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돈이 열리는 나무 ==============================
#24-2
키보드를 쳐서 몰려드는 좀비를 잠재우는 것이 게임의 목표다.
“오오!”
유재원의 배경 설명을 들은 수경이네 식구들이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VGA 카드의 성능을 총동원해서 꾸민 풀컬러 CG의 화려함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경쾌한 배경음악, 심장을 뛰게 하는 효과음을 경험해 보는 건 이 자리가 처음이었다.
“내가? 알았다.”
처음으로 수경이네 아버지가 의욕을 드러냈다.
수경이는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머니가 눈을 한 번 흘기니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네! 그러면 기본 자리 연습부터 하실까요? 마우스를 움직여서 시작 버튼을 누르세요. 눌러야 하는 버튼은 맨 왼쪽에 있는 거예요.”
수경이 아버지는 유재원의 설명을 곧잘 따라 하셨다.
“아, 이걸 이때 쓰는 거였어?”
마우스를 처음 잡아보시는 듯했지만, 슥 움직여 시작 버튼을 딸깍 누르니, 스타트 게임이란 문구와 함께 유재원이 설명했던 좀비 러쉬 사태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나타났다.
그림체는 사실적이기보다 SD 캐릭터같이 해학적으로 그렸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주로 할 것이라서 피와 살점이 튀는 건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대신 완성도에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자소, 단문 연습 등에도 스토리를 담았다.
언령의 힘을 확인한 키보드 워리어가 버려진 창고로 가서 능력을 써 보는 것이 자소, 단문 연습이다. 창고엔 빈 병이 주륵 늘어져 있는데, 빈 명마다 알파벳 문자가 들어 있다. 처음엔 A, S, D, F와 같은 기본적인 단어가 나온다.
탕탕탕!
수경이 아버지가 더듬더듬 알파벳 자소를 치니,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병이 깨지는 소리도 경쾌하게 났다.
유리병이 깨지며 파편이 날리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파편이 터지는 걸 일일이 그린 게 아니라, 파편 조각을 스프라이트로 지정해서 컴퓨터의 처리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터져 나가는 것처럼 만들었다.
일손이 줄어드는 반면, 권장사양이 올라가게 한 주범이다. 효과음과 배경음악에도 신경을 썼다. 미디 장비를 갖춘 사람에겐 최상의 음질을 즐길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좋은 소리가 나도록 튜닝을 했다.
효과음도 유재원이 직접 녹음한 것으로, 병이 깨지는 소리도 실제 병을 깨서 만들었다. 실제 소리를 담지 못한 건 총소리 정도다. 대신 널빤지로 시멘트 바닥을 후려쳐 나오는 큰 소리를 담아서 사운드에디터로 피치와 톤을 조정해 총소리처럼 만들었다.
수경이 아버님은 정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신나는 반응이 터지니 당연했다. 오락실의 겔라가 같은 정적인 게임과는 질이 달랐다.
“아버님! 이제 한 번 종합 평가를 해봐도 될 거 같은데요?”
“그러냐?”
압권은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서 시작되었다.
유저 인터페이스부터 직관적이다.
왼쪽 아래에는 키보드 워리어의 에너지 막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정확도와 속도 따위가 있다.
오른쪽 수치는 실시간으로 타이핑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버프 능력이기도 했다. 정확도가 올라가면 좀비에게 주는 데미지가 커지고, 빠르기가 올라가면 유용한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식이다.
수련을 거친 키보드 워리어는 도시를 위협하는 좀비 군단에 뛰어들었다.
게임속 키보드 워리어 본체는 사용자가 키보드 워리어를 직접 조종하진 않아도, 알아서 척척 움직인다. 대신 화면에 나타난 좀비나 적들을 타이핑으로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게 사용자가 할 일이다.
“억!”
처음 우르르 몰려나오는 건 흡혈박쥐 때였다.
박쥐들 가슴팍엔 저마다 알파벳 문자들이 하나씩 들어 있다.
“저 단어를 입력하면, 해당 몬스터의 에너지가 깎이는 거예요.”
약한 몬스터는 지금 나온 박쥐처럼 문자 하나 딸랑 있지만, 강한 놈들은 단어가 들어가 있다. 더욱 강한 놈은 긴 단어가 여러 개 부여했다.
