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돈이 열리는 나무 ==============================
#24-1
유재원은 자신의 어머니도 엄청난 사람이라 생각했다.
88년도에 컬러 모니터 달린 컴퓨터를 단지 교육용으로 사주시는 분은 세상엔 둘도 없을 거라고 여겼던 탓이다.
그런 분이 또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386을 사주실 줄은 또 몰랐다. 본체 값만 거의 500만 원은 할 텐데, 그걸 떡 하니 사는 수경이네는 확실히 부자가 맞나보다.
대호 컴퓨터도 대단하다.
이 정도 모델은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거다. 주문이 들어온 후에야 부랴부랴 만들었을 텐데, 순식간에 배달을 끝내버렸다.
“대박? 대박이 무슨 뜻이야?”
아이구.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21세기의 유행어나 속어는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예상도 못 한 386 때문에 참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좋다는 뜻이야. 큰 배(舶)라는 거지. 엄청나게 큰 배를 거저 얻은 느낌이랄까.”
“잉? 거저 얻은 거 아닌데? 비싸게 샀다고 했는데?”
그래. 수경이네는 비싸게 샀겠지. 다만 386 컴퓨터를 가까이서 만져 보게 된 유재원은 확실히 대박이다. 서울까지 오가는 건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이젠 바로 옆 동네에 있다.
“하여튼, 엄청나게 좋다는 거야. 켜 보긴 했어?”
“응? 응! 당연하지.”
“그럼 켜볼래?”
유재원의 말에 수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가까이 가서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본체 버튼과 모니터 버튼을 두고 한참 망설인 끝에 모니터 버튼을 먼저 눌렀다. 그리곤 가만히 있는 거다.
“본체 전원도 켜야지.”
“응? 이거도?”
유재원의 설명에 본체 전원을 켰다.
디스크 드라이브를 점검하고, 하드 디스크도 점검하면서 나는 친숙한 득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바이오스 포스팅이 되었다.
다행히 하드디스크에 도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부팅은 빠르게 끝났다.
“컴퓨터 끌 때는 어떻게 끄는지 알아?”
“반대로 하면 되지!”
대호전자 설치 팀은 어제 와서 뭘 가르쳐준 거지? 최소한 컴퓨터 켜고 키는 상식은 알려줘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끄면 비싼 하드디스크 금방 고장 난다. 며칠 안에 베드 섹터가 암세포처럼 증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하드디스크 파킹을 해줘야 해.”
유재원은 차근차근 수경이에게 컴퓨터 기본 상식부터 전수했다.
수경이도 낯선 컴퓨터에 겁을 먹은 걸 빼면, 기본적으로 똑똑한 아이라서 금방 이해했다. 쉽게 외워지지 않는 건 메모지에 적어두기도 했다.
유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도스 명령어를 일일이 적어 놓는 식이다.
“이건 선물이야.”
그렇게 기본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유재원은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낼 수 있었다. 바로 한글판 키보드 워리어 1.0였다.
삼보 컴퓨터 회장님께 드린 것처럼 풀 패키지였고, 유성 사인펜으로 사인도 해서 줬다.
“우와! 대박!”
대박이라는 유행어는 금세 수경이에게 전염되어버렸다. 역시 아이들 앞에서 말조심해야 한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큼직한 패키지를 받아든 수경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도도도 달려나갔다.
“아빠! 엄마! 이거 재원이가 나 선물로 줬다!”
하여간 못 말리는 말괄량이다.
곧 다시 돌아온 수경이는 부모님을 대동하고 있었다. 역시나 부모님은 유재원의 선물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말로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나 본격적일지는 모르셨던 모양이다. 유재원이 만든 패키지는 이 시대의 최신 문물보다 감각적으로 더 뛰어났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도 딱 달라 보였으니, 그럴 만했다.
덕분에 유재원은 수경이 부모님 앞에서 한바탕 설명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패키지를 뜯어서 시범을 보여줘야 했다. 여기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패키지를 그대로 가지고 싶은 수경이와 중요한 건 소프트웨어니까 컴퓨터에 설치해야 한다는 수경이 부모님이었다.
