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3화 (33/1,007)
  • [33] 돈이 열리는 나무 ==============================

    #29

    “허, 무슨 놈의 팩스가 이리 많다냐?”

    여주의 광고 가게 사장님이 아침에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사무실 한편에 있던 팩스가 종이를 줄줄 토해내는 중이었다.

    광고 가게를 차리면서 구색을 갖춘다고 비싸게 샀던 팩스였다. 어제까지는 그저 장식이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가 팩스 번호로 와서 울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종이를 뽑아내 준 건 없다.

    그런 팩스가 지금 처음으로 일하고 있었다.

    “응? 죄다 영문이네?”

    신기해서 가보니 문서는 모두 다 영어로 되어 있었다. 광고 가게 사장님도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학력자였지만, 영어는 여전히 어려운 말이었다. 쉬운 문장이라면 좀 읽을 수 있겠는데, 이건 실전 비즈니스 영어라서 독해가 힘들었다.

    이런 문서를 받을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재원이한테 온 모양이지.”

    사장님은 팩스를 받을 사람을 힘들지 않게 짐작했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컴퓨서브의 다운로드 데이터는 물론이고 키보드 워리어와 관련된 기사와 분석 등 레밍턴이 정리해서 보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재원이는 광고 가게 개업 후 최고의 손님이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단가가 비싼 고급 포장 종이를 물 쓰듯 쓰고, 완전 천연색에 코팅까지 하는 패키지까지 주문했다. 심지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어제도 추가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스티커 인쇄지부터 골판지나 고급 포장지 등의 종이가 바닥나지 않게 미리 준비해 놓으시라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 말이라면 선수금부터 받을 텐데, 재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재원이가 올려준 매출로 10월을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다. 11월도 시작이 좋았다.

    “아이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재원이는 하교 후에 온다고 했으니, 준비할 게 많았다.

    일단 쏟아지는 팩스를 정리해 놓은 다음, 거의 바닥을 보이는 출력용지를 보충해 놓았다. 그리곤 창고로 가서 재원이가 친구들과 만든 패키지를 골판지 상자에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라면상자처럼 커다란 골판지 상자로, 번들용은 50개씩, 풀 패키지는 10개가 한 상자에 들어간다.

    보아하니 저렇게 낱개 포장 상태로 서울로 가져가려는 듯싶어서 따로 준비한 거다. 이건 서비스다. 원래 이런 서비스는 안 해주는 것인데, 재원이가 워낙 큰 손님이고, 나이도 어린데 기특한 일을 한다고 해서 준비했다.

    서비스하려며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포장 박스에 ID 테크놀로지라는 로고도 큼지막하게 박아 넣었다.

    마음은 칼라로 넣어주고 싶었지만, 단가가 높아서 검은색으로만 했다. 그래도 상자 바탕색이 누런색이다 보니 대비가 되어 보기엔 좋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충격에 민감한 디스켓이라고 해서 뽁뽁이 완충재도 아낌없이 깔 예정이다.

    서비스를 준비한 사장님의 바람은 딱 하나.

    재원이의 회사가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가게에서 포장지 주문을 계속해주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물론 유재원에겐 사장님의 바람을 들어 줄 능력은 차고도 넘쳤다.

    미국에서 핵폭탄이 터졌다니, 그 여파는 곧 한국까지 번질 거다. 장담했던 대로 대기업은 물론 정부에서도 주문이 쏟아질 테니, 미리미리 준비해놔야 한다.

    이와 더불어 광고 가게 사장님의 역할도 막중해질 예정이다.

    주문량이 만 단위가 넘어가면 아이들 일손만으론 부족해진다.

    방과 후, 서너시간 동안 운영되는 가내수공업의 생산성은 쥐어짜 봐야 하루에 1,500개를 넘진 못하는데, 수천, 수만 개의 주문량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결국 패키지 작업을 위해서 정식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포장지 인쇄와 조립 작업을 총괄할 사람으로 광고 가게 사장님 끌어들일 계획을 만든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서울을 다녀와서 할 생각인 유재원이었고, 광고 가게 사장님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레밍턴 스팅의 경우와 같이 함께 일하는 관계가 될 것이다.

