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2화 (32/1,007)

[32] 돈이 열리는 나무 ==============================

#28-2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엄청나다고!

“그래요? 반응이 좋다니 다행이네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재원은 자신이 미국에 던진 키보드 워리어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했다. 단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레밍턴 스팅의 높은 목소리가 듣기에 좋았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은 컴퓨서브 게시판에 직접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그저 간접적으로 컴퓨서브 FTP에 올려진 키보드 워리어의 다운로드 숫자를 확인해 보는 게 전부다.

숫자는 확실히 대폭 상승해 있었지만, 미국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게다가 FTP에 있는 건 숫자는 테스터들이 다운로도 받도록 지정한 게 아니었다. 컴퓨서브 PC 통신 게시판에서 순위권을 하는 게 목표였기에, 레밍턴의 아이디를 빌려 올려 놓았고, 그걸 받도록 했다.

-이미 목표 달성했다. 다운로드 숫자가 벌써 1만이 넘었어.

“그렇게나 빨리요?”

유재원에게는 주관적인 표현보다 객관적인 수치 하나가 전달력이 더 좋았다.

1만이라는 숫자에 미국의 상황을 약간 실감할 수 있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1만이란 숫자는 보통 프로그램이 찍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리얼 플레이어, 윈앰프, 데이터 맨 등등 한 시대를 풍미한 소프트웨어만이 찍을 수 있는 숫자였다.

"지금 미국의 게임 업계가 우리 프로그램으로 난리가 났다는 거죠?"

-무슨 한가한 소리 하고 있어? 난리 정도가 아니라니까!

오늘 레밍턴과의 통화는 테스터들이 리뷰를 잘 올리고 있나 좀 물으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소프트웨어 게시판 1등이라면, 게임은 끝이었다. 당장 미국 본토를 장악했다고 기사를 띄워도 된다. 그런데 이게 빨라도 너무 빠른 것이다.

미국에선 저만치 나가는데, 한국은 아직이었다. 본격적인 마케팅은 이제 시작인 거다.

그나마 몇 주 뒤에 있는 건 아니고, 삼보컴퓨터에 내일 제품이 납품 완료하면, 삼보 컴퓨터는 언론사와 텔레비전 방송사에 기사와 광고를 시작하는 스케줄이었다.

장관상을 받은 유재원이 삼보 컴퓨터와의 협업으로 더욱 완성도를 높여 제대로 된 타자 연습기를 출시했다는 식의 기사와 광고였다. 이에 맞춰 유재원도 텔레비전 광고 하나를 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바람을 일으킨 후에 세운상가와 용산에도 출시 준비를 마친 후, 미국 1등을 찍었다는 후속 광고를 내서 총판이나 대기업들이 알아서 찾아 오게 할 작정이었다.

-지금 컴퓨서브 따위가 문제가 아닐세. 키보드 워리어로 미국 컴퓨터 업계 전체가 뒤집히고 있다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유재원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중이란다.

무슨 말인고 하니, MIT의 괴짜들이 키보드 워리어에 탑재된 성능 측정 프로그램으로 학교 컴퓨터실은 물론 자신들의 연구실에 있는 모든 종류의 컴퓨터에서 돌려 점수를 추출했고, 그것을 표로 정리해서 학교 게시판에 올렸다는 거다.

최고 사양인 386 DX부터 최소 사양인 286 AT-12MHz짜리까지. 심지어 인텔은 물론 AMD, 사이릭스 등등의 호환 CPU 종류별로 점수를 정리한 것은 물론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괴짜들은 비디오 카드의 종류별로, 메모리 칩의 종류별로 점수를 다 정리했다.

‘이거 게임 나올 때마다 찾아봤던 벤치마크잖아?’

순간 유재원은 레밍턴 스팅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방에 이해했다.

보통 A급 게임이 나오면 온갖 시스템으로 프레임이 잘 나오는지 확인한다. 현대에는 아주 분야가 세분되어서 CPU나 GPU는 물론 메모리 속도나 용량까지 다양한 부품을 평가했다.

평균적인 시스템에서 프레임이 잘 나오면 게임 최적화가 잘 되었다고 했고, 웬만한 시스템에선 잘 돌아가지 않으면 혹평이 이어진다. 대신 시대를 앞선 비쥬얼 쇼크를 선사한다면, 게임을 정복할 시스템이 나올 때까지 목 빠지게 기다린다.

키보드 워리어가 바로 그 반열에 올랐다. 삽시간에 벤치마크 프로그램의 중심에 설 만큼 인기와 대중성을 얻은 것이다.

