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돈이 열리는 나무 ==============================
#28-1
존은 게임 개발자다.
그렇지만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기엔 부끄럽다.
소프트디스크라는 컴퓨터 잡지를 만드는 회사 소속인 탓이다. 엄격하게 따지면 출판업 회사인데 게임을 부록으로 제공하는 정책을 쓴다. 게다가 그 게임은 유통사에서 사 오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든다.
존은 바로 소프트디스크에서 별책부록용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탓에 만드는 게임도 한 달 뚝딱거리면 만들 수 있는, 독자성은 거의 없는 카피캣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 대한 자신감은 충만했다.
고등학생 시절 혼자 만든 게임을 소매점에서 팔기도 했을 정도로 컴퓨터에 익숙했던 그였다.
프로그래밍 실력이 날로 발전해서 뭐든 다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충만했다. 게다가 허름한 직장이지만 마음에 맞는 직장 동료도 많아서 출근하는 게 싫지 않았다.
다만 직장에 대해 아쉬운 건 딱 세 가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못 만든다는 점, 카피캣만 시킨다는 것, 급여가 수준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었다.
월세, 기름값, 식비 등의 생활비에다가 컴퓨터 부품 한 개 사면 순식간에 바닥이다. 절대 사고 싶었던 컴퓨터 부품이 좀 비싼 것이라면 생활비를 좀 줄여야 했을 정도다.
그래서 컴퓨서브 잡담 게시판의 새 글 ‘키보드 워리어의 테스터를 구합니다.’라는 글을 읽었을 때, 존은 이거다 싶었다.
게시글의 내용은 보니 타자 연습과 게임을 융합한 교육용 프로그램을 출시했고, 사용자의 평을 들어보고 싶다는 거다.
그런데 무료로 해달라는 게 아니라 테스터 참여자에게 컴퓨서브 1개월 구독권을 준다고 했다. 그것도 인터넷처럼 비싼 유료 서비스까지 다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구독권이다.
PC 통신 사용료가 부담스러운 존에게 안성맞춤인 의뢰였다. 요구 사항도 그다지 깐깐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받아서 3일 동안 사용 후에, 10줄 이상의 리뷰를 컴퓨서브 게시판에 올리는 게 전부다.
리뷰를 다른 사람이 올린 글을 표절해서는 안 되고, 성의 있게 작성해야 하며, 리뷰를 올린 시간은 의뢰자가 지정한 시간에 올려야 한다는 게 특이했지만, 다 할 수 있었다.
참여 조건은 컴퓨터 스펙이었지만, 이건 쉽게 넘었다.
급여를 받으면 필수 생활비를 빼곤 컴퓨터 업그레이드에 투자했던 존이었다. 스펙에서 잘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의 컴퓨터 스펙과 프로그래머라는 경력 등을 담아서 메일을 날렸다. 그러자 테스터 모집 글을 올린 레밍턴이라는 ID로부터도 답장이 30분 만에 바로 왔다.
“좋았어!”
테스터에 선정되었고, 리뷰는 11월 4일 오후 6시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독권은 리뷰를 확인한 후, 메일로 코드를 보내준다고 했다.
이제 그 키보드 워리어만 해보면 된다. 바로 컴퓨서브 자료실로 이동한 존은 교육 소프트웨어 항목으로 찾아 들어갔다.
“여깄군.”
이미 많은 테스터들이 모집이 되었던 모양인지 일일이 찾을 것도 없이 다운로드 상위권에 걸려 있었다.
곧장 다운로드를 시작했다.
다운로드 진행률을 보여주는 막대 그래프가 쭉쭉 올라간다. 최근 장만한 9600 bps 모뎀이 능력을 오늘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무려 2D 디스켓 두 장 분량이지만 9분 만에 내려받기를 마쳤고, 압축해제 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ID 테크놀로지라는 로고 화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키보드 워리어라는 타이틀 화면이 나타났다.
“호오, 센스가 있어.”
교육용이라고 해서 얕잡아 봤던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미디 모듈을 통해 나오는 고품질의 배경음악과 웅장한 사운드가 훌륭했다. 특히 압권은 키보드 워리어라는 감각적인 폰트와 멋진 전신 슈트를 입고, 전투기 조종사가 착용하는 헬멧까지 쓴 주인공의 모습이다.
