그러니 사고에 대해선 입 싹 닫고 다른 중고차처럼 비싸게 팔았다면, 이런 의문이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차를 넘겨 밭은 채권자가 좀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중고차 딜러에게 그냥 팔아버린 게 아니라, 중개만 부탁한 것이다. 어차피 거래가 이루어질 때, 다 알게 될 테니 숨김없이 말하는 딜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자동차를 사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아니었다.
자신은 신과 거래해서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신을 잡귀 따위가 어찌할 수 없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동차를 잘 보는 형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란다.
자동차 상태만 보면 이것보다 나은 건 없다고 하며 추천해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품이었다.
‘이놈 입장에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거야. 생각해 봐라. 공장에서 갓 나와서 VIP 태우고 신나게 달리고 싶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재수 옴 붙은 첫 주인 만난 탓에 자살차라고 중고차 시장에 나와버렸잖아. 여기서 계속 안 팔리고 있다가 나중엔 고철값에 재처리장으로 넘겨졌겠지. 그런 상황에서 네가 거두어주었으니 목숨을 구하면 받은 거 아니겠어. 나라도 최대한 극진히 모실 거야.’
이 형님 사고방식이 독특하시다.
자동차 매니아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셨다. 중고차를 의인화를 해서 안심시켜주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현실은 형님의 말 대로 진행되진 않을 거다. 정 팔리지 않으면 자살 사고가 있던 차라는 걸 속이고 팔았거나, 해외 중고차 시장으로 넘겼을 확률이 높았다.
딜러가 옆에 있는 상태였으니, 유재원은 그런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딜러는 자살 사고도 숨김없이 말해준 양심적인 분이었다.
중고차 대금은 시원하게 현금으로 그 자리에서 완납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거래를 맡은 중고차 딜러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 바로 중개를 시작했다.
채권자를 모셔 와서 명의 변경을 도왔고, 법인 이름으로 자동차 등록하는 일이나 보험 가입 등의 절차를 빠르게 처리해줘서 그날 바로 여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포터는 중고차 딜러가, 그랜저는 운전 특기 형님이 운전했다. 유재원은 당연히 그랜저 조수석이 앉아서 내려왔다.
집까지 오는 중에 두 자동차 모두 문제가 없었다.
특히 그랜저는 주행감도 좋았고, 승차감도 80년대 자동차인 걸 생각하면 최상급이었다. 그랜저가 국산 고급 세단의 제왕이 된 이유를 한 번의 주행으로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랜저를 끌고 내오 마을에 입성하니 소문이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졌다.
동네 사람 반응도 화끈했다.
재원이가 사업을 시작했고, 텔레비전 광고에도 나오면서 잘 나간다는 건 아는 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그랜저를 타고 나타나자 보통 성공한 게 아니라는 걸 한 방에 인식한 것이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들이 부담감을 느낄까 물어보는 건 참고 계셨다. 그러다가 광고도 보고 신문 기사도 보면서 잘 되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랜저 한 대로 확실하게 성공했다는 걸 체감하셨다.
확실히 100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100번 보는 것보다, 한 번 체험하는 게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차를 두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큰집의 큰아버지가 사고가 나지 않고 안전 운전을 할 수 있도록 고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유재원은 기꺼이 차를 맡겼다. 포터는 몰라도 그랜저는 사연이 있는 차였으니 말이다. 혹시 몰라서 교회로 차를 몰고 가서 축복 기도까지 받았다.
물론 맨입으로 끝낸 건 아니다. 고사를 대신 지내준 큰집에 사례했고, 축복 기도를 해준 교회에는 적당한 감사 헌금을 했다.
여기에 부수적인 이득으로 유재원의 존재감은 큰집이나 외갓집에서도 크게 달라졌음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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