인제 보니 수경이 녀석 은근히 오타쿠 기질이 보인다.
나중에 다른 패키지를 선물할 때는 보관용, 실제 사용용 따로 챙겨줘야겠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패키지를 열어 키보드 워리어 1.0을 설치할 수 있었다.
유재원은 마음이 급했다.
챙겨온 키보드 워리어는 한글판뿐만이 아니었다. 미국판도 있었다. 286이라도 실행은 할 수 있으니 혹시나 하고 챙겨와 봤다. 그런데 수경이 컴퓨터는 386 DX이니 단순히 실행뿐만이 아니라 최대 성능도 확인할 기회였다.
키보드를 다루는 유재원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디스켓에는 두 개의 실행 파일이 있는데, 하나는 디스켓 자체로 실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드 디스크가 있는 컴퓨터를 위한 인스톨 프로그램이었다.
인스톨을 실행하자 몇 가지 메시지 상자가 떠올랐다. 인터페이스는 당연히 리본 인터페이스였다.
“어? 이름 입력하라고 나왔다!”
사용자 이름을 등록하라는 메시지와 입력창이 떴다. 유재원이 이건 직접 하라며 자리를 비켜주자 수경이는 느리디느린 독수리 타법으로 ‘류수경’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세 글자 치는 데 1분은 걸렸으면서 뿌듯한 표정이다.
엔터키를 치자 새로운 항목이 나타났다.
“등록 번호?”
“매뉴얼 뒷장에 붙어 있어.”
이것이 바로 유재원이 마련한 불법복제 안전장치 중 하나였다.
영문과 숫자를 조합한 16자리 글자였다. 특정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일이 생성해서 나온 문자열이었고, 패키지마다 다 달랐다. 로터스 1-2-3의 수식을 사용해 생성한 다음, 스티커 용지에 출력해 매뉴얼에 붙여줬다.
이걸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하니, 패키지 조립 작업을 하는데 일손이 많이 필요해졌다.
등록번호도 2분에 걸쳐 입력한 후에야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다.
ID 테크놀로지의 로고나 키보드 워리어라고 뜰 때, 수경이네 가족들은 와 하는 탄성을 내주었다. 특히 만든 사람들 항목을 실행해서 유재원이라는 이름도 보여주고, 도와주신 분들 이름에 학교 선생님들이 나오는 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거 매일 실행해서 연습해. 장문 연습으로 분당 500타 이상 나오면 웬만한 프로그램은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컴퓨터를 몇 번 켰다 끄고, 하드디스크에 설치된 키보드 워리어도 실행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익숙해진 수경이가 실행법을 적어놓은 쪽지를 안 보고 실행할 수 있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유재원은 미국판을 꺼내볼 수 있었다.
“이건 뭐야?”
“이건 영어 자판 연습 전용이지.”
수경이는 시큰둥했다.
한글판처럼 완전한 패키지 상태가 아니라, 허름한 디스켓 3장에 담아왔기 때문이다.
“영어? 알파벳 말이니?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야?”
시큰둥한 수경이의 대신 수경이의 부모님이 관심을 보이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외국어 중 최고의 인기는 영어였다. 80년대 말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네. 그런데 영어 학습이 아니라 영문 자판을 익히는 거라서 좀 달라요.”
인스톨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하드 디스크에 설치부터 했다.
오로지 영문으로만 나왔다. 그리고 훨씬 더 복잡했다. 등록번호를 넣을 필요는 없는 대신, 컴퓨터의 하드웨어 설정을 해줘야 했던 탓이다.