딱 허리 위 상반신만 그려서 더욱 돋보였고, 주변으로는 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들고 있는 건 키보드였으니 웃음이 나왔다. 샷건 같은 걸 들고 있으면 딱 맞는데, 타이핑 연습용 프로그램이라 키보드인 모양이다.
“흐음? 보면 볼수록 놀라겠네.”
다른 사람이면 그냥 엔터를 치고 넘어갔을 타이틀 화면에 존은 5분이나 머물면서 꼼꼼하게 살폈다.
특이할 건 없다. 빠지는 게 있으면 집중하는 게 평소 존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렇게 느긋하게 바라본 전신 슈트는 감탄을 자아냈다.
기존에 슈트를 입은 캐릭터들은 많이 있다. 로보캅, 아이언맨 등등. 그런데 기존의 캐릭터와는 차별된 디자인에 시대를 앞선 세련됨까지 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디자인이다. 이미 나온 것들을 적당히 카피한 게 절대 아니다.
“저런 캐릭터를 겨우 교육용 게임에 쓰기엔 아까운데?”
순간 좋은 생각이 난 존이다.
이런 캐릭터에게 샷건이나 로켓포 같은 현대적인 무기를 주고 악마를 때려잡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시작 버튼을 눌러 튜토리얼에 들어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본격적인 좀비 크러쉬 게임에 들어가는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세상에! 이거 도대체 뭐지?”
키보드 워리어의 본질은 타이핑 연습이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최신의 게임이었고, 너무도 훌륭하게 융합되었다.
존은 튜토리얼부터 정신없이 했다. 자리 연습부터 시작해서 단어, 단문 연습, 심지어 장문 연습까지도 게임과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다.
압권은 보스전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보스의 모습이라거나, 온갖 저주가 섞인 단어를 던져 공격하는 것, 하수인을 소환하는 것이나, 전체 마법을 쓰는 등등.
VGA의 성능을 완벽하게 뽑아내어 만들어진 화면은 이제까지 나온 게임들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의 비쥬얼 쇼크를 자랑했다.
게임성은 이미 검증이 끝났다. 그렇다고 교육 기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컴퓨터가 어색한 아이들을 컴퓨터 앞에 머물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타이핑 속도를 향상하게 시키는 것도 완벽했다.
명색이 프로그래머인 존은 타이핑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런 존도 게임 후 타이핑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면,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심지어 게임의 배경설정까지도 완벽했다.
장문 연습을 넘어 초장문 연습이라고 들어 있는 건, 한 편의 단편 소설이었다. SF적 상상력을 극대화했고, 문장력도 훌륭했다. 게임에 넣을 게 아니라 출판을 했으면 분명 대박이 날 만큼 끝내주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존을 경악하게 만든 건 따로 있다. 보스전을 마무리하고 올라오는 문구였다.
“영문 키보드 워리어 프리뷰 버전을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나올 완전판을 기대해주세요라니.”
저 문장 하나 때문에 존은 이제껏 회사에서 뭘 만들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나름 자신 있는 프로그래밍 실력도 키보드 워리어 앞에서 산산이 조각났다.
화면 전체가 움직이는 매끄러운 스크롤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빙판처럼 매끄러운 스크롤을 유지하면서 화면 가득 좀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타이핑을 해서 이놈들을 터트릴 때의 타격감도 훌륭했다.
음악은 또 어떤가.
웬만한 락 음악 앨범을 다 가지고 있는 존이지만, 키보드 워리어의 보스전 음악은 명반 반열에 오른 곡들과도 비교해야 할 정도다.
“진짜 이게 프리뷰 버전이란 말이야?”
이대로 매장에 내놔도 대박이다.
풀패키지 게임처럼 4, 50달러는 받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정식판이 아니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정식판에 수록될 기능을 설명한 글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거다.
더 많은 스테이지, 더 다양한 보스전, 네트워크를 이용한 4인 협동 플레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보스 러쉬 모드 등등.
무슨 한 팩에 100달러짜리 게임을 만들려나 보다. 진짜 저대로 나온다면 자신이라도 100달러를 주고서라도 살 것 같다.
동시에 존은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졌다.
