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8화 (28/1,007)

[28] 돈이 열리는 나무 ==============================

#25

“아참, 시차가 있지.”

쪽지로 옮겨쓴 전화번호를 들고 전화기 앞으로 가던 유재원이 걸음을 멈췄다.

전화를 걸어야 하는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한국과의 시차는 –16시간이니 지금 걸면 거긴 한창 늦은 밤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전화를 거는 게 딱 좋았다.

이대로 하루를 끝내는 건 뭔가 아쉬워서 다시금 컴퓨서브 FTP에 접속해 키보드 워리어의 현황을 살폈다.

“오! 벌써 10건이 넘었네?”

자신이 잘 올라갔는지 확인하려고 받은 것을 제외하고도 내려받기 숫자는 17건에 달했다. 아직 올라간 지 1시간도 되지 않았음에도 제법 받아 본 사람이 있다.

교육과 액션 게임의 융합, 게다가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좀비까지 첨가했으니 제목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출발이 좋았다. 대신 인터넷 사용료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PC 통신 사용자라면 한 번은 겪은 통화료 폭탄은 아직 먼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 통화당 요금을 받는 시스템이라서 중간에 끊어지지만 않으면 고정이다. 요금체계가 시간당 요금으로 바뀌는 건 89년인가 90년쯤으로 알고 있다. 그 전까진 01410을 마음 놓고 접속해 있어도 문제 없다.

문제는 케텔의 인터넷 요금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였다. 인터넷의 선구자 전길남 박사님이 서울대와 구미 전자기술연구소를 연결하면서 실용화가 되었다. 먼 거리의 인터넷을 연결할 때 중계기로 사용하는 라우터를 미국에서 판매하지 않았음에도, 소프트웨어로 대체하는 능력을 선보이며 연결한 것이다.

다만 대중화는 시기상조였다. XT 컴퓨터가 이제 겨우 보급되는 시점이니 겨우 대학교나 연구소에서만 쓰는 정도다.

덕분에 인터넷 이용료가 무척이나 비싸서, 유재원의 집이 가난한 상태였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그나마 ID 테크놀로지를 창업하고 자본금도 두둑이 있는 상태라서 괜찮다.

“키보드 워리어에 자추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네.”

자추, 자기가 올린 게시물을 자신이 추천하는 일.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유재원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는 심정이다. 하지만 컴퓨서브 유료 아이디가 없다.

아이디가 없으니 BBS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도 없다. 그나마 FTP는 케텔이 아이디를 빌려주는 형식이라 업로드 작업은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가면 컴퓨서브가 해외 영업도 시작해서 쉽게 만들 수 있는데, 지금은 미국 안에서만 서비스 한다.

“뭐, 하루 손해 보는 느낌이지만, 내일 할 수밖에 없네. 흠, 그럼 오랜만에 PC 통신이나 해볼까?”

인터넷을 종료한 유재원은 아쉬운 마음에 케텔 게시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광활한 인터넷에 비하면 무척이나 좁은 게시판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 생각을 올린 게시판이나, 실시간으로 문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채팅방은 확실히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21세기의 가벼운 인터넷 문화가 아니라, 진솔함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대라서 채팅방이라도 마냥 가볍지 않았다.

높임말을 쓰는 건 기본이고, 실제 사람과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의도 지켜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케텔의 사용자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교수, 연구원과 같은 사람들이라 연령대가 높았다. 게다가 몇 다리 거치면 다 아는 좁은 인적 네트워크인지라 무례를 범하는 건 어려웠다.

‘방가방가’나 ‘할룽’ 같은 말이 나올 때도 아닌지라, 채팅 분위기는 딱딱했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20여 개의 채팅방 중에 유재원의 입맛에 맞았던 곳은 ‘프로그래밍 연구회’라는 더더욱 딱딱한 방이었다.

프로그래밍에 관련해 초보와 전문가들이 모여서 팁이나 노하우, 문제 해결 등을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전문분야이기에 유재원은 한창 채팅이 진행 중에 난입했음에도, 어울리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더욱이 입장하고 나서 20분쯤 지났을 때, 유재원의 존재감은 찬란히 빛났다.

-김남승:인피니트D 님, 실례지만 어느 학교에 재임 중이십니까? 우리 학교로 확 모셔오고 싶네요!

인피니트D는 유재원의 아이디였다.

프로그램의 핵심 알고리즘을 놓고 며칠 동안 고민하고 있던 김남승이 유재원을 통해 한 방에 해결해주자 기쁨에 올린 채팅이었다.

재임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유재원을 교수라고 착각해버린 모양이다. 하긴 자기도 한국과학기술원의 교수였고, 그런 자신도 전전긍긍한 문제였는데, 유재원이 단번에 풀어버렸다. 그러니 유재원도 동급으로 착각할 만도 했다.

유재원은 점잖게 과찬이라고 하면서 본인의 정체를 밝히진 않았다.