최적화에 대한 평가도 높았다.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하드웨어 사양이 386으로 높긴 한데, 그 수준만 잘 갖추면 빠른 속도감을 즐길 수 있다는 걸 다들 이해했다.

그런데 IBM 호환 PC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수많은 부품 공급사들이 있다는 거다. VGA 카드만 해도 제조사가 8개가 넘을 정도였다.

당연히 제조사마다 성능이 제각기 달랐다.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시스템은 영광의 홀에 올려주고, 이미지가 좋은 브랜드라고 괜히 다른 제품보다 비싼 가격을 유지하던 부품이 정작 점수가 나오지 않자 혹평이 쏟아졌다고 했다.

CPU에서 가장 높은 점수가 나온 건 인텔의 386 DX-33으로, 더욱 상위등급인 AMD 386 DX-40보다 10%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주파수 속도는 AMD가 20% 높았지만, 실제 게임 성능은 인텔이 훨씬 나은 것이다.

VGA 카드에서는 사이러스 로직 칩을 쓴 것이 제일 좋았다. 반면 ATI가 만든 비디오카드는 제일 비쌌으면서 성능은 다른 제품보다 -10% 정도 덜 나왔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개발자인 유재원의 컴퓨터가 인텔 286 AT 칩이 장착된 컴퓨터였고, 최근 구매했던 비디오 카드는 사이러스 로직 제품인지라, 최적화를 하면서 해당 하드웨어에 좀 더 힘을 받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키보드 워리어가 핵폭탄급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그 미미한 요소까지도 거대한 폭풍이 되었다.

MIT 괴짜들이 만든 부품 등급표는 곧장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고, 그것은 곧 소비자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시장에서 줄곧 1위를 달리던 ATI를 사이러스 로직이 매섭게 따라붙었다. VGA 카드뿐만이 아니라 키보드 워리어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CPU와 램 같은 주요 부품들의 매출은 전반적인 상승을, 나쁜 점수가 나온 것들은 매출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해당 하드웨어들은 저마다 세일즈포인트가 다 달랐다. ATI의 경우 화사한 색감을 자랑했고, S3는 괜찮은 성능에 화질, 적당한 가격으로 인기였다. 저가형의 경우엔 쳉랩(Tseng Labs)이란 회사 제품이 싹쓸이 중이다.

제조사마다 개성적인 강점으로 승부를 해왔던 시장에서 이제는 절대적인 성능 지표로 삼을 만한 킬러 타이틀이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핵폭탄이 재래식 전쟁의 룰을 바꾸었듯, 키보드 워리어 특유의 부드러운 화면을 잘 유지 시켜주는 것이 VGA나 CPU의 중요한 성능 지표가 되었다. 소프트웨어 하나가 하드웨어 시장의 판도까지 흔들기 시작한 거다.

이 정도 됐으면 의뢰는 성공이다.

키보드 워리어가 유저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이를 알릴 방법을 마련한 레밍턴 스팅의 공도 컸다.

미리 받은 3천 달러는 되돌려줄 필요도 없고, 따로 약속한 500달러의 보너스도 편안한 마음으로 청구해도 기쁜 마음으로 그보다 더 얹어 줄 마음마저 생겼다.

-이제까지 무슨 소릴 들은 거야? 지금 보너스 같은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래도!

돈 준다는 데 큰 소리라니.

하여간 레밍턴 할아버지와 너무도 다른 성격이다. 폭삭 망한 다음에야 종교에 귀의하면 할아버지 때의 성격 좀 나오려나?

그렇지만 레밍턴 스팅의 상황도 이해해 줘야 한다.

999개까지 저장되는 컴퓨서브 메일함은 이미 가득 찼다. 혼자 다 읽을 수 없어서 주급 한 주 밀렸다고 나가버렸던 비서겸 조수도 다시 불러야 했다.

다행히 비서가 다시 나왔지만 아직도 일손이 부족했다. 메일함뿐만이 아니라 레밍턴 스팅 탐정 사무소의 전화기도 불이 나고 있었던 탓이다.

-미국의 난다고 긴다고 하는 대형 유통사에서 내 사무실로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자기들이 키보드 워리어의 유통을 맡고 싶다고 말이야.

과장이 절대 아니다.

당장 레밍턴이 어디 한 곳에 OK만 한다면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쳐들어올 기세였다.

닥치고 내 돈 받고 계약서나 쓰자는 회사들도 여럿이었다.

-일렉트로닉아츠, 액티비전, 바이트빅스라는 이름은 들어나 보긴 했지? 전미에 유통채널이 있는 회사가 우리 사무실 앞으로 쳐들어올 기세란 말이다. 아,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도 있더라.