    거절한다면 관리자를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하겠지만, 포장지 거래선을 바꿀 마음은 없는 유재원이다.

    그날 오후.

    유재원은 저번처럼 현미유 공장 사장님의 도움으로 운전 잘하는 직원 한 분과 용달차를 빌려서 서울로 가는 중이다.

    운이 좋게도 차를 빌리러 현미유 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장님과 사무실에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현미유 공장 사장님의 이름은 박상권이었고, 정확한 나이는 39세였다.

    아버지 말만 들어보면 회사엔 잘 나타나지도 않고, 각종 내기를 즐기는 타짜처럼 느껴졌던 분이었다. 그런데 정작 실체를 보니 눈빛이 매우 살아 있고, 의욕도 넘치는 젊은 사업가였다.

    여기에 날카로운 투자 감각도 인정할만 했다.

    올림픽 메달 맞추기 내기도 그렇고, 직접 대면해보지도 않고 ID 테크놀로지에 지분을 투자한 것도 특이했다.

    교장 선생님의 경우 유재원은 가까이서 보기라도 했는데, 박상권 사장은 그저 소문으로 들린 것만 믿고 큰돈을 쾌척했다.

    이게 참 대단한 것이, 유재원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외가에서 투자한 돈이 박상권 사장이 낸 돈보다 작았다.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라.

    유재원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을 해주신 박상권 사장은 아예 명함까지 따로 주면서 챙겨줬다. 명함에는 사무실은 물론, 집 전화번호, 카폰 전화번호까지 있었다.

    서울로 가는 길 박상권 사장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조금 전 만남을 복기하던 유재원은 아차 싶었다.

    “아참, 최강욱 변호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최강욱 변호사는 지금 미국과 유럽 등에 리본 인터페이스 특허를 따는 일을 맡아 진행 중이었다.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ID 테크놀로지에 영입할 인재였기에, 알아야 할 내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미유 사장님을 만나면 그 점을 물어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만난 것이라서 정작 중요한 건 못 물어봤다.

    급한 일은 아니었기에, 다음 번 만남을 기약했다.

    “잘 지냈니?”

    “예, 염려해주신 덕에 무탈했습니다. 납품용 패키지도 무사히 완성해서 가져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이용권 부사장이다.

    장소는 전에 보았던 삼보 컴퓨터 본사가 아닌 용산의 조립 공장이다. 교실 세 칸 크기의 커다란 창고를 컴퓨터 조립 라인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라인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컴퓨터를 만드는 공장답게 한쪽엔 트레이 상태로 층층히 쌓여 있는 보드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보드에 처음부터 CPU가 박혀 있는 구형이었다. CPU 중  반은 286이었고, 나머지는 XT였다. 386 보드는 아예 따로 떨어진 곳에 놔두었고, 그것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저걸 보니 한국은 언제쯤 고성능 컴퓨터가 대중화가 될지 걱정이다. 기존 역사대로라면 90년도쯤에나 386이 좀 풀리고, 93년은 되어야 486이 대중화될 텐데, 유재원에게는 너무도 먼 이야기였다.

    이용권 부사장은 견학을 온 학생에게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라인을 보여주었다. 맨손으로 이만큼 일궈냈으니, 자랑스러운 장소일 것이다. 실제로 가내수공업 수준의 유재원에 비하면 제대로 된 공장이기도 했다.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소프트웨어가 설치되었다. 백업이미지를 통해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통째로 카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디스켓을 넣어서 일일이 설치하는 방식이라 하나 설치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오늘 가져온 유재원의 타자연습기도 저런 방식으로 컴퓨터에 미리 설치될 모양이다. 물론 구매자가 주문한 컴퓨터에 하드디스크가 옵션으로 들어간 것에만 이런 식이고, 아예 하드디스크가 없는 건, 그냥 컴퓨터 상자 안에 동봉하면 끝이다.