유명세가 귀찮다거나 두려운 건 아니다. 이런 건 임팩트 있게 꾹 모아 놨다가 한 방에 터트리는 게 이득이라는 본능적 계산이 있었다.

이후로도 채팅은 계속되었다. 같은 채팅방에 있는 교수들, 대학생들과도 말이 정말 잘 통했다.

같은 반 아이들과 놀 때는 정신연령이 너무 다르기에 정신 줄을 놔버려야 했지만, 지금은 지적인 능력을 한껏 뽐내도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유재원이었다. 인제 그만 자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채팅으로 그만 가봐야겠다는 글을 올리고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다음 날.

“으아, 망했다.”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잠에서 깨는 건 실패했다. 일어나 보니 아침 10시가 넘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PC 통신을 하다 보니,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부모님이 일찍 깨워주시지도 않았다.

결국, 유재원의 미국 비즈니스는 본인의 실수로 하루 더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엔 평소 일요일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10시 20분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간 유재원은 이젠 자동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목사님과 사모님께 피아노 능력을 보여준 다음부터 예배를 시작하기 전, 찬송가를 부르며 기다리는 동안 반주를 해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유재원도 부담되지 않으면서 피아노 연주 감각이 사라지지 않을 수준으로 딱 좋은 임무였기에 기쁘게 수락했다.

이후 예배 중에는 여전히 사모님이 연주하지만, 예배 시작 전엔 유재원이라고 신도들 사이에 인식이 딱 박혀버렸다.

오늘도 그렇게 연주를 하는 중인데, 뒤통수가 따가워서 고개를 돌려보니 수경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평소 수경이네 어머님도 교회에 드문드문 나오시는 편이었고, 덕분에 유재원의 어머니와 안면이 생겨 컴퓨터를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 나가 인맥을 쌓아 전자제품을 팔아 보겠다던 어머니의 계획이 수경이 어머니 덕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다만 수경이네 어머니는 교회에 오시더라도 혼자 나오셨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수경이까지 있었다.

손은 피아노를 치는 중이고, 신도들은 찬송가를 한창 부르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며 찡긋 인사를 해줬는데, 수경이가 깜짝 놀란다.

예배 종료 후.

당연하게도 수경이네와 재원이네는 어머니는 어머니끼리, 자식들은 자식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언제부터 피아노도 잘 친 거야? 우리 동네엔 학원도 없잖아.”

“음, 집에서 컴퓨터로 배웠지.”

“세상에. 그게 진짜였어? 엄마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어.”

한 번 읊었던 레퍼토리라서 이젠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유재원이다. 게다가 컴퓨터는 여전히 도깨비 방망이였다. 컴퓨터로 피아노를 배우는 건, 그냥 책을 보고 배우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수경이도 그냥 수긍해버린다.

하여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수경이가 교회에 나온 이유도 밝혀졌다.

“우리 집 가자. 같이 컴퓨터 하면서 나도 좀 가르쳐 줘.”

어제 컴퓨터를 같이 한 게 재미있었나 보다. 또 초대를 해왔다. 유재원도 좋은 컴퓨터 만지는 건 재미있었다.

확실히 집에서와 달리 프레임도 잘 나와서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집에 있는 286도 좋은 컴퓨터지만, 화면에 좀비가 서너 마리만 나와도 게임이 좀 버벅거리는 느낌인데, 386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그런데 오늘은 좀 바쁘네.”

부정적인 대답에 수경이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응? 바빠? 그럼 내일 방과 후에는?”

“내일? 내일에도 일이 있는데…….”

연달아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오니 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제 딴엔 자기가 부르면 바로 와줄 줄 알았나 보다.

그냥 싫어서 거절하는 건 아니다. 당장 집으로 가서 미국과 전화통화로 비즈니스를 해야 했고, 그게 얼마나 길어질지는 해봐야 아는 거다. 게다가 내일은 패키지 포장 작업을 관리해야 했다.

삼보 컴퓨터가 주문한 수량은 이번 주 안으로 배송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삼보 컴퓨터는 별도의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어서 차질이 생기면 큰일이었다.

“음, 네가 도와주면, 화요일에 시간이 좀 날 수 있을 거 같아.”

“응? 뭘 도와주면 되는데?”

유재원은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두 분 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는 지, 이쪽으론 관심이 없었다.

“아, 간단하네! 맡겨만 줘!”

요점을 들은 수경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다음날 새벽.

유재원은 드디어 예정된 시간에 잠에서 깨는 데 성공했다.

지금 시각은 새벽 5시 30분. 미국 캘리포니아는 오후 1시 30분이다.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유재원은 이번 달 전화비를 보고 부모님이 깜짝 놀라시진 않을까 걱정했다.

케텔의 인터넷 요금은 따로 지로 용지로 날아올 테지만, 국제통화요금은 그대로 전화비에 합산되어 나올 테니 말이다.