문자 길이와 갯수가 몬스터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경이 아버지는 당황하셨는지, 자소 연습 때와 달리 오타가 좀 많이 나왔다.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키보드 워리어에게 달려들어 데미지를 깎는다.
“아빠, 잘 좀 해봐! 에너지가 엄청나게 날아갔어!”
금방 게임의 방법을 익힌 수경이의 훈수도 시작되었다.
곧이어 좀비가 나왔다.
좀비는 단어도 어렵고, 한 방에 죽지도 않는다. 수경이 아버지가 겨우 단어를 없앴는데, 새로운 단어가 뜬 것이다. 당연히 단어도 달라진다. 심지어 공격을 당하니 반격까지 한다.
불을 뿜어 손에 뭉치더니 키보드 워리어를 향해 던지는 거다. 당연하게도 불덩이에도 단어가 달려 있었고, 제때에 입력하면 요격이 된다.
한두 마리 있을 땐, 초보자도 좀비를 잡을 수 있지만, 떼로 모이면 손이 꼬이면서 난도가 확 올라간다.
유재원은 최대 다섯 마리 이상 나올 수 있게 했다. 괜히 좀비러쉬라는 제목이 붙은 게 아니다.
“어어?”
이제 막 컴퓨터를 처음 만져보신 수경이 아버지가 좀비를 물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꾸엑 하는 소리와 함께 키보드 워리어는 장렬히 전사했다.
“이번엔 내 차례!!”
이번엔 수경이가 나섰다. 완전 컴맹에다가 눈썰미도 아버님보다 떨어지는 수경이가 갑자기 게임을 잘하게 될 일은 만무하다. 예상했던 그대로 초반에 나오는 박쥐떼에 에너지가 반이나 깎이더니, 특수능력 하나 없는 약한 좀비 하나 잡지 못하고 전사했다.
“제가 시범을 보여드릴게요.”
“그래, 한 번 보여줘라.”
이번엔 유재원이 키보드를 잡았다.
초보자들뿐만이 아니라 타이핑 속도가 빠른 숙련자들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
흡혈박쥐가 우르르 나오는 초반, 박쥐를 다 잡으면 아이템도 떨어진다. 전멸 폭탄, 인스턴트 킬, 체력 회복 등의 아이템이 랜덤으로 나오는 거다.
슈퍼밤(Super Bomb)이란 아이템을 챙긴 유재원은 본격적인 좀비 학살을 시작해 보였다. 신들린 듯한 타이핑 속도로 좀비가 발사하는 불이나 얼음 따위는 날리기도 전에 깼고, 좀비도 순식간에 삭제했다. 격전 중에 아이템을 품에 쥐고 빠르게 도망가는 보물 좀비까지도 다 잡아냈다.
그렇게 몇 번 러시가 계속되더니, 음악이 강렬하게 바뀌었다. 전자기타 리프가 시작되면서 긴장감을 올리고, 멜로디도 급박해졌다.
보스전이었다.
화면의 중심부를 다 잡아먹는 커다란 좀비였다. 에너지 막대는 모니터 상단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길게 나타나서 엄청나게 강한 놈이라는 걸 한눈에 보여주었다.
보스 좀비는 처음부터 전체 공격을 시작했다. 날카로운 얼음창 9개를 동시에 던지는 거다. 얼음마다 단어가 여러 개 붙어 있어서 전부 요격하는 건 유재원이라도 불가능이다. 이때 유재원이 습득한 아이템을 사용했다.
아이템을 쓰는 건 단축키가 아니라, 아이템의 이름을 직접 입력하는 것이었다. 괜히 키보드 워리어가 아니다.
슈퍼밤을 치니 핵폭탄 터지는 듯한 화염과 함께 펑하는 고드름 덩어리가 싹 사라졌다. 보스 좀비의 에너지 막대도 한 방에 1/4를 깎았다.
이후 유재원은 신들린 듯한 타이핑 실력으로 보스를 공략했다.
에너지가 1/3 남았을 때, 보스가 갑자기 졸개들을 소환했을 땐 인스턴트 킬 아이템을 썼다. 아이템의 이름 그대로 한 방에 몬스터를 죽이는 스킬인데, 게임에서는 좀비가 품고 있는 단어들의 머릿 글자만 치면 바로 즉사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다만 난이도 균형을 위해서 스킬 유지시간은 겨우 1.5초로 짧게 설정했다.