    볼만 했던 설비는 이게 전부였다.

    매달 3천 대 정도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시설의 크기는 딱 이정도가 전부였다.

    “이건 너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조만간 최고 성능의 386 컴퓨터를 출시할 거란다. 너라면 공장도 가격에 맞춰주마.”

    공장을 다 보여준 이용권 부사장은 작은 비밀을 말해주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최고 사양이요? 386 DX 말인가요?”

    “그렇지. 그것도 작동속도가 40MHz나 되는 최고성능이란다.”

    “설마 AMD의 386인가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았니?”

    아이고, 안타깝다.

    어제 레밍턴이 보내준 팩스 중에는 AMD에 대한 기사도 있었다. MIT에서 컴퓨터 성능 측정을 했는데, 실제 성능이 작동 속도만큼 나오지 않아서 혹평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당연히 여기에 사용된 소프트웨어는 키보드 워리어였다.

    지금은 컴퓨터 성능을 측정하는 벤치마크 소프트웨어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연구실에서 주로 사용하는 거대한 수식을 돌려서 얼마나 빨라졌는지 보는 정도였다. 그것도 워크스테이션에서나 돌릴 수 있지, 개인용으로는 없었다.

    그 자리를 키보드 워리어가 차지했다.

    유재원은 그냥 사용자의 컴퓨터 스펙을 자동으로 검사해 최적의 설정을 해주기 위해 만든 것인데, 엉뚱하게 터져버렸다.

    당연히 며칠 지났다고 매출이 뚝 떨어지진 않겠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게 문제다. AMD 입장에서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이고, 사용자들의 인식에도 AMD는 꺼려지는 마음이 분명 생길 거다.

    이걸 삼보에서 사 왔다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유재원이다.

    “아, 저는 내년에 나올 486으로 한 번에 업그레이드하려고요.”

    안타까운 마음은 마음이지만, 업그레이드는 별개다. 286과 386의 성능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업그레이드 비용이 몇십만 원 수준이면 몰라도, 수백만 원을 들여 바꿔야 할 만큼은 아니다.

    “응? 486이 내년에 나온다는 말이냐?”

    “네, 인텔에서 신제품 소식이 종종 나오고 있잖아요.”

    “우리는 저번처럼 연기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헤헤, 뭐 제 생각이 그래요. 그때 가서 보면 되죠.”

    초기 출시되는 486 DX-33MHz 모델의 경우 처리 능력이 286-16MHz 모델보다 10배는 빨라진다. 32비트 아키텍처가 제대로 도입되면서 VGA의 능력도 한층 상승해서 고해상도의 SVGA까지도 널리 사용되면서 컴퓨터의 범용성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다.

    덕분에 하드웨어의 성능이 갑작스럽게 좋아졌는데, 도스용으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는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마소에서는 부랴부랴 윈도우 3.1을 내놨지만, 16비트용이었던 3.0을 기반으로 했기에 역시나 미진했다.

    유재원은 486이 나오고 나서 1년이 지난 시점을 소프트웨어 업계에 대대적인 혁명을 일으킬 D-day로 잡았다.

    “이게 납품할 제품이냐?”

    삼보컴퓨터 공장을 잘 둘러본 두 사람은 유재원이 타고 온 포터 트럭으로 갔다. 짐칸에는 ID 테크놀로지 마크가 선명한 라면박스 크기의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낱개로 그냥 쌓아두면 부피가 그다지 나가진 않았는데, 뽁뽁이에 싸서 상자에 넣으니 짐차 하나 분량이 되었다.

    광고 가게 아저씨의 고마운 서비스였다.

    상자뿐만이 아니라, 팩스를 잘 정리해 놓은 부분에서도 따듯한 마음이 느껴진다.

    “네!”

    이용권 부사장은 할 말을 잃었다.

