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돈이 열리는 나무 ==============================
#30-2
“너, 정말 대단하다.”
요 며칠 사이에 있던 이야기를 간략히 들은 최강욱 변호사가 진심 어린 감탄을 했다.
삼보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수천 장씩 팔아 재낀 것도 대단했다. 물론 그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최강욱도 인정할 만큼 좋았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타자기만 쓰던 최강욱 변호사는 크게 마음먹고 사무실에 XT 컴퓨터를 도입했다. 확실히 문서 작성의 효율이 타자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뛰어났다. 여기에 유재원이 측근이라고 먼저 챙겨준 타자 연습기로 자판 연습을 하니, 컴맹 수준이었던 최강욱도 컴퓨터에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또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어 미국에 출시했고, 그게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니 쉽게 놀랄 노자다.
영문으로 가득한 문서를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대체 미국에서 비즈니스는 어떻게 한 거냐? 미국이 일본처럼 옆에 있는 나라도 아니고, 태평양 너머에 있는 나라잖아.”
이어진 질문에 유재원은 인터넷과 레밍턴 스팅 탐정 사무소 등을 이용했고, 구독권 이벤트로 테스터를 대량으로 모집해 붐을 일으켰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이야. 이런 기발한 방법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통신 기술이 그만큼 발전했다니 순간 무서워지네.”
기술발전만 무서운 게 아니고, 유재원에 대해서도 소름이 돋는 최강욱이다.
보통 사람으로는 유재원과 같은 방식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건 미국에 지사를 만들고 차근차근 제품을 공급한다거나, 유통망이 갖춰진 바이어를 잡아서 제품을 공급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까 레밍턴 스팅이란 양반하고, 미국 현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통사들과 협상을 할 거란 말이지. 거기에 필요한 서류는 내가 다 챙겨야 하고?”
“네. 꼭 부탁합니다.”
유재원의 부탁에도 최강욱 변호사는 바로 확답이 나오지 않았다.
“좀 어렵겠는데.”
좀 시간이 나온 말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설마 거절인가?
“비록 사이즈는 작아도 이건 엄연히 국제적인 비즈니스잖나. 이런 쪽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거든. 게다가 모든 문서가 영어로 작성될 텐데, 생활영어라면 몰라도 비즈니스 영어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요? 그래도 저는 괜찮은데.”
“아니야. 진짜 실력 있는 분이 있어야 해. 차라리 한국에서 활동 중인 국제변호사를 알아보는 건 어떠냐?”
“혹시 잘 아는 분 있나요?”
“아, 알기야 알지. 그런데 그분 몸값은 나보다 훨씬 비쌀 거야.”
돈 문제라면 걱정 없다.
곧 삼보 컴퓨터에서 잔금이 입금될 것이고, 미국 유통사와 계약을 맺을 때 계약금도 받을 수 있다. 정부에서도 보따리를 풀어줄 테고, 다른 대기업들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테니, 유재원의 매출은 쭉쭉 늘어날 일만 남았다.
“괜찮아요.”
“그러냐? 알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소개해주마.”
“헤헤, 그러면 최강욱 변호사님과 소개해주실 국제 변호사님이 함께 ID 테크놀로지에서 일해주시는 건가요?”
“응? 나까지?”
“키보드 워리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제 머릿속에는 엄청난 아이디어가 들어 있거든요. 혁신으로 무장된 것들이라 풀리면 시장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더불어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문제도 많이 일어날 거고요. 그러니 법무를 담당할 분이 필요한데, 기왕이면 이미 친분이 있는 최 변호사님이 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입으로 자기 자랑하려니 부끄러워지는 유재원이지만, 꿋꿋하게 할 말은 다 했다.
“음. 당장 가부를 말해줘야 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지금 변호를 맡은 사건이 몇 건 있어서 당장 옮기기엔 문제도 있고, 집사람과도 이야기를 해봐야 할 거 같거든. 논의해 보고 말해주마.”