1988년 미국과의 국제전화 요금은 3분에 6,180원.

5분만 통화해도 웬만한 노동자 하루 일당은 홀라당 날아가 버리는 살인적인 요금이다.

상대가 유재원의 생각을 바로 이해하고 잘 따라준다면 빨리 끝나겠지만, 첫 통화가 그렇게 끝나는 일은 없다는 걸 잘 아는 유재원이다.

아니, 만약 그렇게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들리면 사기를 당한 건 아닌지 의심을 해봐야 한다. 상식이 그렇다. 그래도 유재원은 전화를 받은 상대는 분명 자신의 의뢰를 수락해줄 거로 의심하지 않았다.

“후웁.”

크게 심호흡을 한 유재원은 전화기 다이얼을 누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국가번호, 캘리포니아 주 번호를 연달아 누르고, 사무소 전화번호까지 눌렀다. 그러자 잠깐 묵음 상태가 되었던 전화기는 몇 초가 지나자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유재원의 긴장감이 커졌다.

전화번호가 틀렸다는 음성이 나오지 않았으니, 반은 성공이다.

태평양 해제 케이블을 타고 지구 반대편, 미국과 연결이 시도 중이다. 벨 소리가 4번쯤 울렸을 때,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외국인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왔다.

-안녕하신가? 레밍턴 탐정 사무소요.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가?

순도 100%의 미국식 영어였다.

남자였고, 제법 젊게 느껴졌다. 오늘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니 당연히 낯설지만, 한편으로 반가움도 있었다.

“당연히 일을 의뢰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레밍턴 스팅 탐정님 본인 맞습니까?”

유재원의 입에서도 완벽한 억양의 영어가 나왔다.

전생에 영어 공부만 10년을 넘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대한민국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영어 공부를 하지만 다 잘하는 건 아니다.

유재원의 영어 실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변화가 생긴 건 신과의 거래 이후다.

회귀를 준비하면서 사력을 다해 다시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외국어 포기자였지만, 신과의 거래 이후 영어를 익히겠다는 각오는 학창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간절했다.

그런 간절한 노력과 시간을 들이며 공부를 한 결과, 지금처럼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소, 비서라는 양반은 주급이 딱 한 번 밀렸다고, 짐싸서 나가버렸거든. 그러니 본인이 일일히 전화 응대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고. 고객이 의심할만 하지. 하여튼 의뢰라니 반가운 소리구만. 무슨 사건이오?

“사건은 아닙니다. 회사 차원의 비즈니스죠.”

-비즈니스?

“제가 일하는 회사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곳입니다. 최근 신제품을 출시했는데, 소비자에게 알리고 의견도 듣고 싶어서 대규모 베타테스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사가 캘리포니아에서는 너무 먼 곳에 있어 직접 할 수가 없지요. 레밍턴 스팅 님께서 이 행사의 총감독해주셨으면 합니다.”

키보드 워리어의 진가는 수경이네 집에서 확인했다.

한 번 접해보기만 하면 푹 빠질 거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컴퓨서브 유저를 대상으로 유료 베타테스트를 한다는 거다.

그냥 모집하면 아무도 안 할 테니, 약간의 상금을 걸고 테스터를 모집할 작정이다. 참여자들은 키보드 워리어를 플레이해보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본인들의 소감을 컴퓨서브 게시판에 올리게 한다.

몇십 명 모집하는 게 아니라, 최소 수백 명은 모집할 계획이다. 이들이 소감을 우후죽순 올리면 컴퓨서브에서 키보드 워리어는 단번에 핫 이슈로 떠오를 거다.

-흐음, 거참. 안타깝게도 전화를 잘못 거셨소. 여기는 이벤트 회사가 아니라, 탐정 사무소이오만.

7, 80년대 미국은 탐정의 전성시대였다.

핑커톤 탐정사무소처럼 전미에 가맹점을 낸 유명한 탐정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 정부 경찰이나 FBI의 능력과 장비 한층 업그레이드와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화가 진행되면서 능력이 크게 상승하자, 탐정의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다 알아보고 전화했습니다. 레밍턴 스팅 님이 적임자가 맞습니다. 의뢰비는 두둑히 드릴테니 꼭 맡으셨으면 합니다.”

결국, 무슨 의뢰를 하던, 의뢰비만 확실하다면 일을 맡는다.

80년대 말에는 사람 찾기, 뒷조사하기는 물론 잃어버린 물건이나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심부름센터? 용역사무소? 뭐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정이 악화하였다.

-흐음.

수화기 너머에서 고민이 담긴 숨소리가 전해졌다. 당장 전화를 끊을지, 통화를 이어갈지 생각 중인 모양이다. 유재원은 레밍턴 스팅도 수사와 동떨어진 이번 의뢰를 수락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러한 80년대 말 전업 탐정의 어려운 속사정은 레밍턴 본인이 자신에게 직접 들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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