    부사장이 한가한 직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있는 건 유재원에게 필요한 조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납품하는 제품의 퀄리티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사실 납품은 갑이 갑질을 제일 크게 행사할 수 있는 단계였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혹은 잘 팔릴 것 같아서 주문해 놓고 정작 납품받을 때 딴죽을 거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았다.

    자기들은 그걸 고객의 클레임을 미리 잡아내 이미지 실추를 막는 거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그건 꼬장과 갑질이었다.

    갑이 마음만 먹으면 온갖 트집을 다 잡는다.

    오죽했으면 갑쪽 검수를 맡은 직원이 대리라도, 을의 과장을 불러다 놓고 윽박지를 수 있었다.

    삼보 컴퓨터도 질리도록 당했다. 그래서 납품할 제품은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사소한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했다. 물론 그렇게 단단히 준비해도 클레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접대를 받고 싶은 거였다.

    이용권은 대기업과 거래를 하고 싶다는 유재원에게 납품의 어려움을 맛보기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오리지널 빨간 맛은 아니고, 순한 맛 수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유재원의 준비는 이번에도 이용권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ID 테크놀로지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상자부터 달랐다. 곧 검수 담당 직원이 와서 박스테이프를 뜯고 살펴봤을 때도 흠을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상자 안에는 뽁뽁이 완충재 포장되어 있었고, 번들용까지도 훌륭했다.

    개봉하려면 필수적으로 뜯어야 할 자리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스티커에는 개봉하는 것은 사용자 계약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문구까지 꼼꼼하게 붙어 있다.

    이 녀석은 얼굴마담이고, 진짜는 같은 업계에서 수년 일했던 숙련자가 뒤를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했다.

    혹시 몰라서 몇 개를 뽑아, 디스크는 깨진 게 없는지 프로그램은 잘 설치되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역시나 오류가 나는 건 단 한 장도 없다.

    검수 담당은 부사장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꼼꼼히 확인했다. 하지만 하자는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준비 잘했네. 앞으로 이대로만 해면 되겠어. 잔금도 3일 내로 이뤄질 거야.”

    이번에도 헛물을 켠 이용권이었지만, 맺고 끊는 건 확실한 사람이었다. 인수 확인서에 날인은 시원스럽게 날려 주었다. 4,400만 원 정도 되는 잔금도 최대한 빨리 입금해주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확실히 삼보는 좋은 거래처였다. 이렇게 빨리 잔금을 현금으로 입금해주는 회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공식 업무는 이것으로 끝이다.

    평범한 납품 업무였다면, 보통은 접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고 술을 먹거나, 더 진한 접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학생이란 최강의 쉴드를 보유한 유재원은 술상무를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이용권 역시 유재원에게 접대를 받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 아래에 있는 검수 직원들도 뭔가 삥을 뜯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로 내려가야 하니? 시간 남으면 잠깐 이야기나 할까?”

    “부사장님이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드려야죠.”

    덕분에 둘은 술집 대신 사무실로 올라가 차를 마시며 짧은 환담을 시작했다.

    앞으로 있을 키보드 워리어 한글판을 이용한 가정용 컴퓨터 광고 전략이라던가, 앞으로 유재원이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한 사소한 잡담이나 나누자고 만든 자리였다.

    대화하는 데 차가 빠질 수 없다. 소탈한 이용권은 본인이 직접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자기가 먹을 커피를 탔다.

    “뭐 마실래? 콜라고 있고 우유도 있는데?”

    자기는 커피였고, 유재원에겐 냉장고에 있는 음료를 챙겨 주려는 이용권이다.

    “저도 커피 주세요.”

    커피란 말에 냉장고로 가던 이용권이 뚝 멈췄다.

    “응? 벌써 커피를 마셔도 돼?”

    “그럼요. 프로그래밍할 때 마시면 참 좋잖아요. 프림은 빼고, 블랙으로 주세요.”

    "알았다."

    직접 원두를 내린 것만은 못해도, 편히 타 마신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맛있는 커피였다.