그런데도 유재원은 보스가 불러낸 졸개 7마리를 인스턴트 킬로 다 잡아냈다. 곧이어 보스를 공략하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보스가 죽자 게임 완료라는 글자와 함께, 플레이해주어서 고맙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그 아래로 플레이를 하며 쳤던 영타 속도와 정확도 같은 게 시간대별 막대 그래프로 쭉 나타났고, 오타가 많이 나왔던 문자도 알려주었다.
이러한 통계를 보여주는 건 보스를 물리치지 않고, 게임 오버를 당해도 나온다.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가 게임 기능을 강화했지만, 엄연히 교육용 소프트웨어였으니 말이다.
통계 표시는 모조리 퍼펙트 S.
유재원은 플레이 중에 오타 하나 나지 않았고, 타이핑 속도도 최저 200을 찍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570을 찍었다. 한글 타자보다는 50타 정도 빠른 것이다. 최근 프로그래밍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한글 타자보다 영어 타자가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스태프 롤이 올라왔다.
ID 테크놀로지라는 회사이름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항목에 유재원의 이름이 떡하니 자리했다. 줄곧 영어만 나왔던 것과 달리 한글도 병기해 놔서 훨씬 도드라져 보인다. 마지막엔 회사의 주소는 물론 연락처도 떴다.
그렇게 보스전을 마친 유재원은 수경이네 가족을 돌아보았다.
비장의 병기를 보여준 소감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수경이는 물론 부모님까지도 보통 놀라신 표정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유재원도 자신만만했다.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의 형태는 비록 게임이지만, 학습 효과는 완벽하다고 확신한다. 보스전까지 한 번도 이어서 하지 않고 깨는 사람이 있다면, 분당 500타는 완벽히 칠 수 있을 것이다.
수경이에게 컴퓨터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유재원은 바로 일을 시작했다.
모뎀에 전화선을 꽂은 후에 터미널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추억의 비밀번호 ‘ATDT 01410’를 입력했다.
전화 접속기 특유의 소리가 나더니 추억의 케텔 화면이 나타났다.
PC통신의 VT모드가 바로 그 정체였다.
SKC 총판에 디스켓을 수령하러 갔을 때, 한국경제신문사에 들려 만든 아이디를 입력하자 접속이 되었다. 웬 한국경제신문사냐고 할 수 있겠지만, PC통신의 조상격인 케텔을 운영하는 회사가 한국경제신문이었던 탓이다.
여기에서 유재원은 유료 서비스인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미국 컴퓨서브의 FTP서비스에 접속했다. 그리고 오늘 진가를 확인한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를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무슨 예상 시간이 40분도 넘네.”
ZIP로 압축해서 360KB짜리 디스크 2장, 총 720kb밖에 안 되는 용량이다.
현대에선 눈 깜짝할 사이에 전송되는 용량이지만, 지금 나오는 완료 예상 시각은 정확히 42분 49초였다.
이 당시 인터넷은 이어 올리기 기능도 없는 터라, 중간에 끊어지면 도루묵이다. 제발 한 방에 올라갈 수 있도록 유재원은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려 3번의 시도 끝에 업로드 완료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자신이 올린 걸 다시 받아서 실행까지 해본 유재원이다.
“좋아.”
제대로 돌아간다는 걸 확인한 유재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료실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다음 순서가 훨씬 중요했다. 바늘 속에 바늘을 숨기는 것처럼, 디스켓 더미 속에서 평범하게 생긴 디스켓 한 장을 꺼내 디스크 드라이브에 삽입했다.
보기엔 평범해도 들어있는 건 아니었다. 회귀했던 그 날 작성한 문서가 들어 있는 디스켓으로 2번에 걸쳐 걸린 암호를 풀고, 문서의 내용을 보석글로 불러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은 유재원은 정성스러운 손길로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미국 공략의 시작점이 바로 이 전화번호였으니,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어제는 좀 일찍 올려보았는데,
역시 연재 시간은 정시를 딱 지키는 게 좋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시간을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