유재원은 레밍턴이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컴퓨서브 게시판 정도 점령하려던 것이, 어쩌다 보니 진짜 미국을 점령하게 생겼다.

동시에 이쯤 되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판단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재원은 당장 미국으로 가서 노를 저을 수는 없다. 궁리를 해보니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 좀 더 크고 제대로 된 비즈니스 해볼래요?”

-응? 무슨 소리냐?

“혹시 평판도 좋고 능력도 좋은 변호사 주변에 알고 계시죠?”

탐정은 법과 매우 가까운 직업이니 좋은 변호사들과도 친할 거라는 유재원의 계산이다. 그리고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듯, 좋은 사람 곁엔 좋은 사람이 있을 거다.

-당연히 있지. 왜 그러냐?

들려온 대답에 유재원은 속으로 그렇지 외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ID 테크놀로지의 미국 대리인으로 아저씨, 그리고 레밍턴 아저씨가 소개해줄 변호사님을 임명하겠습니다. ID 테크놀로지를 대리하셔서 유통사들과 미팅을 하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이익을 끌어내 계약서를 만들어 주세요. 다만 협상에 대한 전권은 드리지만, 계약 확정은 ID 테크놀로지가 결정합니다. 그러니 도장만 찍으면 되는 계약서를 뽑아 팩스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흐음? 의뢰가 아니라 대리를 맡으란 말이냐?

탐정 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일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이력이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키보드 워리어는 대박 아이템이었고, 이걸 만들어낸 ID 테크놀로지에 대한 개인적 관심도 컸다.

반면 몇 가지 이유로 대뜸 하겠다고 말하기가 좀 그랬다.

일단 출퇴근이 자유로웠고, 본인 위에 상사도 없었던 탐정이란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과 친구 변호사의 몸값으로 ID 테크놀로지가 어느 정도 책정할지 모른다.

“기본급으로 업계 평균 임금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 인센티브로 ID 테크놀로지가 키보드 워리어로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10%를 약속합니다. 10%를 두 분이 어떤 비율로 나눌지는 알아서 하시고,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도록 협상해주세요.”

이어서 들려온 유재원의 말에 레밍턴 스팅은 콜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조건 콜이다.

탐정일로 받는 의뢰비는 많이 받아봐야 천 달러 단위였다. 그런데 수익률로 가면 단위가 달라진다. 간단히 계산해 봐도 최소 만 단위 이상이다.

그렇게 단위가 달라지면 인생도 달라지는 법이다.

-좋네. 그런데 인센티브 비율은 ID 테크놀로지가 정해주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돈이 엮이면 좋아질 수가 없으니 말이야.

잔뜩 흥분한 레밍턴 스팅이었지만, 노련한 경험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실수를 먼저 지적해 주었다.

유재원은 아치 싶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했다가 전생에서처럼 또 실수할 뻔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계약이 맺어진 후 두 분의 성과를 평가해서 정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제 ID 테크노로지를 대리하는 것이니 정식 계약서가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그러면 이쪽으로 올 건가?

“그건 좀 불가능해요. 저번에 말했던 거 잊었나요? 저 외국인이거든요. 여기는 한국이에요.”

-응? 한국? 이번에 올림픽을 했던 바로 그 나라 맞나? 일본 옆에 있는 조그만 나라?

뒤에 일본 옆에 어쩌고 하는 말은 빠졌으면 좋겠지만, 아직 한국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 올림픽 아니었으면, 북한과 구별하지도 못했을 거다.

“네, 그러니 서류 작업은 팩스로 진행해야 할 거예요. 변호사 친구분께 잘 말해서 차질없이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 그리고 컴퓨서브에 연락해서 키보드 워리어 순위표와 다운로드 데이터를 뽑아 달라고 해서, 그것도 보내주세요. 여기서 비즈니스 자료로 써야 하니까요. 아, 신뢰도 높은 매스컴에서 낸 기사나 비즈니스에 사용하기 좋은 자료가 있으면 더 좋고요.”

-아? 그건 내 전문이지.

유재원은 본래의 목표를 잃지 않았다.

키보드 워리어 미국판의 목적은 한국의 대기업과 정부를 움직일 지렛대였다.

미국에서 뉴스가 되어 한국에 상륙하는 게 제일 좋지만, 미리 준비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일 엄청난 숫자로 가득한 컴퓨서브의 데이터를 보면, 믿음이 부족한 삼보 컴퓨터 관계자들의 마음이 단번에 바뀔 거다.

그러면 키보드 워리어에 대한 마케팅도 훨씬 적극적으로 나서 주겠지.

이런 게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경지 아니겠는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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