    “알다시피, 내일부터 광고를 시작할 거야. 뭐, 광고를 시작한다고 주문이 쏟아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유재원이 콘티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광고는 잘 뽑혀서 방영만 남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이에 맞춰 홍보성 기사도 쏟아질 거다. 유재원의 키보드 워리어를 위해 특별히 광고와 기사를 편성한 건 아니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선물 시즌 겸, 최대 대목이라 할 수 있는 신학기를 위해 준비한 홍보비 중 일부를 사용했다.

    이용권은 은근히 삼보 컴퓨터가 유재원을 위해 특별히 돈을 쓰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알 거 다 아는 유재원에겐 안 먹히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미국 공략을 잘 되고 있니?”

    드디어 본론이다.

    미국을 공략할 거라고 했던 자리에 이용권도 있었으니, 일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분명 궁금해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이걸 보시지요."

    유재원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내 줬다. 레밍턴이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준 그 기사들과 분석 자료들이었다.

    “응? 이건 뭐지?”

    한글은 단 한 글자도 없는 문서였지만, 명색이 부사장이고 고학력자이니 충분히 독해는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영어가 좀 미숙하다면 읽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이용권은 유재원이 부끄럽게 자기 자랑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영어 실력이 있었다.

    심지어 미국 현지 사정에도 능통했다. 그렇기에 딱 보자마자 큰 충격을 느꼈다.

    -PC게임 키보드 워리어. 교육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다.

    듣도 보도 못한 신문에 난 기사가 아니라 타임즈에 난 기사였던 탓이다. 기사의 크기는 작았다. 딱 한 단짜리 자투리 기사였다. 사이언스 섹션에 나온 것으로, PC 통신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잡다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이 무려 타임스라는 게 중요했다.

    무려 1785년 창간한 전통의 신문이었으니, 작은 기사라도 무게감이 달랐다.

    중요한 건 딸랑 타임스의 기사 하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유재원이 건넨 서류는 두툼했다. 바로 뒷장으로 넘겨보니 더 큰 충격이 찾아왔다. 정식 신문은 아니고 대학교 교내 신문에 난 기사 묶음이었다.

    그런데 그 대학교라는 곳이 MIT,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스탠퍼드 같은 미국 최상위권에 있는 일명 아이비리그 학교의 신문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게임이 학생들 사이에 뜨겁다 못해 과열될 지경이고, 키보드 워리어가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맞추기 위해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명색이 명문대 출신 유학파이니 아이비리그의 교내 신문이라고 무시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이용권이었다.

    여기에 컴퓨서브의 내려받기 데이터 보고서가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진짜냐?”

    너무도 믿기지 않아서 바보처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재원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네요.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반응이 확 일어났습니다.”

    혹시 기사를 일부러 지어낸 건 아닌가 싶은 이용권이다. 하지만 멋대로 만들었다고 하기에 기사의 서식 모양이나 데이터 시트는 완벽했다. 심지어 컴퓨서브에서 날아온 건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아니지, 좀이 아니라 엄청나게 달라지는 거다.

    미국의 언론이나 매스컴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한국이었으니, 키보드 워리어 소식도 곧 전해질 거다.

    "이런!"

    내일 나갈 기사를 다 써두었는데,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해서 마음이 급해지는 이용권이다. 당장 전화기 앞으로 가는데, 때마침 전화기도 따르릉 하는 벨 소리를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쓰려던 이용권은 밖의 비서가 받기 전에 자신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제가 이용권입니다. 예? 맞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온다면 대부분 본사였으니, 임원이나 형님일 줄 알았던 이용권은 예상도 못 했던 상대편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상대의 용무도 예상 밖이었다.

    그건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받던 이용권이 갑자기 수화기를 자신에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체신부 김원중 부장님이다. 받아봐라.”

    김원중?

    설마 컴퓨터 경진대회에서 자신에게 장관상을 내려준 그 부장님?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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