최강욱 변호사가 유재원에게 지금 확답을 하지 않았지만, 90%쯤 수락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ID테크놀로지와 함께 일을 하면서 변호사 일을 할 때보다 수입이 좋았다. 살림살이가 확 나아지는 게 보이는 데 아내가 거부할 우려는 지극히 미미했다.
이렇게 최신 근황을 이야기했던 둘은 곧 실무적인 부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미국 대리인들에 대해서는 조금 걱정이 있다.”
“뭔데요?”
“그들을 정말 진짜 신뢰할 수 있느냐는 거다. 무려 수천 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 아니냐. 그나마 통신이 발달해서 전화통화가 된다지만, 그 먼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혹시 그들이 유통사와의 협상에서 ID 테크놀로지의 이익을 줄이는 대신, 개인적인 이득을 보는 식으로 판을 짤 수도 있다.”
유재원은 최강욱의 우려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밍턴 할아버지, 아니 지금은 아저씨다. 하여튼 레밍턴 아저씨의 내력을 모르는 최강욱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였다.
“하지만 그 먼 곳과 비즈니스를 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하잖아요.”
“그래도 안전장치는 마련해야 한다.”
“방법이 있나요?”
“돈줄을 꽉 쥐는 것, 그리고 크로스 체크가 있다.”
최강욱 변호사의 방법은 간단했다.
유통사와 어떤 식으로 계약하든, 무조건 입금은 대한민국에 있는 ID 테크놀로지의 계좌로 받는 것이다. 입금 기록은 절대 조작이 불가능하고, 이 금액을 바탕으로 크로스 체크를 해서 미국 쪽 대리인들이 거짓 없이 보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신중히 해야겠지. 잘못하면 우리 대리인들의 협상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아픈 건 없다.”
“알겠어요. 확실히 그 방법이 좋겠네요.”
최강욱의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기도 했다.
원래 유재원은 미국에서 번 돈은 미국에서 계좌를 만들어 보관하려고 했다. 주식이나 선물과 같은 금융상품은 현재 미국보다 잘 발달한 나라가 없다. 그러니 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큰 투자를 하려고 했다. 금융 상품 말고도 유재원이 군침을 흘릴만한 기술을 가진 기업도 수도 없이 있다.
최강욱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았다.
미국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계좌를 만드는 건 올 겨울방학에 미국으로 직접 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최강욱 변호사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수출입은행이 좋겠다.”
해외 수익금을 받을 법인 계좌를 만들 은행을 두고 고민할 때, 최강욱 변호사가 수출입은행을 추천했다.
달러화는 물론 세계의 각종 외화를 그대로 송금받을 수 있고, 수출이나 수입 업무에 있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만든 만큼, 만약 돈을 빌릴 때는 시중 은행보다 저렴하게 빌릴 수 있다고 했다.
행동력이 빠른 유재원은 바로 최강욱 변호사를 대동하고 수출입은행으로 가서 법인 통장을 개설했다.
최강욱 변호사와 협의한 사항은 다음날 새벽 레밍턴 스팅에게 통보했다.
-음, 그러면 우리도 좋지.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 됐어! 잡다한 금융 업무까지 맡았으면 일에 치여 죽었을 거야.
레밍턴 스팅은 오히려 유재원의 정책을 반겼다.
이후 사업자등록증과 같은 회사의 존재를 서류를 팩스로 주고받으며, 레밍턴 스팅과 레밍턴이 추천한 엘런 슈미트를 정식으로 고용했고, 고용 계약서도 작성했다. 이번 일은 거의 모두 최강욱 변호사가 주도했고, 유재원은 결재 요청이 오면 돈만 보내주었다.
한국의 ID 테크놀로지도 식구가 늘었다.
최강욱 변호사가 정식으로 법무팀에 합류했고, 최강욱 변호사가 추천한 국제 변호사와도 1년짜리 계약을 맺었다.
국제변호사의 이름은 놀랍게도 유재원도 아는 사람이었다. 로버트 하일. 미국인이면서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한 그 양반이었다.
유재원의 기억엔 연예인 카테고리에 있던 양반이었는데, 88년도엔 변호사를 하고 있었다. 최강욱이 미국과 유럽에 리본 인터페이스 특허를 신청할 때, 서류 작성을 도와준 양반이 로버트 하일이었고, 그 인연이 유재원까지 이어졌다.