운영체제가 고도화되면서 사용자가 따로 설정할 것은 싹 사라졌다. 기껏해야 설치할 폴더를 지정해주는 게 전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도스는 그야말로 무식한 운영체제라서 컴퓨터에 장착된 장치도 프로그램별로 다 알아서 찾아 사용해야 한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간단한 형태이긴 했지만, 컴퓨터의 성능과 장착된 확장 카드를 검사하는 기능을 넣었다. 설명은 거창해도 실상은 각 장치의 ID 어드레스에 기록된 제목을 읽어오는 것이었다.
작동은 정상적이었다.
한 번 실행하니 수경이 컴퓨터의 스펙이 한 화면에 딱 띄워졌다.
CPU는 인텔 386 DX였고 작동 속도는 33MHz. RAM은 1메가. 하드 디스크 크기는 40메가, 비디오카드는 VGA에 512KB의 메모리. 여기에 사운드 카드도 달려 있었는데, 크리에티브사의 사운드블라스터 1.0이었다.
FM 신시사이저만 있는 애드립카드에 음성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PCM 칩을 추가한 기본적인 카드였다. 디스크 드라이브도 5.25인치는 물론 3.5인치까지도 있었고, 심지어 지금은 거의 쓰는 곳이 없는 3 버튼 볼마우스까지 달려 있었다.
대호 전자에서 컴퓨터를 구매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에 제일 좋은 것만 다 집어넣은 모양이다.
어쩐지 저번 화요일 컴퓨터 계약을 체결했을 때, 어머니가 하루 종일 웃고 다니신 이유가 있었다.
종합 성능 점수로 S급이 딱 나왔다. 사운드를 다 사용하면서 동시에 60프레임으로 꾸준히 뽑아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양을 확인한 유재원은 바로 설치를 시작했고, 설정을 끝내자마자 실행했다.
-아이! 디! 테크놀로지!
화면 반쪽만 한 I자와 D자가 나타날 때,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거렸다. 곧이어 테크놀로지라는 글자가 떠오르며 지잉 하는 울림을 선사했다. 곧이어 키보드 워리어라는 글자와 함께 멋진 전신 슈트를 차려입은 사람이 딱 나타나며 키보드 워리어라는 글자가 찍혔다.
-좀비 크러시!
한 박자 늦게 나타난 글자는 피범벅이 된 형태다.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의 새로운 로고화면이었다.
“우와!”
수경이의 가감 없는 감탄이 나왔다.
미래형 전신 슈트는 지옥의 악마라도 때려잡을 듯 멋있었다. 21세기 디자인이니 80년대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만 우람한 총을 들고 있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진 무기는 키보드!
유재원은 미국판 키보드 워리어를 하나의 게임처럼 꾸몄다.
게임의 내용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몰려드는 좀비를 때려잡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게임에선 총을 쏴서 잡지만, 키보드 워리어에서는 타자를 해서 잡는 거다.
자소, 짧은 단어, 장문 연습은 게임의 기능을 알려주는 튜토리얼이었고, 본 게임은 좀비 크러쉬다.
유재원이 생각했을 때,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한글판 타자 연습기로는 미국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그래서 게임 기능을 강화할 생각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외계인 공습 같은 형태는 큰 재미가 없다.
386이 대중적인 미국에서는 시시한 게임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아예 생각을 바꿔 게임이 중심이 되도록 했다.
대신 게임의 설정은 한글판을 그대로 승계했다.
외계인이 준 선물은 바로 ‘언령’. 말의 힘이 수천만 배로 강화되어 사람과 사람끼리 이심전심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한 사람은 말의 힘으로 기적을 이뤄내기까지 한다.
그런데 부작용이 터졌다. 사람의 말에는 긍정적인 것도 많았지만, 부정적인 것도 많았던 탓이다. 그리하여 저주를 받고 영면에 들었던 부정한 시체들까지 살아나게 되었다. 이른바 좀비 러쉬 사태다.
세상이 혼란에 빠져들 때, 영웅이 나타났다. 외계인이 준 언령의 힘을 깨달은 주인공이었다.
그의 무기는 언령을 한층 증폭시킬 수 있는 키보드!
총 대신 키보드를 든 전사, 그래서 키보드 워리어다!