당장 디버깅과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해 빙판을 미끄러지는 듯한 화면을 만드는 기술이나, 수도 없이 쏟아지는 오브젝트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연구하고 싶었다.
소스코드 없이 그걸 살피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존이라면 불가능은 아니다.
“일단 리뷰부터 써놓자.”
일을 시작하기 전, 존은 자신이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리뷰를 쓰는 것이다. 정식판이 어떤 방식으로 유통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컴퓨서브에는 가장 먼저 출시 소식이 나올 테니, 구독권을 따놓는 게 먼저였다.
그러다가 제목을 놓고 잠깐 고민했다. 무슨 글을 지어야 자신이 받은 인상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게 좋겠군.”
마음에 드는 문구를 결정한 존은 빠른 속도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키보드 워리어. 3D를 모두 갖춘 충격적 게임!
3D는 3차원이란 의미였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죽이는 게임성, 죽이는 사운드, 죽이는 퍼포먼스, 그래서 3D라는 것이다.
보통 미국에서는 끝내주는 걸 크레이지라고 하는데, 이보다 한층 강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존이 멋대로 만든 문구였다.
키보드 워리어에 받은 감명이 얼마나 컸으면, 최소 10줄이라고 했던 리뷰의 길이는 무려 10페이지 이상의 분량이었다.
튜토리얼부터 보스전까지의 이야기부터, 프리뷰 버전임에도 버그 하나 없는 코딩까지 모두 칭찬으로만 가득한 리뷰였다.
나름 컴퓨서브의 네임드 유저였던 존의 리뷰는 순식간에 조회수가 폭발했다. 게다가 존과 같이 키보드 워리어에 강렬한 충격을 받는 건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테스터가 된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강렬한 인상을 여기저기 퍼트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동시에 키보드 워리어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MIT, 스탠퍼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등등 대학이 운영하는 인터넷 서버에도 올라갔고, 사설 BBS은 물론 거대한 소프트웨어 유통사에도 이어졌다.
“음? 3D라.”
약속한 리뷰를 올리며 홀가분해진 존은 번뜩하는 아이디어 하나가 생겨났다.
말장난으로 만든 3D라는 단어였지만, 실제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법 싶었다.
당장 키보드 워리어만 해도 살짝 입체적인 느낌이 나긴 했다. 좀비 크러시 모드는 화면 정면을 향해 나아가는 형태였다. 플레이 캐릭터는 자판을 칠 때마다 자동으로 움직이긴 해도 무척이나 부드럽게 움직였다. 타이핑을 빠르게 할수록 케릭터의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속도감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수직으로 벽을 세워 공간감만 주면 바로 3D 효과가 나은 것 아니겠는가.
플레이 케릭터도 키보드 워리어의 전신 슈트에 멋진 헬멧을 착용한 모습이라면 딱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키보드 대신 샷건을 들고, 무자비하게 악마를 썰어내는 3D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날 출근한 존은 곧바로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끝내주는데?”
절친한 동료 로멜로가 바로 맞장구를 쳐줬다.
“악마가 아니라 나치를 때려잡는 것도 좋겠어!”
아드리안과 케빈도 동의하며 의견을 추가했다. 동료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존도 한층 힘을 얻었다. 덕분에 마음에 오래 품어두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면, 잡지사 별책부록 게임 말고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어 볼까. 저번에 밀러 씨가 우리가 나서면 전적으로 도와준다고 했으니 말이야.”
순식간에 의기 투합된 존과 동료들은 소프트디스크 퇴사와 게임 개발사 창업을 결정했다.
“그런데 회사를 차리려면 그럴듯한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나름 신중한 케빈의 지적이었다. 이에 존은 이미 그것도 다 생각해 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ID 소프트웨어!”
“아이디 소프트웨어? 이 자식, 키보드 워리어에 단단히 감명을 받았구먼. 아이디 테크놀로지에서 따라 한 티가 너무 나는데?”
“아이디가 아니라 이드거든.”
“아이디든 이드든 그게 그거지. 하여튼 난 찬성.”
유재원이 날린 핵폭탄에 수많은 후폭풍이 일어났다.
ID 소프트웨어의 이른 등장은 그중에서도 제법 크다고 할 수 있는 후폭풍이었다.
========== 작품 후기 ==========
타짜는 다른 타짜를 알아 보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