한국말도 잘 통하는 국제 변호사였고, 능력도 확실히 했다. 캘리포니아의 레밍턴 팀과 매끄러운 소통이 가능했던 것도 다 로버트 하일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여주의 광고 가게 강찬호 사장님도 합류했다.
일단은 제1 협력사 형태로 함께 일을 하기로 했고, ID 테크놀로지의 덩치가 커지면 광고 가게의 자산을 다 인수·합병하기로 계약서를 완성했다.
회사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이 주력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회사의 주요 인적구성이 법조계 출신으로 채워지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ID 테크놀로지는 사소한 잡음도 없이 깔끔하게 굴러갔다. 아니, 굴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매일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미국발 뉴스가 특파원들의 리포트를 타고 국내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유재원과 타자 연습기 프로그램 키보드 워리어가 집중 조명되었다.
원래 계획보다 며칠 미뤄졌던 삼보 컴퓨터의 광고와 기획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디어 폭격이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처럼 광고와 뉴스는 그대로 구매력으로 이어졌다.
삼보 컴퓨터 대리점에서 판매를 시작했던 패키지 판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아우성치는 소비자를 위해서 번들용을 선반에 놓고 팔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 번 시동이 걸린 ID 테크놀로지와 유재원은 거칠 게 없었다. 낚시의 신이 된 것처럼 미국이든, 한국이든 던지는 족족 대어들이 딸려 올라왔다.
가장 큰 대어는 미국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유재원을 대신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였던 레밍턴 팀이 드디어 한 건 했다.
미국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사인 일렉트로닉아츠가 키보드 워리어에 커다란 배팅을 함으로써 제1 협상자가 된 것이다.
다음 대어는 대기업이다. 일렉트로닉아츠보단 작지만, 국내에선 적수가 없어 오만하기 그지 없던 대기업 컴퓨터 업체도 키보드 워리어를 물었다.
이들은 나름 자체 제작한 타자 연습기로 어필을 해봤지만, 소비자에겐 턱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컴퓨터 업계에서 2등은 패배자나 다름이 없었다. 키보드 워리어는 부정할 수 없는 1등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키보드 워리어만 찾았다.
이러한 대기업들 사이에는 삼보 컴퓨터도 있었다. 하지만 사정은 다른 곳보단 나았다.
이용권 부사장이 이런 사태를 짐작하고 미리미리 예약했던지라, 가장 먼저 물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른 기업보다 급할 건 없었는데, 유재원과 만나고 싶다는 요청까지 했다.
물론 미팅 요청은 삼보 컴퓨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기업들도 유재원과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미팅 요청을 했다. 재미있는 건, 미팅 요청이 기업들에서만 온 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의 고위 인사도 유재원을 찾았다.
그의 직책은 무려 장관!
체신부 장관님과의 미팅 약속까지 잡혔다. 김원중 부장이 위에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유재원을 국민학생이 아닌 하나의 사업가로 보고 정중한 요청을 담은 공문을 보내 온 것이다.
대기업 소속 컴퓨터 회사들이 보낸 팩스 중에는 '유재원 국민학생'이라고 쓴 곳도 있었던 반면, 체신부에서 온 공문에는 'ID 테크놀로지 사장 유재원 귀하'라고 적혔있었다.
정부라고 하면 뭔가 딱딱하고 권위적이라는 느낌이었던 유재원에게 체신부 장관 만큼은 예외였다.
하여튼, 낚여 올라온 것들은 하나같이 굵직한 대어들이다. 살도 통통해서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들 정도였다.
특히 체신부 장관님과 미팅은 상식적이자 현실적으로도 제일 먼저 챙겨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유재원이 제일 먼저 잡은 스케줄은 삼보 컴퓨터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다른 건들은 일이 진행되어 입금되기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삼보 컴퓨터는 이미 돈을 입금했다.
유재원을 움직이는 데 이보다 확실하고 실리적인 건 없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연참 성공이네요.
모두 독자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